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데이
데이비드 리바이선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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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 필에게 갑자기 매일 하루가 반복되는 일이 벌어진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견디지 못 해서 전기감전, 투신 등의 다양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또 반복되는 하루가 펼쳐진다. 데이비드 리바이선의 소설 『에브리데이』의 주인공 A는 매일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나는 생활을 16년 동안 겪고 있다. A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현상과 그에 대한 많은 법칙을 알고 있고 실수하지 않는 법을 안다. 매일 인근 지역 같은 나이의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나 매일 새로운 학교생활을 도전하고 매일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을 몸의 주인에게 하루 빌려 여행자의 삶을 살아간다. 남자아이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고 여자아이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다. 필에 비해 한참 어리지만 처음부터 그래왔기에 매일 다른 사람으로 일어나는 잔인한 현실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자신은 그 몸에 하루 머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학교에 가서 출석을 채우고 성실히 숙제를 한다. 자신이 머무르는 몸을 존중해 줄 줄도 아는 아주 성숙한 내면을 가진 16살의 모습이다. 

자신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확실해 보이는 저스틴의 몸으로 깨어나며 그리 좋은 날이 아님을 일찍이 예감한 5994일의 날 A는 리에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약중독자, 자살을 계획하는 우울증에 걸린 소녀, 동성애자, 당뇨병에 걸린 소년, 미성년자 불법 가정부, 몸무게가 130kg이 넘는 뚱뚱한 소년 등의 몸으로 매일 다르게 깨어나지만 지난 16년의 떠돌이 삶과는 달리 A의 삶의 나침반은 이제 리에넌만을 향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바라보는 몸을 의식하고 리애넌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삶의 흐름과 맞서 싸우고 그들의 일상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괴물이 되어 있다. 전에 없던 실수도 저지르게 된다. 

 

매일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나는 주인공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 설정,

10대들의 사랑 이야기,

미국을 대표하는 YA작가 데이비드 리바이선……

『에브리데이』를 수식하는 몇 가지의 타이틀만 보고는 『트와일라잇』시리즈처럼 10대 소녀 독자들의 열혈한 지지를 받을만한 장르소설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미국을 대표하는 YA 작가'라는 작가 소개에 내가 기대했던 소설이 아닌가 싶어 멈칫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소재와 빠른 전개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며 『에브리데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번 들어갔던 몸에 다시 들어가는 일은 없지만 이틀 동안 쌍둥이 형제의 각자 몸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흥미로운 소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A가 살아온 5993일의 쌓여진 과거와, 리애넌을 만나 쌓아가는 41일의 현재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A가 쌓아온 6034일의 이야기가 주는 묵직한 감동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내면과 외면을 다 가지고도 내가 나일 수가 없을 때가 많아 자주 괴롭다. 저스틴 곁에서 생기 없어 보였던 리애넌도 그래 보인다. A가 16년 동안 굳건히 쌓아온 탄탄한 내면의 지반과는 달리 리애넌이 쌓아온 내면의 지반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리애넌 입장에서 보여주는 『또 다른 날(Another Day)』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왜 리애넌은 온전한 그녀 자신이 되지 못했는지, 그게 아니라면 사춘기 섬세한 여학생의 입장을 내가 오해한 건 아닌지 빨리 살펴보고 싶다.

A가 가게 되는 곳은 언제나 내일뿐이다. 자살을 계획하는 위태로운 소녀 켈시는 아직 모르는 점이지만 A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 마음에 따라 현실을 바라보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다. A가 어떤 매일매일을 쌓아가며 내일로 가고 어떤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어른이 되어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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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해변
크로켓 존슨 글.그림, 김미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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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오래된 고둥을 찾아 온종일 헤매는 앤과 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신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앤과 이야기는 단어를 늘어놓은 것뿐이라는 벤은 원하는 것들을 모래 위에 글자로 쓴다. 파도가 몰려왔다가 물러가면 글자들은 사라지고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마법에 걸린 해변에서 그 비밀을 발견한 앤과 벤은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고 신나는 일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간다. 

