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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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때문에 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는 비극이 계속 벌어진다. 사회안전망과 복지정책이 미흡할 때 가족은 존재의 최후 보루가 된다.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인간다운 삶의 최소 조건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개인과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되묻게 된다. 경쟁주의나 학벌주의의 폐해를 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 삶의 제도적 울타리로서의 국가가 ‘나’와 가족의 삶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불신 때문이다. 불신에서 공포와 두려움의 정념이 탄생하고 전염병처럼 퍼진다. 끔찍한 입시경쟁은 자식의 불안한 미래와 연동된 부모들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을 애써 가리려는 안간힘의 결과다.

좋은 영화와 문학은 가족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새롭게 궁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한 예다. 병원에서 자신들의 아이가 뒤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부모, 특히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영화는 천착한다. 영화는 ‘기른 정, 낳은 정’ 같은 안이한 이분법을 벗어난다. 부모-자식 관계는 ‘피’나 ‘사랑’이라는 상투어로 규정될 수 없다. 부모의 시각이 규정하는 ‘사랑’과 ‘보살핌’의 그럴싸한 말들이 아이에게는 다른 뜻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거리다. 가족은 ‘탄생’하는 게 아니라 끝없는 이해와 배려의 노력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그 구성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영화가 던지는 생각거리다.

김숨 소설집 <국수>와 장편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가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사랑과 보살핌의 이면을 드러낸다. 특정 가족구성원의 시점을 택해 그 시점이 부딪치는 편견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작가는 한 캐릭터의 시점과 의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가족 캐릭터들은 주변화시키는 서술 전략을 취한다. 거의 전적으로 며느리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여인들>의 경우에도 여러 인물의 관계를 폭넓게 다루는 장편소설의 일반적인 구성형식과는 달리 며느리 ‘그녀’의 시점에서만 작품이 전개된다. 애증의 대상인 시어머니와 남편의 관점은 배제된다. 그들의 생각은 단편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짐작될 뿐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생각을 짐작하려 애쓰지만 분명하게 잡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주변의 여러 일들이 잘못될 때마다 심한 구강건조증으로 힘들어하는 시어머니 때문이라고 원망의 마음을 품지만, 그 원망에는 시어머니의 병이 자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내밀한 죄의식이 얽혀 있다. 한 여성 캐릭터의 분열증적 의식을 이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다.

소설집 <국수>의 단편들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 가족 간의 거리를 냉정하게 확인한다. <여인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 거리를 확인하는 단편인 ‘막차’,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그 밤의 경숙’처럼 냉정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도 좋다. ‘막차’는 <여인들>의 서술시점을 뒤집어 시어머니의 시각에서 암투병 중인 며느리를 대하는 분열적 의식을 보여준다. 특히 표제작 ‘국수’에 눈길이 간다. “육십억에 달하는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는 이 지구상에 어디에도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준 존재가 없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가? 이 쉽지 않은 물음의 의미를 두 여자의 삶을 통해 그리는 솜씨가 돋보인다. 이야기의 구성이나 서술방식이 아주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자신을 키워준 의붓어머니를 대하는 딸의 착잡한 심경 밑에 흐르는 연민의 정서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뻔한 감상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은 게 미덕이다.

불안과 두려움의 산물인 가족주의의 이면을 끈기 있게 분석하는 작가를 만나서 반갑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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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에 대하여 - 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 현대의 문학 이론 41
장 뤽 낭시 외 지음, 김예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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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의 흐름을 만든 저작 중에 지은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교본인 <숭고에 대하여>도 그런 저작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처음 발견됐을 때 필사본 표지에 쓰인 이름을 따 롱기노스 저작으로 불린다. 오래 망각의 늪에 빠졌던 이 얇은 책은 16세기에 세상에 나와 근대 미학 사상의 원천이 됐다. 뒷날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를 파고들어가 이 주제의 미학적 표준을 세웠다. 압도적으로 큰 것 앞에서 느끼는 전율 어린 감동이 숭고다.

