달콤한 밤 되세요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1
노정 지음, 드로잉메리 그림 / 폴앤니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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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솔직히 말할 게 있다. 거의 25년 가까이 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어떤 계기로 누군가가 왜 소설을 읽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난 어거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하도 딱딱한 책만 보다보니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진실한 답변은 아니었다.


난 어쩌다가 보는 티비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픈 모습이 보이거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치면 그냥 티비를 꺼버린다. 그 모습을 직시할 용기가 없어서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난 언제부턴가 소설 속의 상황에 감정이 이입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티비에서 가슴 저린 사연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하게 활자로 그려진 어떤 상황이 내 자신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이 두려웠다.


원래 나는 소설을 무지하게 좋아했었고, 한때 문학소년이었다니까... 소설을 쓰기도 했었고, 소설로 날밤을 지새기도 하고 소설에 술을 쏟아붓기도 했다. 공장에 다닐 때만 해도, 장길산은 각 권마다 소주 몇 박스씩은 좋이 퍼부었었고, 벽초의 임꺽정이며 헌책방을 돌며 찾아낸 태백산맥이며 기타 등등 장편소설에 갖다 부은 술이 월급의 절반은 될 거다.


시도 그랬다. 출판을 되지 않았지만 난 내 시만 모아 제본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안상 본가의 구석구석을 뒤지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수많은 시집들에 소주잔 좋이 갖다 부었다.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는 그 한 페이지마다 소주 열 댓병씩은 쏟아 부었을 거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난 시며 소설의 내용에 내가 전이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순간에 감전된 듯 어떤 상황이 종이를 떠나 내 가슴에 들이 박히면 때론 몇날 며칠을 잠을 못자기도 했다. 난쏘공 같은 경우엔 그냥 몇날 며칠을 소설의 주요 장면들이 그대로 꿈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웃기는 건 이제는 난쏘공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난 소설이며 시며 문학의 장르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소설이 어떻게 생겨먹은지 까먹을 지경에 이르렀던 거다.


물론 중간 중간 소설을 아예 안 본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어 손을 뻗은 경우는 없고,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읽은 소설들은 그닥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그 소설들 중에는 깨나 이름 있는 작가의 이름 있는 소설도 있었는데, 소설이 수준 낮아서가 아니라 진짜로 내가 소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기억이 나질 않는 거다.


노정의 "달콤한 밤 되세요"는 어쩌면 의리때문에 손에 쥐게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손에 쥐기까지의 여정을 이렇게 중언부언한 건 뭐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번 기회에 솔직히 소설에서 멀어진 이유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일 뿐이다. 아무튼 그렇고. 그래서 일단은 그 의리로 손에 쥐게 된 건데, 역시나 난 또다시 지면에서 튀어나온 활자와 싸움질을 하며 노정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전이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말았다. 


문제는 나의 그러한 노력이 노정의 "달콤한 밤 되세요"에서 번번이 무너졌다는 거다. 그 의리의 전제가 된 공통의 기억이라는 것이, 이 소설 여기 저기에서 나에게 속삭인다. 너도 알잖아, 그 때 그 일을. 너도 느꼈잖아, 그 때 그 감정을... 그러므로 너는 벗어나려고 하지말고, 그냥 받아들이렴. 그 고통을 다시 상기하라고, 그 고통을 다시 느끼라고, 그 고통에 다시 몸부림쳐보라고. 넌 정말 고통스러웠던 거야? 넌 정말 힘들었어? 나만큼? 왜 너는 나만큼 힘들지 않았는데? 왜? 왜? 왜?


그 죽음은 누구의 책임이었나를 집요하게 묻는 대목에서 난 그 질문의 화살끝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 이 노작가가 지금 그를 아는, 그리고 어떤 죽음을 아는 모든 이에게 난사를 하고 있는 거다. 왜 모른척하냐고, 왜 잠자코 있냐고. 너희들도 각자의 소명서를 작성해보라고. 벌써 잊지 않았다면, 차라리 변명이라도 해보라고... 아프다. 난 어디서부터 그 책임의 일단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처음에는 정말 가볍게, 아주 즐겁게, 내가 아는 누군가의 첫 소설을 축하해주는 마음과 함께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중간을 넘어가면서 한 페이지 넘기기가 너무 어렵다. 많이 어렵다. 참으로 오랫만에 이렇게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마치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듯한 버거움을 느껴본다. 그렇게 책장 넘기기가 고역이 될 무렵, 마지막장 '내일은 내일의 캐셔가 온다'까지 왔다. 글쎄, 왜인지 모르겠지만, 책 한 권을 지나오면서 숨이 가빴는데, 마치 작년 신정 다음날 심장에 스탠트를 집어넣어야만 했던 그 가슴의 통증마저 느꼈었는데, 이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뭐랄까, 해원(解寃)이랄까... 그런 심정이 들고, 뭔가가, 가슴에 막현던 그 뭔가가 스윽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통한의 어떤 상념이 녹아내리는 그런 심정이 이런 걸까나...