 

크로켓 존슨의 『마법의 해변』은 50년 전 『모래 위의 성』이란 제목과 이야기에 맞는 베티 프레이저의 삽화로 처음 출간되었다가 40년 후 작가의 초기 스케치와 『마법의 해변』이란 제목으로 작가가 처음 내놓았던 원본 그대로 재출간 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숨은 이야기가 많은 이 책은 그 자체가 마치 원작을 찾아 40년을 헤매는 이야기의 주인공 같다. 지나치게 심각하고 아이들이 읽게에 어려워 출판이 좌절될 뻔하고 다른 사람의 삽화로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이 작가의 입장에서 신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40년 후 원작이 부활하고 '시대를 너무나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으며 마침내 빛을 보고 있으니 행복한 결말의 시간은 이전의 40년보다 더 오래가지게 될 것이다. 『모래 위의 성』출간 이후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원작으로 만나는 국내 독자들은 시대를 잘 만난 행운까지 누리게 됐다. 그리고 단어의 힘, 글자의 마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의 이름이 '자음과 모음'이라는 점은 국내 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걸어준 마법 같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는 우려가 많았지만 상상력을 잃어버린 어른을 위한 동화로 평가받고 있는 『마법의 해변』을 통해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앤과 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원하는 것을 현실로 이루는 과정을 보고 나니 문득 놀이터 모래 바닥에서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놀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한때 광화문 대형서점에 걸렸던 글판으로 더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의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란 글귀도 떠올랐다. 교훈과 감동을 주고 메세지를 전달해 주는 것을 넘어서 잊고 살았던 동심을 떠올리고 반성하거나 새로운 깨달음과 여운을 주는 것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패멀라 린던 트래버스의 『메리 포핀스』에서 메리 아줌마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동화 속 나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의 행복한 결말을 위해 지친 일상을 당연하게 살면서 나였던 그 아이가 아직 내 속에 있는지, 순수함으로 가득했던 동심의 세계에서 너무 멀리 나간 건 아닌지, 나만의 동화 속 나라를 잘 지키고 있는 건지 자신을 뒤돌아 보고 싶다면 마법의 해변에서 앤과 벤을 만나 잃어버린 동심과 상상의 힘을 되찾아볼 시간을 가져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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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우리는 이기적일까 -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너, 나, 우리의 16가지 고민
송가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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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 자격증, 학점, 공모전, 봉사활동, 해외연수 등으로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열심인 취업 준비생들에게 최근 한가지 숙제가 더 생겼다. 재벌이란 신분으로 가까운 미래에 CEO가 될 것이 분명한 모기업의 현 부회장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인문학 특강까지 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국의 캠퍼스에서는 갑자기 인문학이라는 키워드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강조하는 대기업의 주문에 인문학적 소양을 갑자기 어떻게 갖춰야 하는 것인지 눈앞이 캄캄하다. 인문학 강연, 인문학 서적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고 인문학 분야의 스타 강연자, 작가가 떠오르고 있지만 없던 인문학적 소양이 벼락치기로 강연을 듣고 책을 읽는다고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수치화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자소서에서, 면접 자리에서 어떻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는지 숙제거리가 되었다.

 