롱기노스의 저작이 쓰인 시기는 서기 1세기쯤으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가 이 책 마지막 장에 있다. 거기서 롱기노스는 자기 시대를 숭고한 정신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말의 궁핍”이 삶을 덮친 시대라고 단정한다. 이 옛 문헌은 말이 깊이를 잃어버리고 가난해진 원인을 민주주의의 죽음과 언론자유의 소멸에서 찾는다. 위대한 작가를 키우는 건 민주주의라는 유모인데, 그 유모가 죽어버리자 위인들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연설가의 능력은 자유로운 경쟁과 마찰로 불붙어 타오르는 것인데 그 말의 자유가 사라지고 만 것이 궁핍한 시대를 불렀다고 진단한다. 바로 이 구절들이 이 책의 저술연대를 1세기 무렵으로 보는 근거 구실을 한다. 자유와 민주의 상실을 애달파하려면 상실 이전 세상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야 하는데, 그 시기가 바로 1세기, 로마 공화정이 망하고 황제정이 열린 직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롱기노스 저작은 겉은 수사학을 가르치는 책이지만 안으로 말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불꽃을 품은 책이다.

롱기노스 저작은 숭고야말로 말과 글의 높이를 재는 척도라고 말한다. “위대한 시인·작가는 숭고를 통해 제일인자가 되었고 영원한 명성을 얻었다.” 숭고한 말과 글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플라톤의 산문,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이 그렇게 혼을 흔든다. 이 숭고를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는가. 수사학적 기교는 연습하면 익힐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교는 겉옷일 뿐이다. 말의 생명인 숭고는 ‘큰 정신’(메갈로프시키아)에서만 나온다. 정신의 크기가 언어의 숭고를 결정하는 것이다. 롱기노스는 숭고함을 해치는 수사의 사례도 열거하는데, 부적절한 과장, 절제 없는 감정 표출, 그리고 때에 맞지 않는 저속한 표현은 좋은 말과 글의 적이다.

롱기노스의 글을 읽으면서 대통령의 말을 떠올린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가운데 단연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이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새해 기자회견 발언이다. 이 말이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았음인지 얼마 전 청와대는 ‘대박’의 영어 번역어로 ‘보난자’(bonanza)와 ‘잭팟’(jackpot)을 내놓았다. 보난자는 노다지라는 뜻이며 잭팟은 카지노 용어다. 한반도 통일은 정말 대박이고 노다지며 잭팟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이란 말은 대통령의 공식 언어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투기판 말로는 통일의 뜻을 아우를 수 없다. 통일은 한반도 북쪽을 약탈하여 먹어치우자는 것이 아니다.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반민주적 억압질서와 기득권구조를 해체하고 남과 북을 인간다운 곳으로 바꾸어 하나로 만나게 하는 것이 통일이다. 남북 양쪽의 변화와 혁신이 통일의 본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발언 어디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투기언어는 통일의 큰 뜻을 잊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돈의 상상력에 가둔다. 거짓과 조작으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민주주의 제도를 망가뜨리는 작금의 국가범죄행위를 그대로 두고 외치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반(反)통일이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통일 노력을 명한 것은 남북이 함께할 민주주의의 큰 집을 지으라는 것이지 국가의 범죄 위에 눌러앉아 노다지를 부르라는 것이 아니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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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2015-04-07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평점을 2개 밖에 안준 이유는 없군요. 남의 글을 단지 전재해놓고서는...
 
간디 자서전 - 나의 진실 추구 이야기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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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마하트마 간디와 넬슨 만델라 그 두 사람을 각각 ‘위대한 혼’과 ‘위대한 사람’이라고 존칭하면서 인종이나 정치이념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가 두 거인에게 쏟는 사랑과 신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두 지도자의 숭고함은 진실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용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간디는 아예 “진리가 곧 하느님이다”라고 굳게 믿었고, 만델라는 “진실을 고해하면 보복하지 않는다”고 자기를 박해하던 정적들에게 약속했다. 두 지도자의 공통적인 신념은 참 곧 진실만이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자유롭고 화평하게 한다고 믿었다.

특히 간디는 ‘진실과 용기’를 개인의 진리파지(眞理把持)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간디는 참만이 모든 도덕의 실체이며 또한 정치의 바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간디를 존경했던 타고르가 ‘마하트마’라는 존칭을 붙이자고 제의하여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는데, 그 존칭이 사실은 두 가지 큰 부작용을 일으켰다. 첫째, 간디 자신에게 명예로운 기분은커녕 도리어 항상 ‘깊은 고통’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실토한다. 둘째, 사실 간디란 인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진리실험’을 자신과 사회공동체 삶 속에서 실천해 가면서 위대한 인간으로 변화되고 완성되어간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첨부터 특별한 인물 되도록 타고났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한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 이야기’라고 부제를 붙였다. 그의 자서전 속에 다음 같은 고백적 이야기가 나온다. 간디가 십대 소년기 초반일 때였다. 겁 많고 내성적이었던 소년 간디도 보통 아이들이 일탈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처럼, 사춘기로 넘어오면서 성장을 위한 이런저런 유혹에 빠진다. 부모 몰래 담배를 피우고, 담뱃값을 마련하기 위해 나이 많은 집안 하인의 주머니에서 치사하게 동전을 훔치고, 친구 꼬임에 끌려들어가 채식주의 서약을 어기고 부모님 모르게 육식을 1년 가까이 했다. 결혼 초기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할 시간에 간디는 아내와의 잠자리에 탐닉했다고 고백한다.

