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에 대하여 - 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 현대의 문학 이론 41
장 뤽 낭시 외 지음, 김예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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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의 흐름을 만든 저작 중에 지은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교본인 <숭고에 대하여>도 그런 저작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처음 발견됐을 때 필사본 표지에 쓰인 이름을 따 롱기노스 저작으로 불린다. 오래 망각의 늪에 빠졌던 이 얇은 책은 16세기에 세상에 나와 근대 미학 사상의 원천이 됐다. 뒷날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를 파고들어가 이 주제의 미학적 표준을 세웠다. 압도적으로 큰 것 앞에서 느끼는 전율 어린 감동이 숭고다.

롱기노스의 저작이 쓰인 시기는 서기 1세기쯤으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가 이 책 마지막 장에 있다. 거기서 롱기노스는 자기 시대를 숭고한 정신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말의 궁핍”이 삶을 덮친 시대라고 단정한다. 이 옛 문헌은 말이 깊이를 잃어버리고 가난해진 원인을 민주주의의 죽음과 언론자유의 소멸에서 찾는다. 위대한 작가를 키우는 건 민주주의라는 유모인데, 그 유모가 죽어버리자 위인들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연설가의 능력은 자유로운 경쟁과 마찰로 불붙어 타오르는 것인데 그 말의 자유가 사라지고 만 것이 궁핍한 시대를 불렀다고 진단한다. 바로 이 구절들이 이 책의 저술연대를 1세기 무렵으로 보는 근거 구실을 한다. 자유와 민주의 상실을 애달파하려면 상실 이전 세상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야 하는데, 그 시기가 바로 1세기, 로마 공화정이 망하고 황제정이 열린 직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롱기노스 저작은 겉은 수사학을 가르치는 책이지만 안으로 말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불꽃을 품은 책이다.

롱기노스 저작은 숭고야말로 말과 글의 높이를 재는 척도라고 말한다. “위대한 시인·작가는 숭고를 통해 제일인자가 되었고 영원한 명성을 얻었다.” 숭고한 말과 글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플라톤의 산문,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이 그렇게 혼을 흔든다. 이 숭고를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는가. 수사학적 기교는 연습하면 익힐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교는 겉옷일 뿐이다. 말의 생명인 숭고는 ‘큰 정신’(메갈로프시키아)에서만 나온다. 정신의 크기가 언어의 숭고를 결정하는 것이다. 롱기노스는 숭고함을 해치는 수사의 사례도 열거하는데, 부적절한 과장, 절제 없는 감정 표출, 그리고 때에 맞지 않는 저속한 표현은 좋은 말과 글의 적이다.

롱기노스의 글을 읽으면서 대통령의 말을 떠올린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가운데 단연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이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새해 기자회견 발언이다. 이 말이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았음인지 얼마 전 청와대는 ‘대박’의 영어 번역어로 ‘보난자’(bonanza)와 ‘잭팟’(jackpot)을 내놓았다. 보난자는 노다지라는 뜻이며 잭팟은 카지노 용어다. 한반도 통일은 정말 대박이고 노다지며 잭팟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이란 말은 대통령의 공식 언어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투기판 말로는 통일의 뜻을 아우를 수 없다. 통일은 한반도 북쪽을 약탈하여 먹어치우자는 것이 아니다.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반민주적 억압질서와 기득권구조를 해체하고 남과 북을 인간다운 곳으로 바꾸어 하나로 만나게 하는 것이 통일이다. 남북 양쪽의 변화와 혁신이 통일의 본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발언 어디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투기언어는 통일의 큰 뜻을 잊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돈의 상상력에 가둔다. 거짓과 조작으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민주주의 제도를 망가뜨리는 작금의 국가범죄행위를 그대로 두고 외치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반(反)통일이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통일 노력을 명한 것은 남북이 함께할 민주주의의 큰 집을 지으라는 것이지 국가의 범죄 위에 눌러앉아 노다지를 부르라는 것이 아니다.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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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2015-04-07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평점을 2개 밖에 안준 이유는 없군요. 남의 글을 단지 전재해놓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