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박정훈 지음 / 빨간소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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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있고, 이래 저래 조금은 기본정보를 알고 있는지라, 이 사람이라면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예측의 범위 안에서 책의 내용은 전개된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 알바노동자의 현재와 미래
박정훈
빨간소금, 2019

내용의 전개에 대해 충분히 예상했고, 그 내용들에 대해서는 정책적으로도 갑론을박들을 해왔던 당사자이기도 해서 내용 자체로부터 새롭게 어떤 자극을 받은 건 없다. 하지만, 최근 노동문제에 대해 매우 센 이야기를 하는 어떤 이들이 책을 읽는 내내 겹쳐지면서, 그리고 최종장에서 결국 기승전기본소득으로 이어지는 식상한 결론에 당하면서, 몇 가지 고민거리가 나오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시종일관 '알바'라는 어떤 일의 형태가 '직업'으로 인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당연하다. 이미 무슨 일을 하느냐를 떠나 '비정규직'이라는 일의 형태가 '직업'처럼 이해되고 있는 마당에, 어쩌면 가장 대표적 '비정규직'이라고 할 '알바'가 직업이 아니라면 뭔가라는 항변은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그런데, 이 '알바'도 '직업'이다라는 주장은 노동문제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이면의 대립을 환기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하나는 "비정규직 철폐"를 당면과제로 설정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비정규직 차별철폐"라는 구호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과제의 중요성을 희석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의 입장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일의 유연성은 사회적 산물이기는 하나 그에 따른 개인적 선택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관점에서 이 입장은 출발한다. 결국 이 입장은 비정규직 직종의 확산과 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일률적으로 비정규직 철폐를 통해 해소할 수는 없으므로,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중요한 투쟁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입장의 주장이다.

나는 회색분자인지라, 이 두 입장이 대립하고 충돌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순위를 정하라면, 나는 차별철폐가 우선 중요하고, 그러면서 비정규직 확산의 추세는 멈춰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 현실에서 차별의 문제가 비정규vs정규의 틀로 고착화되다보니 비정규직철폐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실 노동현장에서의 차별은 비정규vs정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차별은 결국 자본이 조성하는 노노대립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고, 이와 관련해 비정규직을 정규직도 아니고 '정규직화'하는 미봉책을 마치 비정규직 철폐인 듯 오인하는 현상을 없애려면 차라리 비정규직 차별을 획기적으로 철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다보면, "비정규직 철폐"가 우선과제라는 입장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생각이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그 활동가들은 여전히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약 1년 전쯤의 한 토론회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어던 발제에 지정토론자로 토론을 했는데, 바로 그때 핵심적인 논란거리가 "비정규직 철폐냐, 비정규직 차별 철폐냐"였고, 그 자리에서 나는 그 활동가들로부터 조금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법학이라는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다보니 "비정규직 철폐"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노동법학자 또는 노동사회학자들과 많이 접촉하게 된다. 내가 종잡을 수 없는 건, 이들은 주로 노동법을 하면서 노동법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기실 노동관계법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한다고 한들 비정규직의 증가추세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무시한 채 비정규직 철폐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럴깝사 난 왜 이사람들이 노동법을 전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법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법이 되도 안 될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법을 이야기하나? 차라리 그냥 혁명을 하지, 판례는 왜 분석하고 비판하며 법률개정안은 왜 만드는지.

아무튼, 이 책은 비정규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또 그러한 차원에서 나름의 대안들을 제시한다. 적어도 나는 이런 입장이 올바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욕구, 직업의 특성과 편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주장되는 "비정규직 철폐"는 오히려 '알바'와 같은 '직업'이 보유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현장의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제기되는 실태의 문제들은 이 사회의 '갑질'이라는 현상이 단지 직업의 문제,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아무리 봐도, 이 책에 나오는 사례는 물론이려니와 언론보도에서 수시로 접하는 각종 갑질의 문제는 이건 사회적 병폐이고 인성의 문제다. 함께 살아가는 공화국 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와 매너, 동지적 연대적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못하는 사회의 저열함과, 각자도생의 요구 속에 스스로를 반추하고 성찰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개인들의 문제.

불교나 기독교의 교리 혹은 칸트를 꺼내들 것도 없이,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고, 남에게 원하는 걸 내가 먼저 하는 것. 어렵게 말할 필요 없이 이것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덕(virtu)일텐데,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이 공화국 시민의 덕이라는 것이 상실되었을까? 나는 갑질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공화국 시민의 덕이 상실된 상징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덕의 상실, 즉 갑질이 가장 성행하는 곳이 노동현장이며, 그 갑질에 가장 많은 상처를 입는 노동자가 바로 '알바 노동자'들이다.