자, 그리하여 다시금 용기를 내서 처음부터 돌아간다. 2회독은 1회독보다 쉽다. 아파야 할 것을 이미 다 아파버렸기 때문일까. 3회독에 들어가니 글들이 보인다. 그리고 피식피식 웃음도 나오고, 눈물도 나오고, 울음도 나오다가, 다시 피식피식 웃게 되었다. 그래 뭐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울다 웃으면 X꼬에 털난다고 하지만 나야 뭐 이미 무성한 걸. 하... 너도 참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했구나. 하지만 말이야, 아마 너와 같이 그 시간을 지냈던 모든 이들이, 그 사건을 함께 겪었던 모두가 크든 작든 아직 그 상처를 다독이며 살고 있을 거야. 내가 그렇고 또 누군가가 그렇고.


조금은 슬픔과 흥분이 가라앉은 후 다시 들여다본 "달콤한 밤 되세요"에는 저 가슴 밑바닥 어딘가를 툭툭 건드리는 말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대충 뽑아보자면.


젊어서는 프런트에서 캐셔 하지, 늙으면 청소팀 하면 되지. 호텔이 바로 '평생직장'이다, 너어. 34쪽.

안 잠기는 건 둘째 치고 문이 닫히질 않는다고요! 호텔이 뭐가 이래! 엉! - 50쪽.

자누임 니가 애새끼 셋 딸린 가장의 고충에 대해 뭘 아니. 느이들은 퇴근하면 잘 수 있지? 나는 못 자아. 계속 여행사 일정 잡고 영업 뛰고, 집안일 보고. 내가 삶이 참 고달퍼. - 56쪽.

리재는 죽어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립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거리를 두지 못합니다. 무심해지지 않아요. - 113쪽.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원래 시간차 공격이니까! - 122쪽.

사람 목숨을 갖고 겁박을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너 죽여버리겠다거나, 아니면 나 죽어버리겠다거나. 언어는 늘 실질보다 과잉이라서 인류가 진적 멸종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 147쪽.

죽도록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난 뒤에, 그들을 죽도록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 158쪽.

아직 애도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면 잠시 너의 상실에만 집중하렴.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살아. 우리 모두 그래도 돼. - 1667쪽.

바닥을 보고 싶지 않으면 노조 같은 건 꿈에도 생각지 말아요. 지옥을 맛보게 될테니까. - 193쪽.

착한 사람들만 늘 이렇게 당하고 산다고. 세상사가 원래 좀 그래. 느이들은 그렇게 살지 마라. 사람이 좀 못돼먹어야 잘 살아.- 214쪽.

마케팅 측면에서 고찰해보자면 드림초콜릿은 '메인' 고객층의 '니즈'를 정확하게 '타겟팅'하는 성공적인 '네이밍'에 해당한다. - 223쪽.

일부일처제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쓰레기 분리수거 지침도 무너지고, 심지어 물탱크와 문짝까지 무너지는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기이한 일이었어요. 이 호텔은 나에게 이렇게 호통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민낯이다! - 261쪽.


왜 이 문장들이 눈에 박혔는지는 또 생각을 해봐야겠다. 서평을 쓸정도로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보니, 나는 그저 내 사변적 이야기를 내 생각에 버무려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이야기하기 좋은 문장들이 저 문장들이었나보지 뭐. 아무튼 그렇고.


가만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호텔문짝이더냐... 데이트 폭력을 둘러싼 경찰과 캐셔의 서로 다른 입장도 그렇고, 리재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입장도 그렇고, 라쇼몽 패러디인가... 아, 다시금, 이 소설에서 문짝은 아주 중요한 키워드처럼 보인다. 어쩌면 우린 모두 나름의 문짝을 열기 위해 아둥바둥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드림초콜릿'의 문짝처럼 언제 내려앉을지, 언제 키가 고장날지, 언제 아구가 틀어져 닫히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열 어떤 문짝에 매달려 신음하는 존재가 우리 자신이 아닐지. 그러고보면 나명이나 리재가 아닌 문짝이 주인공인 것이 맞다고 본다.