『20대, 우리는 이기적 일까』라는 제목으로 이제 막 자신의 첫 책을 세상에 내놓은 송가연 작가는 작가로는 아직 거창한 스펙이 없지만 책날개에서 10줄의 짧은 작가 소개 글(이라 쓰고 방황기라 읽는다)로 취업과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방황 중인 20대들을 대변해주고 있다. 건축 도시 조경학부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심리학과에 입학하고 원하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 지원서를 냈지만 떨어졌고 철학 공부가 하고 싶어 철학과에 지원했고 또 떨어졌지만 다음 학기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현재는 수료 상태이다. 논문 대신 책을 내고 작가로 데뷔했으니 작가의 방황기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자주 접하는 분야의 도서가 아니라서 나에겐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닐까 하는 걱정은 섣부른 기우였다. 작가는 자신의 전공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진로, 실패와 성공, 가능성, 연애, 결혼, 부모, 수단과 목적, 대학, 이기심과 이타심, 학력, 어른, 완벽함, 자신을 찾고 사랑하는 일 등 우리의 삶에 대한 16가지 고민을 인문학으로 풀어보며 정답이 없고 주입식 교육이 통하지 않는 인문학에 대하여 그 의미를 독자들이 각자 찾아보고 자신을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가와 친구들이 카페에서 수다로 풀어내는 현재의 고민과 문제들이 나와 내 친구들이 카페에서 풀어내는 고민과 문제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작가가 제시하는 여러 철학자의 이론과 비유를 통해 내 생각을 이끌어내고 다듬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책에서 다루는 16가지의 고민들이 내가 20대를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거나 작가와 비슷한 또래로 동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남다른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이 이 고민들을 같이 공감하고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을 텐데 제목부터 20대라고 독자층을 한정 지은 점은 안타깝다. 또한 인문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건 최근의 일이지만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아닐 텐데 인문학에 대한 수요보다 수명이 더 짧아 보이는 '넘사벽'이나 '원빈느님'같은 유행어의 표현도 조금은 아쉽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문학 도서를 처음 접할 때가 거의 20대 때 가 아닐까 싶다. 아직 인문학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겠고 재미없고 어렵게만 보인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20대들에게 작가가 직접 체험한 고민과 방황의 경험을 심리학과 철학의 전공으로 승화시켜 탄생시킨 이 책이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생각거리를 주는 건 틀림없다. 취업을 위해서 도움이 될만한 인문학 도서를 찾는 현실이 슬프지만 취업을 위해 서건, 정말 본인에게 필요함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인문학 도서를 찾건 간에 20대 시절을 갓 지나온 송가연 작가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20대에게 바치는 『20대, 우리는 이기적 일까』는 인문학을 갓 접하는 20대들에게 인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쉽게 알려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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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공주들 - 동화책에는 없는 진짜 공주들 이야기
린다 로드리게스 맥로비 지음, 노지양 옮김, 클로이 그림 / 이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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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궁전에서 살던 아름다운 공주들은 그녀를 질투하는 계모의 괴롭힘에도 착하게 살다가 죽을 고비를 맞이해도 용맹한 왕자의 키스에 깨어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백성들을 돌보며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디즈니 왕국에서 태어난 공주들은 조금 다르다. 공주들에게 다양한 피부색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고 용감한 성격을 보여주며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동화책에서 봐왔던 순종적이기만 했던 공주들과는 다르지만 이들 역시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백성들을 돌보며 아주아주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하지만 역사 속 실제 공주들의 삶과 모습은 우리의 상상과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린다 로드리게스 맥로비는 『무서운 공주들』을 통해 동화책과 만화영화에서 보지 못 했던 진짜 공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지 전설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공주들도 있고 역사학자들마다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공주의 왕관은 썼지만 그 신분으로 우아하게 살지 못했고 수월하게 지내지도 못 했던 30명의 '무서운'공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지 말길. 이 책에서는 앤 불린과 마리앙투아네트는 부록으로 취급하고 있고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동생 폴린 보나파르트 편에서 조연으로 등장할 정도다. 

왕실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근사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공짜란 없는 법이다. p.304

전사, 왕위 찬탈자, 전략가, 생존자, 파티 중독자, 난잡한 여인들, 미친 여인들. 총 7개의 파트로 나뉘어 소개되는 30명의 공주들은 주어진 일을 고분고분 따르는 온순하고 단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해적이 되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떠나기도 하고 남다른 용맹함으로 전쟁터를 종횡무진하며 놀라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비범하고 포악한 모습을 보이며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며 원하는 게 있을 땐 죄책감 따위는 키우지 않고 거리낌 없이 해치우기도 했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위험한 선택도 서슴지 않았으며 주변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가십을 쫓는 여왕벌로 궁 위에 군림하는 공주가 있는가 하면 문란하고 추잡한 행동으로 웃음거리가 되거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망상으로 정신질환을 앓으며 왕실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공주도 아주 많았다. 