이 책은 이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을 뿐이다. 어디 이 책에 수록된 내용만일까. 갑질이라는 이 비윤리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를 근절할 수 있는 건 공화국 시민의 덕성을 보편적 이성으로 자리잡게 만드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도덕과 윤리가 힘 없는 시민들에게는 강요되지만,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등에서 보듯 힘 있는 자들은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사회에서 '알바'가 '직업'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 정책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 대안들이 새로운 건 아니고, 이미 많이 주장되어왔지만 아직은 사회적 반향이 미비하거나 이제야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그래도 이정도만이라도 어디냐 싶은데, 저자의 신념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기승전기본소득" 주장이 대안의 전체적인 완결성을 흐뜨려놓는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긴 뭐 그거 이야기하려고 쓴 책인데 그거 빼라고 하면 책 쓰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니 난감하긴 하다만.

이 책은 7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앞의 6개 장은 현실의 상황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숱하게 듣고 보고 경험했던 일들인지라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내용들인데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리 듣고 봐도 무덤덤해지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계속해서 솟구치게 된다.

저자는 이 6개 장을 마무리하고난 후 마지막 7장에서 각종 대안들을 제시한다. 7장의 제목은 "다른 삶은 가능하다"이다. 그 가능한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줄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노동)안식년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그리고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다른 대안들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논의되고 주장되어왔던 이야기며, 예를 들어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목표는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노동착취가 일상화되었던 시대에서부터 노동운동의 오랜 투쟁 목표였다.

그런데 이 책은 '알바'라는 일의 형태를 '직업'으로 인정하고, 이를 노동관계법의 체계를 통해 보호할 것등을 주장하면서, 안식년제,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 기본소득 만능론은 기본적 전제고.

우선, 여기서 주장되는 내용들 이전에 검토해야 할 것은, 사회적 생산의 주체, 분배, 재분배의 문제다. 노동시간단축과 최저임금은 분배의 문제이다. 분배정의가 담보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보전을 위한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게 된다. 즉 투잡, 쓰리잡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착취구조의 고착에 기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분배구조의 왜곡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잡, 쓰리잡을 뛸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노동예비군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본은 굳이 임금인상의 동기를 부여받을 의미가 없어진다.

최저임금은 분배정의를 강요하는 정책적 기준의 제시이다. 가장 강력한 정부의 시장개입조치인 것인데, 바로 이 성격때문에 자본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헌법이 정한 최저임금제도는 얼핏보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 조치로 보이지만, 이것은 반대로 자본의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최대조건이 되기도 한다. 달리 말해 헌법에서는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으로서 '최저임금'이라고 정해놨지만, 자본의 입장에서는 위법을 면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서 임금지급의 하한을 정해주는 것이라는 취지가 있다는 거다. 즉 이만큼만 주면 더 안 줘도 된다는 사인으로 자본은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제도의 정상화는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초보적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 제도를 정상화한다는 건 자본과 노동의 일대 격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는 "노동시간을 확연하게 줄인다면 일자리를 늘릴 여력이 생기며, 분배를 잘하면 임금삭감 없이 노동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250쪽)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것의 구체적인 방안과 정책은 정치인들과 연구자들의 몫이다"라고 한다. 아... 하긴 뭐 이 저자가 경제나 정치의 전문가가 아니니 그렇게 결론낼 수도 있겠다.

"노동시간을 확연하게 줄인다면 일자리를 늘릴 여력이" 생기는 건 맞다. 이건 그냥 산수를 하면 되고, 계산의 적실성 여부를 떠나 저자도 일부 계산을 하고 있다.(250쪽) 하지만 산수는 산수일 뿐이고, 정작 결정적 문제는 "분배를 잘하면"인데, 이건 그냥 정치인들과 연구자들이 머리 돌린다고 나오는 답이 아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비해 기본소득은 재분배의 문제다. 재분배의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분배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우선보정되어야 하는가 등이 검토될 때 명확하게 추출될 수 있다. 그 결과 중의 하나로 기본소득도 일종의 대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뭐 당연히 저자의 신념이 그러하니 나오는 결과지만, 이 책은 기본소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만사 기본소득으로 회귀된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난처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해고 당해도 기본소득을 받으며 사울 수 있다."(254쪽), "기본소득은 알바노동자들의 제2의 정체성인 백수들의 투쟁기금"(255쪽), "기본소득을 받으려는 백수들이 좀 더 투명한 과제와 불필요한 예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싸울 것이다. 좋은 학교와 대기업 취직에 목숨을 거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바뀔 것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선택하고 도전할 수 있다."(255쪽) 등등.

솔직히 그동안 기본소득 만사형통론을 하도 봐왔기에 저런 류의 예상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는 것도 식상한 일이다. 시간도 아깝고. 태초에 기본소득이 있었다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든 말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니 그러거나 말거나인데, 이게 현실 정치경제의 문제로 들어서게 되면 아주 골치아파진다. 그래서 정교분리가 필요한 건데...