어쨌든 간에, 내년 노벨문학상후보에 이 소설의 작가가 올라갈지 모르겠다. 미리 축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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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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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는 추상적 개념으로서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나름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도덕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권리의 개념이 단지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적 규범으로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인지이다. 최근 나는 동물권이라는 '권리'이론에 대해 상당히 골을 썩고 있다. 이 권리는 과연 법적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동물 해방 - 개정완역판
피터 싱어
연암서가, 2012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은 동물권 운동의 바이블이라고 알려져 있는 책이다. 예전엔 그냥 한 번 훑고 넘어갔는데, 그 당시에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 이 책을 읽고 난 후 '동물권'을 법적 권리체계로 유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또는 적절한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책 자체는 사실 '채식'을 하자는 결론을 위해 씌여졌다고 본다. 피터 싱어는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게 논리타당하다고 계속 중언부언한다. 채식을 하자고 주장하기 위하여 이렇게 실제 사례를 찾아 넣고, 거기에 철학적 주제, 즉 종차별주의와 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겠다.


그러나 피터 싱어의 주장은 오히려 동물의 해방보다는 인간과 동물의 적대관계가 극복되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 적대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기도 한데, 이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피터 싱어가 제시한 것은 채식이며 동물권이다. 인간이 채식을 하고 동물권을 보장하면 인간과 동물의 적대는 해소될 것인가?


법적 차원에서 동물에게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 즉 동물을 법적 주체로 설정한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아직 그 타당한 논리적 배경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동물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은 차라리 인간의 오만함을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피터 싱어가 주장하는 종차별주의의 철폐를 위해서는 동물권을 부여할 일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의 멸종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인간이 존재하면서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형식을 유지하는 한, 인간이 가진 법적 권리에 필적할만한 동물의 법적 권리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피터 싱어가 이야기하는 동물해방이라는 건 그 자체로 피터 싱어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인간으로서의 이기심과 오만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연민과 애정일지는 몰라도 동물의 해방을 추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우월함을 재확인하는 장치로 전락할지 모르겠다.


나는 동물권이라든가 동물해방이라는 거창한 말로 인간이 할 수도 없는 일, 더 나가 동물이 스스로 할 수도 없는 일을 의제하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법적 관점에서 볼 때, 답 안 나오는 '동물권'을 운운할 일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 자체의 윤리적 도덕적 지위를 기반으로 동물을 매개로 하는 인간과 인간 간의 권리의무를 더 강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더 합리타당하게 동물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을 듯하다.


공부를 더 해야겠지만, 피터 싱어의 논리는 오히려 그동안 인간의 이성이 개화하면서 쌓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인권의 보장을 기반부터 흔들 우려가 있다. 인간에 대해서는 우생학적 논리를 적용하면서 동물의 권리를 운운하는 건 존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발상을 현실의 법체계로 만들고 그 극단의 결과를 보여준 자들이 바로 나치다. 동물보호를 위한 법률을 만들었던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법률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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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박정훈 지음 / 빨간소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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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있고, 이래 저래 조금은 기본정보를 알고 있는지라, 이 사람이라면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예측의 범위 안에서 책의 내용은 전개된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박정훈
빨간소금, 2019

내용의 전개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고, 그 내용들에 대해서는 정책적으로도 갑론을박들을 해왔던 당사자이기도 해서 내용 자체로부터 새롭게 어떤 자극을 받은 건 없다. 하지만, 최근 노동문제에 대해 매우 센 이야기를 하는 어떤 이들이 책을 읽는 내내 겹쳐지면서, 그리고 최종장에서 결국 기승전기본소득으로 이어지는 식상한 결론에 당하면서, 몇 가지 고민거리가 나오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시종일관 '알바'라는 어떤 일의 형태가 '직업'으로 인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당연하다. 이미 무슨 일을 하느냐를 떠나 '비정규직'이라는 일의 형태가 '직업'처럼 이해되고 있는 마당에, 어쩌면 가장 대표적 '비정규직'이라고 할 '알바'가 직업이 아니라면 뭔가라는 항변은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그런데, 이 '알바'도 '직업'이다라는 주장은 노동문제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이면의 대립을 환기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하나는 "비정규직 철폐"를 당면과제로 설정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비정규직 차별철폐"라는 구호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희석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의 입장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일의 유연성은 사회적 산물이기는 하나 그에 따른 개인적 선택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관점에서 이 입장은 출발한다. 결국 이 입장은 비정규직 직종의 확산과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일률적으로 비정규직 철폐를 통해 해소할 수는 없으므로,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중요한 투쟁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입장의 주장이다.