간디의 자서전 속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 곧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의 보통사람 성장과정 같은 고백적 이야기를 듣고 나면, 간디가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직후 아인슈타인이 안타깝게 토로한 다음 같은 말을 얼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탄식은 뉴델리 간디기념관 입구 벽면에 쓰여 있다: “미래의 세대들은, 일찍이 실제 산 사람으로서 (간디 같은 사람이) 이 지구 위 세상을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20세기 최고 과학자의 추모사였다.

간디의 위대한 가능성은 15살 되던 해, 형님 주머니에서 금화 몇개를 훔친 일련의 사건에서부터 나타난다. 또래 아이들과 얽혀서 금지된 못된 일을 지속하기 위한 자금 조달 때문이었다. 그 도둑질이 너무 양심에 가책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아버지 앞에, 떨리는 심정으로 글로써 적어 바치는 도둑질 고백문 제출 사건에서 ‘위대한 혼’은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한 소년 간디의 영혼은 자기를 착한 아들로 믿고 있는 부모를 속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덮고 넘어갈 수 없었다. 모든 꾸지람과 벌책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자백하기로 맘먹었다. 성장하면서 한번도 부모에게서 체벌 당한 경험은 없지만, 소년 간디가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일은 자기를 믿던 아버지가 낙심하여 맘의 상처와 심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범죄를 계속 숨기고 지낼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의 양심 가책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상에 누워 있던 간디의 아버지는 평소 착하던 아들이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도둑질 참회문’을 받아들고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찬찬히 읽어내려 갔다. 종이에는 아들이 금화를 도둑질했다는 사실, 죗값을 어떤 벌로써든지 달게 받겠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도둑질 같은 짓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망 드린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행여나 자책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시 일그러진 아버지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그 눈물은 소년 간디가 내민 죄책 고백문 종이 위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소년 간디도 흐느껴 울었다. 아무 말도 없이 간디의 아버지는 아들이 내밀었던 죄책 고백문 종이를 죽죽 찢어버리고 침상에 다시 아픈 몸을 뉘었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기를 그 당시엔 아버지의 눈물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눈물’인 줄만 알았지만, 훗날 깨달은 것은 아버지의 눈물은 모든 것을 품고 감내하고 변화시키는 깊고 신비한 ‘참의 힘, 아힘사’였다고 고백한다. 간디 아버지의 눈물을 실험실에서 화학성분 분석 방법을 가지고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들 인생 경험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감정이 간디 아버지로 하여금 말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러내리게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첫째, 순간적으로 오는 감정은 믿었던 아들이 저질러 놓은 실망스런 도둑질에 좌절, 분노, 일말의 배신감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부정(父情)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갈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런 감정은 순간이요, 간디 아버지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둘째 이유인즉 착했던 아들이 도둑질하고 그동안 양심 가책을 받으면서 얼마나 맘고생이 컸을까를 생각하는 부모로서의 안쓰러운 맘 때문이었다.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에 합격하지 못해서 맘으로 괴로워하는 자녀를 보는 부모는, 자녀가 입시와 취직에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실패로 인해 마음앓이 하는 자녀가 안쓰러워, 마음 고통이 배나 더 큰 것이다. 간디 아버지의 눈물 속에는 셋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죄고백이라는 고통의 시련을 이겨내고, 양심의 자유와 인격의 자존심을 되찾은 아들의 영혼이 가진 용기와 진실을 향한 결단이 한없이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고백의 용기와 행동하는 양심’이며, 비폭력적 자기희생의 내공, 곧 ‘아힘사’가 요청된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인간화된 사회가 온다. 그때라야만 갈기갈기 찢겨진 민심 분열은 치유되고 민족 영혼의 상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인간다움의 본질은 날카로운 어금니와 강한 발톱에 있지 않고 진실에의 용기와 연민의 마음에 있다. 한민족은 지금 ‘진실의 법정’이라는 역사시험대 앞에 있다.