저런 믿거나 말거나 류의 유토피아론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예컨대 저자의 이런 주장은 매우 심각한 범주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얼마의 임금과 교환되든, 심지어 임금으로 교환되지 않더라도 알바노동자는 사회 공동체로부터 일정한 소득을 받을 자격을 갖는다. 여기에 조건은 없다. 존재하기만 해도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백수=0원'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까?"(260쪽)

'알바노동'이 "얼마의 임금과 교환"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여기서부터 최저임금문제를 비롯한 분배의 문제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자대립의 고전적 계급투쟁은 최전선의 격전으로 폭발한다.

그런데 "임금으로 교환되지 않더라도"라는 문제로 넘어가게 되면 일차적으로 노자대립의 계급문제는 사라지게 되고, 자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회공동체"가 들어선다. 대립의 쌍방주체가 바뀌게 되는 거고, 이렇게 되면 결국 알바노동자와 사회공동체는 알바노동자의 소득을 놓고 이해의 대립을 벌이게 되는 투쟁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저자는 이 대립구도의 전환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다.

게다가 '백수=0원'의 어떤 등식은 이게 재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성립된다고 할 수 없지만, 분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이거 말고 어떤 등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백수=0원'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까?"라는 질문은 이 등식이 분배문제, 즉 임금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범주의 오류는 해결책을 소실시킨다. 사회공동체는 임금을 제공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수=0원'이 부당하다고 하려면, 이를 임금 즉 분배의 문제가 아닌 재분배의 문제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만일 이 문제를 임금의 문제, 즉 분배의 문제로 가져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어떤 사회구조의 변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분배의 문제를 말할 때 저자가 "분배를 잘하면"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저자의 범주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바로 생산수단의 주체 문제이다.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생산수단의 주체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아니 생산수단의 주체의 문제에 대해선 아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야기되는 최저임금이니 기본소득이니 하는 내용들은 모두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질서체계가 온존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 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분배와 재분배는 전형적인 사민주의체제의 복지제도 수준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이런 복지조차 제대로 향유해본 일이 없어 문제이긴 하다. 영국과 같은 전통적 복지국가들이 이미 신자유주의에 굴복해 시장복지로 전환한데 이어 북구의 복지국가들조차 이제 점차적으로 시장복지로 전환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후퇴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만.

그런데 저자를 비롯해 그가 속한 일단의 그룹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를 넘어선 뭔가를 주장하지 않았나? 더구나 무슨 사회주의 이행기적 노선으로 기본소득 운운했던 사람들이고. 그런데 어떻게 생산수단의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젠 그냥 자본가들의 잉여착취에 기반해 그거 뺏아서 기본소득 주는 수준으로 굳히기를 한 것인지.

책 전반에 대해서는 일하며 책쓰며 공부하며, 저자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결국 그동안 나왔던 수다한 기본소득론을 다시 언급하는 수준의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선 많이 아쉽다. 저자는 말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희망을 설시한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이제 행복한 노동을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학력과 연령, 성적지향, 인종에 관계없이 다양한 일자리를 선택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안정을 원하는 사람은 정규직 일자리를 선택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9시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한다. 퇴근 뒤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생활을 즐긴다. 24시간 노동이 필요한 일자리는 4교대로 돌아간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알바노동이나 비정규직을 선택한다. 4대 보험을 받을 수 있고 충분한 소득을 보장받으며 경력도 인정받는다. 1년은 돈을 벌고 1년은 여행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은 기존 정치질서와는 다른 정당의 창당을 모색할 수도 있고, 새로운 시민운동을 만들 수도 있다.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고, 예술가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업적 예술 말고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창작활동에 도전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더 이상 대학 진학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아도 된다. 부모들은 자녀의 독립 때문에 인생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고, 노인들은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된다. 허무맹랑한 공상일까?"(261-262쪽)

나도 저런 공상을 하며 산다. 그리고 그 공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고. 하지만, 저런 "상상" 내지 "공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견지해야 할 기조는 계급적 관점의 유지와 생산수단 주체의 전환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실현될 때 저 상상은 가능하다.

그러나 저 상상은 자본주의체제가 온존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기본소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그칠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의 온존, 즉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전제된 사회에서 부여되는 기본소득의 결과는 아마도 양극화일 것인데, 한 극단에는 히키코모리들이 바글거릴 것이고 다른 한 극단에서는 투잡 쓰리잡을 찾아다니는 워킹푸어들이 득시글거릴 것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으로 하여금 분배에 대한 책임의식을 던져버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재분배의 책무를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걸 놓치고 있는 한, 이 책의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알바'는 '직업'이 될 수 있지만, 저자가 원하는 "'알바가 직업이 되는 나라'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뜻하는 세상"(262쪽)은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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