나는 회색분자인지라, 이 두 입장이 대립하고 충돌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순위를 정하라면, 나는 차별철폐가 우선 중요하고, 그러면서 비정규직 확산의 추세는 멈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 현실에서 차별의 문제가 비정규vs정규의 틀로 고착화되다보니 비정규직철폐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실 노동현장에서의 차별은 비정규vs정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차별은 결국 자본이 조성하는 노노대립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고, 이와 관련해 비정규직을 정규직도 아니고 '정규직화'하는 미봉책을 마치 비정규직 철폐인 듯 오인하는 현상을 없애려면 차라리 비정규직 차별을 획기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다보면, "비정규직 철폐"가 우선과제라는 입장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생각이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그 활동가들은 여전히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약 1년 전쯤의 한 토론회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어던 발제에 지정토론자로 토론을 했는데, 바로 그때 핵심적인 논란거리가 "비정규직 철폐냐, 비정규직 차별 철폐냐"였고, 그 자리에서 나는 그 활동가들로부터 조금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법학이라는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다보니 "비정규직 철폐"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노동법학자 또는 노동사회학자들과 많이 접촉하게 된다. 내가 종잡을 수 없는 건, 이들은 주로 노동법을 하면서 노동법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기실 노동관계법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한다고 한들 비정규직의 증가추세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무시한 채 비정규직 철폐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럴깝사 난 왜 이사람들이 노동법을 전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법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법이 되도 안 될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법을 이야기하나? 차라리 그냥 혁명을 하지, 판례는 왜 분석하고 비판하며 법률개정안은 왜 만드는지.

아무튼, 이 책은 비정규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또 그러한 차원에서 나름의 대안들을 제시한다. 적어도 나는 이런 입장이 올바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욕구, 직업의 특성과 편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주장되는 "비정규직 철폐"는 오히려 '알바'와 같은 '직업'이 보유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현장의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제기되는 실태의 문제들은 이 사회의 '갑질'이라는 현상이 단지 직업의 문제,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아무리 봐도, 이 책에 나오는 사례는 물론이려니와 언론보도에서 수시로 접하는 각종 갑질의 문제는 이건 사회적 병폐이고 인성의 문제다. 함께 살아가는 공화국 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와 매너, 동지적 연대적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못하는 사회의 저열함과, 각자도생의 요구 속에 스스로를 반추하고 성찰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개인들의 문제.

불교나 기독교의 교리 혹은 칸트를 꺼내들 것도 없이,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고, 남에게 원하는 걸 내가 먼저 하는 것. 어렵게 말할 필요 없이 이것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덕(virtu)일텐데,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이 공화국 시민의 덕이라는 것이 상실되었을까? 나는 갑질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공화국 시민의 덕이 상실된 상징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덕의 상실, 즉 갑질이 가장 성행하는 곳이 노동현장이며, 그 갑질에 가장 많은 상처를 입는 노동자가 바로 '알바 노동자'들이다.

이 책은 이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을 뿐이다. 어디 이 책에 수록된 내용만일까. 갑질이라는 이 비윤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를 근절할 수 있는 건 공화국 시민의 덕성을 보편적 이성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도덕과 윤리가 힘 없는 시민들에게는 강요되지만,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등에서 보듯 힘 있는 자들은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사회에서 '알바'가 '직업'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 정책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 대안들이 새로운 건 아니고, 이미 많이 주장되어왔지만 아직은 사회적 반향이 미비하거나 이제야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그래도 이정도만이라도 어디냐 싶은데, 저자의 신념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기승전기본소득" 주장이 대안의 전체적인 완결성을 흐뜨려놓는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긴 뭐 그거 이야기하려고 쓴 책인데 그거 빼라고 하면 책 쓰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니 난감하긴 하다만.

이 책은 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의 6개 장은 현실의 상황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숱하게 듣고 보고 경험했던 일들인지라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내용들인데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듣고 봐도 무덤덤해지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계속해서 솟구치게 된다.

저자는 이 6개 장을 마무리하고난 후 마지막 7장에서 각종 대안들을 제시한다. 7장의 제목은 "다른 삶은 가능하다"이다. 그 가능한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줄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노동)안식년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그리고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다른 대안들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논의되고 주장되어왔던 이야기며, 예를 들어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목표는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노동착취가 일상화되었던 시대에서부터 노동운동의 오랜 투쟁 목표였다.

그런데 이 책은 '알바'라는 일의 형태를 '직업'으로 인정하고, 이를 노동관계법의 체계를 통해 보호할 것등을 주장하면서, 안식년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기본소득 만능론은 기본적 전제고.