왕자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공주가 막무가내에 고약한 행실을 보여도 진정한 왕자라면 짜릿한 키스 한 번으로 동화 속 공주로 변신시킬 줄 알아야 하건만 남자를 사랑하는 왕자가 있는가 하면 까다롭고 잔소리가 심한 왕자가 있었고 폭력적인 왕자,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왕자, 뚱뚱한 술고래, 끔찍한 도박꾼 등 무수한 유형의 공주들 만큼이나 무수한 유형의 왕자들이 동화 속과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 왕자와 공주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하든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 정략결혼이 이루어 지든 끝은 거의 비극적이었고 이혼이 빈번했다.

"내가 더이상 아름답지 않다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나 귀족 가문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공주들이 있는가 하면 바에서 여급으로 일하다 결혼으로 공비가 된 글로리아 폰 트룬 운트 탁시스와 성노예에서 왕의 총애를 받고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 전에 없던 권력을 누리는 마성의 여인 록셀리나가 있었고 의무로 인해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을 힘겨워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크리스티나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를 공주라고 자처하고 왕족사칭자라는 직업으로 치밀하게 연기한 카라부와 프란치스카가 있었다. 캐럴라인은 씻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지만 폴린보나파르트는 가난한 친척 집에 들러서도 목욕탕 천장에 구멍을 뚫은 다음 하인들이 부어주는 우유로 우유 목욕을 했고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는 올리브 오일 목욕, 실크에 송아지 살을 올린 수면 마스크팩 등으로 미모와 몸매 관리에 유난스러웠다. 또한 사라 위네뮤카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문명화된 위태로운 인디언 공주였다. 

30명의 공주들이 개척해낸 각자의 개성 넘치고 흥미로운 가십거리도 재미가 있지만 공주라는 높은 신분적 위치 속에서도 광범위한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속에서 당시 여자들의 현실을 짐작하거나 유럽 왕실의 문화를 엿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여성이 보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화가치가 처녀성인 시절이 있었고 황제가 왕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일부일처제인 시절도 있었다. 또한 왕가들은 한 가족 안에 모든 주권을 계속 집중시키기 위해, 신의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근친상간의 금기가 예외가 되었고 결혼을 통해 미국인 집안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럽인 집안은 텅 빈 금고를 채우는 '달러 공주'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개의 공주들이 아름다운 외모도 아니었고 우아하거나 신중하지 못 했다. 정신병을 앓는가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빚을 지고 있기도 했다.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공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공주들은 여성성으로 간주되는 아름다운 외모나 현명함을 무기로 삼지 않았다. 여자 거인이라 불린 쿠툴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슬링 기술이 그녀만의 무기였다. 캐서린 라치비우는 신랄한 말재주와 글 솜씨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했으며 스테파니 폰 호엔로헤는 적조차 헌신적인 친구로 만드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녀의 인맥은 나치에게 너무나도 귀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공주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 강했으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도 순응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신념을 가지고 헤쳐나갈 줄 알았다. 복잡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펼쳐진 각자의 사연은 논란거리가 되기 충분하고 좋은 말이 나오기 힘들지만 공주라는 신분이 주는 무기인가 자존심 강하고 대한 성격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도 결국은 사랑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두꺼운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즐거운 독서를 해나갈 수 있었다. 30명의 공주 이외에도 각자의 주제에 맞게 여러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이 소개되었고 화려한 일러스트는 눈길을 사로잡았다(전해져오는 인물화나 실제 사진이 실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 책을 읽을 땐 그녀들을 화려한 궁전에 사는 공주가 아닌, 무거운 왕관을 벗겨주고 한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첫 독서와는 조금 다르게 읽힐 것 같다. 