칼 포퍼는 진리에 가까운 이론이나 체제를 사이비 그것들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 ‘반증가능성’을 내세웠다.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 과학, 정치이념, 광신적 종교는 가장 무서운 개방사회의 적이며, 시민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독재자들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철도노조 파업 중 우리가 가장 슬퍼해야 할 사실은, 노조 간부 체포자에게는 일계급 특진 포상을 한다는 공권력의 반인륜적 모독 행위였다. 노조 간부는 사람이지 사냥감이 아니지 않은가?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집단적 의사표현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집회의 자유라는 법타령을 제쳐놓고 말하더라도, 솔직히 말해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이기적 사회집단 간의 조직적 힘의 균형과 상호견제라는 정치행동이지 왕조시대 임금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몰아세우는 야만적 행위와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오류의 가능성, 반증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용기 없음과 진실 외면이 진리를 살해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평안치 못하게 한다. 종교와 정치에서 교조주의와 선민의식은 독선과 광기 면에서 서로 너무나 닮았다. 특히 정권을 잡은 권력집단과 교권을 잡은 종교집단이 그러한 유혹의 덫에 걸리기 쉽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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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체 -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 제국 3부작 3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정남영 외 옮김 / 사월의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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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전투 / 문강형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네그리와 하트가 쓴 <공통체>라는 책이 최근 번역되어 나왔다. 책은 영미권에서 2009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 처음부터 끝까지 흥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같은 저자들의 화제작인 <제국> <다중>에 이은 3부작의 마지막 권이다. <제국>이 공장 중심의 산업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삶 자체를 포섭하는 자본주의로 형질변환되는 과정을제국이라는 지배체제의 등장으로 설명하고, <다중>이 이러한 체제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 이를 정치적 힘으로 주체화하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출현을 예상한다면, <공통체>는 이러한 투쟁 과정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설정한다. 그 목표란 우리의 삶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려는 힘에 맞서 이를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으로 지켜내려는 노력이다. 책의 원제인코먼웰스’(commonwealth)는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을 뜻한다.

삶을 통해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생산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몸을 써서 노동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표출한다. 이 모든 생산은 나 혼자 할 수 없다. 내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나를 타인과 연결해주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만 나는 뭔가를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생산된 내 삶의 산물은 타인과의 교통 속에서만 다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과정 전체가 바로공통적인 것이다. 사회는 이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거점이며, 사회가 자유롭고 열려 있을 때 공통적인 것은 풍부해진다. 문제는 자본과 국가 같은 거대 체제가 언제나 이 공통적인 것을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려 한다는 데 있다. 공통적인 것을 지키려는 힘과 사유화하려는 힘이 맞붙는 전투.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의 사회는 이 전투가 일어나는 전쟁터다.

우리의 몸(얼굴, 체형, 언어, 노동)에서부터 공공적 수단(교통, 에너지, 지식)에 이르기까지 이 전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가장 심한 격전지 중 하나는 대학일 것이다. 대학은 과거의 지식이 보존되고, 전수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대학 제도의 성격은 지식과 노동이 그렇듯 그 자체로 사회적이며 공통적이다. 대학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 시간, 비용 역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중앙대에서 벌어지는 사태, 곧 고용안정과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보편인류적인 주장에 대해 중앙대 쪽이 보이는 야만적 태도는 한국 대학이 공통적인 것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지식생산자는 아니지만 교육과 연구를 위한 환경 조성에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는 청소노동자는 대학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대기업이 인수한 이 대학은두산대라는 별칭답게 한국 자본의 일반적 무식함과 폭력성을 대학운영에 접목시킨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학생들에게 징계와 벌금 폭탄을 던지고, 민주주의적 과정 없이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등 중앙대의 그간 행적은 가차 없는 계산적 합리성 아래서 파괴되는 공통적인 것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공통체>의 저자들은 공통적인 것의 힘을 파괴하려는 자들보다 이를 지키려는 우리가 훨씬 강하다고 믿으며 전투에 임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그 힘을사랑과 웃음이라고 표현한다. 사랑은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고, 웃음은 그 사랑을 통해 발산되는 환희의 정동이다. 사랑하고 웃으며 끝까지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책을 일거에판타지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도 이전에는 판타지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상식도 급격히 낯설어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공통적인 것이 자본의 힘을 누르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 판타지는 지독히도 절실해 보인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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