우선, 여기서 주장되는 내용들 이전에 검토해야 할 것은, 사회적 생산의 주체, 분배, 재분배의 문제다. 노동시간단축과 최저임금은 분배의 문제이다. 분배정의가 담보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보전을 위한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게 된다. 즉 투잡, 쓰리잡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착취구조의 고착에 기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분배구조의 왜곡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잡, 쓰리잡을 뛸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노동예비군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본은 굳이 임금인상의 동기를 부여받을 의미가 없어진다.

최저임금은 분배정의를 강요하는 정책적 기준의 제시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의 시장개입조치인 것인데, 바로 이 성격때문에 자본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헌법이 정한 최저임금제도는 얼핏보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 조치로 보이지만, 이것은 반대로 자본의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최대조건이 되기도 한다. 달리 말해 헌법에서는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으로서 '최저임금'이라고 정해놨지만, 자본의 입장에서는 위법을 면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서 임금지급의 하한을 정해주는 것이라는 취지가 있다는 거다. 즉 이만큼만 주면 더 안 줘도 된다는 사인으로 자본은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제도의 정상화는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초보적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 제도를 정상화한다는 건 자본과 노동의 일대 격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는 "노동시간을 확연하게 줄인다면 일자리를 늘릴 여력이 생기며, 분배를 잘하면 임금삭감 없이 노동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250쪽)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것의 구체적인 방안과 정책은 정치인들과 연구자들의 몫이다"라고 한다. 아... 하긴 뭐 이 저자가 경제나 정치의 전문가가 아니니 그렇게 결론낼 수도 있겠다.

"노동시간을 확연하게 줄인다면 일자리를 늘릴 여력이" 생기는 건 맞다. 이건 그냥 산수를 하면 되고, 계산의 적실성 여부를 떠나 저자도 일부 계산을 하고 있다.(250쪽) 하지만 산수는 산수일 뿐이고, 정작 결정적 문제는 "분배를 잘하면"인데, 이건 그냥 정치인들과 연구자들이 머리 돌린다고 나오는 답이 아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비해 기본소득은 재분배의 문제다. 재분배의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분배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우선보정되어야 하는가 등이 검토될 때 명확하게 추출될 수 있다. 그 결과 중의 하나로 기본소득도 일종의 대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뭐 당연히 저자의 신념이 그러하니 나오는 결과지만, 이 책은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만사 기본소득으로 회귀된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난처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해고 당해도 기본소득을 받으며 사울 수 있다."(254쪽), "기본소득은 알바노동자들의 제2의 정체성인 백수들의 투쟁기금"(255쪽), "기본소득을 받으려는 백수들이 좀 더 투명한 과제와 불필요한 예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싸울 것이다. 좋은 학교와 대기업 취직에 목숨을 거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바뀔 것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선택하고 도전할 수 있다."(255쪽) 등등.

솔직히 그동안 기본소득 만사형통론을 하도 봐왔기에 저런 류의 예상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는 것도 식상한 일이다. 시간도 아깝고. 태초에 기본소득이 있었다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든 말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니 그러거나 말거나인데, 이게 현실 정치경제의 문제로 들어서게 되면 아주 골치아파진다. 그래서 정교분리가 필요한 건데...

저런 믿거나 말거나 류의 유토피아론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예컨대 저자의 이런 주장은 매우 심각한 범주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얼마의 임금과 교환되든, 심지어 임금으로 교환되지 않더라도 알바노동자는 사회 공동체로부터 일정한 소득을 받을 자격을 갖는다. 여기에 조건은 없다. 존재하기만 해도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백수=0원'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까?"(260쪽)

'알바노동'이 "얼마의 임금과 교환"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부터 최저임금문제를 비롯한 분배의 문제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자대립의 고전적 계급투쟁은 최전선의 격전으로 폭발한다.

그런데 "임금으로 교환되지 않더라도"라는 문제로 넘어가게 되면 일차적으로 노자대립의 계급문제는 사라지게 되고, 자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회공동체"가 들어선다. 대립의 쌍방주체가 바뀌게 되는 거고, 이렇게 되면 결국 알바노동자와 사회공동체는 알바노동자의 소득을 놓고 이해의 대립을 벌이게 되는 투쟁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저자는 이 대립구도의 전환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다.