 

"나의 동화는 다 끝났다. 동화 속 요정이 급여를 주진 않을 테니까."

-글로리아 폰 트룬 운트 탁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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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e so French! - 잇스타일에 흔들리지 않는 프렌치 시크 완벽 가이드 You're so French!
이자벨 토마, 프레데리크 베세 지음, 노지양 옮김 / 이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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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패션에 자신이 없는 이유

하나. 지갑이 빈약하다

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셋. 그냥 모르겠다

 

 

 

이건 형편없는 지갑 사정, 얼굴, 몸매, 무지만큼이나 형편없는 핑계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앤디 삭스의 눈부신 변신 과정을 보면 역시 해답은 명품에 있는가 싶지만 아시다시피 그건 영화라서 가능했던 이야기다. 돈이 있고 예쁜 얼굴과 몸매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라면 비싼 명품을 센스 없이 입은 한 장의 사진으로 워스트 드레서로 낙인찍히고 오랫동안 고통받는 연예인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건 나쁜 미디어가 빚어낸 폐해가 빚어낸 결과다. 앤디 삭스를 완벽하게 180도 변신 시킨 나이젤의 그럴듯한 44사이즈 찬양이, 방송에서 여과 없이 보여주는 외모지상주의가 나를,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남들 따라 하기 바쁘게 만들고 있다. 

 

 

 

패션 저널리스트 이자벨 토마의 글과 패션 사진작가 프레데리크 베세의 사진 그리고 디자이너, 트렌드세터, 가수, 향수전문가, 교육사회학자 등 25명의 다양한 프랑스 패션 인사이더들의 인터뷰가 수록된 『You're so French!』는 스타일에 대한 프랑스적인 접근 방식을 소개하고 아낌없이 조언해주는 프렌치 시크 가이드북이다. 

프렌치 시크, 매혹으로 꽉 찬 이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주 느 세 쿠아(Je ne sais quoi,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좋은 것)'. 시크함, 우아함, 세련됨의 상징인 프랑스 여자들은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듯한 옷차림, 맨얼굴, 손으로 빗은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고 변치 않는 매력으로 발산시킬 줄 안다. 무심한 듯 시크하면서도 유행을 뛰어넘어 차별화되는 우아함으로 지켜내는 프렌치 시크는 모방조차 쉽지 않아 전 세계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프랑스 여자만의 프리미엄 특혜가 되었다.

 

이 책의 작가 이자벨 토마는 프렌치 시크를 갈망하는 독자들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게 옷장 정리를 도와주고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 아이템을 어떻게 투자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알려주며 각종 악세사리와 가방 등을 요령 있게 매치하여 스타일리시하게 입을 수 있도록 조언해준다. 무난한 블랙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계속해서 일깨워주고 나이에 맞는 옷차림과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중고 옷, 엄마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옷, 남자친구 옷 등을 소화하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짚어준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패션이든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오는 자기만족을 별일 아닌 듯 무심하게 즐기라는 남다른 조언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다양한 프랑스 패션 인사이더들의 인터뷰와 사진은 그들이 전문 모델이 아닌데도 전문 모델 못지않은 포스를 풍기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패션에 관한 애정이 넘치는 정의와 조언,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착용한 패션 아이템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겨보다 보면 어느새 무엇보다 자아를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프랑스 여자와 마주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량생산, 대량판매 시스템으로 잠식당한 패션계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여전히 프랑스 여자는 남다른 빛을 발산한다. 그 비밀은 (당연히 LVMH사의 무수한 명품 브랜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수 겸 작곡가 알랭 상포르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남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제 잇스타일에 그만 흔들려야 함을 알고 셀러브리티의 옷장, 가방, 향수, 메이크업이 아닌 "내 스타일"을 찾아내야 할 때다.

자신을 완전한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알게 된다면 You're so Fre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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