게다가 '백수=0원'의 어떤 등식은 이게 재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성립된다고 할 수 없지만, 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이거 말고 어떤 등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백수=0원'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까?"라는 질문은 이 등식이 분배문제, 즉 임금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범주의 오류는 해결책을 소실시킨다. 사회공동체는 임금을 제공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수=0원'이 부당하다고 하려면, 이를 임금 즉 분배의 문제가 아닌 재분배의 문제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만일 이 문제를 임금의 문제, 즉 분배의 문제로 가져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어떤 사회구조의 변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분배의 문제를 말할 때 저자가 "분배를 잘하면"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저자의 범주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바로 생산수단의 주체 문제이다.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생산수단의 주체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아니 생산수단의 주체의 문제에 대해선 아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야기되는 최저임금이니 기본소득이니 하는 내용들은 모두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질서체계가 온존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 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분배와 재분배는 전형적인 사민주의체제의 복지제도 수준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이런 복지조차 제대로 향유해본 일이 없어 문제이긴 하다. 영국과 같은 전통적 복지국가들이 이미 신자유주의에 굴복해 시장복지로 전환한데 이어 북구의 복지국가들조차 이제 점차적으로 시장복지로 전환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후퇴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만.

그런데 저자를 비롯해 그가 속한 일단의 그룹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를 넘어선 뭔가를 주장하지 않았나? 더구나 무슨 사회주의 이행기적 노선으로 기본소득 운운했던 사람들이고. 그런데 어떻게 생산수단의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젠 그냥 자본가들의 잉여착취에 기반해 그거 뺏아서 기본소득 주는 수준으로 굳히기를 한 것인지.

책 전반에 대해서는 일하며 책쓰며 공부하며, 저자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결국 그동안 나왔던 수다한 기본소득론을 다시 언급하는 수준의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선 많이 아쉽다. 저자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희망을 설시한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이제 행복한 노동을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학력과 연령, 성적지향, 인종에 관계없이 다양한 일자리를 선택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안정을 원하는 사람은 정규직 일자리를 선택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9시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한다. 퇴근 뒤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생활을 즐긴다. 24시간 노동이 필요한 일자리는 4교대로 돌아간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알바노동이나 비정규직을 선택한다. 4대 보험을 받을 수 있고 충분한 소득을 보장받으며 경력도 인정받는다. 1년은 돈을 벌고 1년은 여행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은 기존 정치질서와는 다른 정당의 창당을 모색할 수도 있고, 새로운 시민운동을 만들 수도 있다.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고, 예술가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업적 예술 말고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창작활동에 도전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더 이상 대학 진학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아도 된다. 부모들은 자녀의 독립 때문에 인생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고, 노인들은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된다. 허무맹랑한 공상일까?"(261-262쪽)

나도 저런 공상을 하며 산다. 그리고 그 공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고. 하지만, 저런 "상상" 내지 "공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견지해야 할 기조는 계급적 관점의 유지와 생산수단 주체의 전환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실현될 때 저 상상은 가능하다.

그러나 저 상상은 자본주의체제가 온존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기본소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그칠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의 온존, 즉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전제된 사회에서 부여되는 기본소득의 결과는 아마도 양극화일 것인데, 한 극단에는 히키코모리들이 바글거릴 것이고 다른 한 극단에서는 투잡 쓰리잡을 찾아다니는 워킹푸어들이 득시글거릴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으로 하여금 분배에 대한 책임의식을 던져버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재분배의 책무를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걸 놓치고 있는 한, 이 책의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알바'는 '직업'이 될 수 있지만, 저자가 원하는 "'알바가 직업이 되는 나라'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뜻하는 세상"(262쪽)은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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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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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세대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꽤나 견고하다. '386세대'론에서부터 시작해 X세대, Y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 연대(年代)나 경험을 축으로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나, 혹은 '000세대', 'XXX세대" 등 어떤 기준점이 될만한 인물을 내세우는 세대론, '88만원세대'나 '3포세대, N포세대'처럼 경제적 기준을 근거로 분류한 세대론 등 이런 세대론 저런 세대론을 봐도, 난 도무지 그게 특별히 세대의 특징으로 분류될만한 어떤 근거가 실질적인 있어서 그렇게 분류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가장 황당했던 건, 빈번하게 고소고발을 남발하면서 동시에 빈번하게 피고소피고발되면서 상대방의 ATM기 노릇을 하다가 최근 실형까지 선고받은 어떤 변변찮은 자가 10여년 전쯤 내세우던 '실크(로드)세대론'이었다. 386을 극복하고 세계적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새로운 세댄가 뭔가가 그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거 관련된 조선일보 기사나 그 변변찮던 자의 글들을 읽다가 몇 번을 뿜었는지 모르겠다. "그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MB버전) 이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목적을 위해 세대 간 갈등구조를 만들려고 했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변변찮은 자 주변의 몇몇과 이걸 띄워주려했던 조선일보 같은 수구언론을 제외하고 오늘날 '실크(로드)세대론'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세대론에 대해 경계심을 잔뜩 돋우는 이유는 그 세대론이 지향하는 방향성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세대가 실존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그러한 세대를 호명하면서 일군의 집단으로 묶어 세우려는 것에는 반드시 납득할 수 없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모든 세대론은 그러한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줬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역시, 실질적으로 이 사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88만원 세대'로 분류될 사람들이 아니라 '88원 계급'의 문제였다. 이것을 세대론으로 치환하면서 정작 계급의 문제는 희석되고 계급적 연대의 주체가 되어야 할 앞세대와 뒷세대는 세대의 벽을 두고 대립하는 자뻑에 빠지게 된다. 하물며 '88원 세대'가 이 수준일진데 다른 세대론은 더 말할 의미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 '90년생이 온다'는 책에 대해서도 일단 삐딱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삐딱한 시점은 책을 다 본 이후에도 교정되지 않았다. 이 책 역시 앞서의 세대론과 다름 없이 90년 이후 출생자들의 특징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지만 그게 어째 세대의 문제인가? 또는 그 연령대 세대만의 특징인가? 더욱이 이 책이 은근하게 전제하는 '꼰대' 세대와 90년 이후 출생자 세대의 갈등구도는 기존 세대론이 가지고 있는 갈등구조의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는 현상은 90년 이후 출생자들만의 전형적인 모습인가? 아니면 이제 생물학적인 연령대가 90년대 이전 세대가 공무원 시험을 보기엔 너무 연식이 되었기에 자연도태되었기 때문인가? 혹은 그나마 집이든 어디든 자본을 댈 여력이라도 있거나 정말 본인이 쌔가 빠지게 돈 벌어가면서 아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90년대 이전 생들은 뭔가? 온라인에서 보이는 말줄임이나 은어는 확장의 가능성, 즉 온라인에 접속하기 쉬운 사람들의 범주가 누구냐에 따라 주 사용층이 달라질 수 있는 건데, 이것이 90년 이후 출생자들의 특징일까?


본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보여주기식으로 회사생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지적과 함께 인용된 어떤 사람의 말이다.


"주어진 업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과 시간엔 담배 피우고 서로 수다 떨고 놀다가,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저녁을 먹고 시작하더라고요."(173쪽)


저자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구태의연한 회사의 행태에 신물난 90년 이후 생들 중 상당수가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위 인용문에 나오는 행태를 가장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집단이 공무원들이다. 이러저러한 경로로 들여다본 구청 단위 공공기관의 매우 많은 공무원들의 근태는 저 인용문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근무시간에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가 퇴근시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몇 시간 있다 나타나 연장근무를 달고 나가거나, 도대체 뭘 하는지 어딜 갔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데 빈번하게 출장을 달거나 뭐 이런 행태들 만연해 있다.


구태의연하고 '꼰대'들이 판치는 민간회사를 떠나 어려운 시험을 거쳐 공무원이 되는 90년 이후 출생자들은 저러한 공무원 사회의 말도 안 되는 근태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이 일반화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내 경험상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새로 공무원이 된 사람들은 저 근태에 아주 잘 적응한다. 아니 마치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자기 삶의 일부분이 된다. 이건 세대차이인가, 아닌가?


이처럼 생산자의 입장이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소비자의 입장에 서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책이 거론하고 있는 새로운 소비트랜드나 소비자의 태도는 90년 이후 출생자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나타는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120 다산콜센터의 성장과 활약은 90년 이후 출생자들의 새로운 소비트랜드로 인하여 구축된 것인가?(250-255쪽) 


VOC(voice of customer)가 90년 이후 출생자들이 소비주체로 등장한 이후 기존 체제가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기업과 소비자가 교신하는 형태의 소통이 이루어졌지만, 이제 90년 이후 출생자들은 회사와의 공식적 채널을 선호하지 않고 자신의 SNS에 올리거나 커뮤니티에 올리는 등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임에 따라 기업이 회사 전체 차원의 혁신을 해야만 했다는 거다(312쪽). 그런데 이게 과연 90년 이후 출생자들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지난 20년 간 급속도로 발전한 온라인 시스템의 결과물인가?


물론 어떤 경향이라는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이든 상품시장이든 시장에서의 경향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그것이 소위 '90년생'이라는 세대의 출현으로 인하여 파생한 문제이며 따라서 그 세대를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경향은 기술발전이 조성한 환경과 이 환경을 이용하는 사용자들의 이해관계가 어떤 방향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거기엔 90년 이후 출생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드디어 유튜브의 가치를 뼈저리게 확인하고 온갖 가짜뉴스(fake news)를 유튜브로 습득하고 SNS로 실어 나르는 70-80대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며, 그리고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무수한 세대론이 등장하겠지만, 정말로 인정할만한 근거가 제출되지 않는 한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세대론에 대한 색안경을 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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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염 사회 -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홍경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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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더워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실감한 건 1994년이었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할 정도인데, 추우면 뼈골이 시리다는 걸 알게 된 후엔 둘 다 싫어졌지만, 그래도 더워서 기절하는 저질체력은 아니었더랬다. 1994년 여름은 한창 팔팔할 때였는데도 힘겨웠다. 실연당한 동생놈 하나가 술과 함께 더위를 처먹는 통에 기절하면서 혼을 뺀 후,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이 더위 먹고 실신 직전까지 간 후 더위의 무서움을 체감했더랬다.


올 2018년 여름은 그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맞은 더위라서 더 혹독했는지 모르겠으나, 1994년 여름보다 더 더운 여름은 내 생에 없을 거라던 예상은 헛된 것이 되어버렸다. 옆을 지켜줬던 짝지가 없었더라면 아마 올 여름 이후 책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줄을 놓기 직전, 관찰하고 있던 짝지가 혹서탈출을 감행해주었기에 이후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에 손에 잡힌 책이 '폭염사회'였다. 더위에 기진맥진해져 있던 때에 이 책도 짝지가 사다 주었다. 제목이 바로 피부에 와닿는지라 순식간에 들쳐보게 되었다.


최근 들어 '~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이 얼마나 많이 출간되었던가? 번역본도 그렇고 국내 저작들도 그렇고, 무슨 유행처럼 '~사회'라는 책들이 나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양하게 사회를 정의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더욱 놀라운 건 어떤 형태로 이 사회를 분석하든 간에 결론은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개인에게 발생한 모든 문제는 죄다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마거릿 대처가 '사회는 없다'고 했다지만(물론 이 말은 따로 곱씹을 앞뒤 문장의 함의가 있다. 그냥 잡지 인터뷰 카피로 나왔던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대처의 발상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긴 어렵다. 이 부분은 또 기회 있을 때), 실제로 모든 현상은 사회라는 시공간 안에서 수다한 관계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폭염사회' 역시 이런 측면에서 도식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결론을 유발한 원인이 폭염이었던 것이다. '폭염사회'는 2장 "인종, 장소, 취약성: 도시의 이웃과 지원의 생태학"과 3장 "재난의 상태: 권력 이양기 도시의 복지"에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시카고를 덮친 폭염으로 인해 발생한 그 많은 죽음들은 오로지 폭염 그 하나의 원인으로 사망의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관계망'의 존부를 통해 밝힌다. 즉,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관계들이 어떻게 편향되느냐에 따라 폭염이라는 재앙이 닥칠 때에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갈림길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1995년 폭염으로 인해 시카고에서 발생한 사망은 경향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관계망이 파괴되어 있는 상태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이전의 사례와 비교할 때, 공동체는 사망자들이 기댈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해졌으며, 사회안전망은 취약해졌다. 하다못해 과거에는 더우면 집 밖에서 잠으로써 더위를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집 밖에 두려워 집 안에서 쪄죽는 걸 감수해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에릭 클라이넨이 거듭 소개하고 있는 사회적 부검은 바로 이러한 죽음들이 관계의 해체로 인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미국에만 국한된 것일까? 기실 양극화가 심화되는 모든 사회는 이 책이 고발하는 취약함을 가지고 있다. 아니 양극화의 심화와 비례하여 이러한 취약함 역시 심화된다. 초자본과 고위권력이 구성한 이너서클의 강고한 유대 속에서 폭염에 의한 사망은 기이한 일이 되겠지만, 그 외의 배제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린다.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사회적차원의 관계망 재구성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아주 간명하지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주 강렬하게 드러낸다. 에필로그의 제목 자체가 "마지막은 함께"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공동체의 태도가 죽은 사람의 존엄을 최후까지 지켜줄 수 있는 정도의 관계 형성을 은유하는 것이다. 무연고자 시신을 처리하던 장례 노동자의 말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그런 의도겠다. 그리고 그 장례 노동자의 말은 책을 덮기 어렵게 만들 정도로 많은 여운을 남겨 주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우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404쪽)


내 곁에 누군가가 있고,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된 2018년 여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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