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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로 먼저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인식은 '소설가'라는 타이틀보다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이 먼저 떠오른다. 그녀가 창조한 소설 세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크지만 그 세계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멋대로 상상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나 그것이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오심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데뷔작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국내에 출간되었다. 작가의 세계적인 명성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성공을 되돌아보면 출간이 늦은 감이 있지만 출간이 늦은 만큼 반가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출간뿐만 아니라 작가의 방한 소식까지 들려오니 한국 독자들에게 엄청난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이자 진보 성향의 언론사와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며 대외적으로 존경받는 아버지를 둔 소녀 캄빌리, 나이지리아 부유층 자녀로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위와 폭력에 억압당하며 학대받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며 아버지와 종교적 갈등을 빚는 파파은누쿠 할아버지와 자신의 가족과는 정반대의 이페오마 고모네 가족을 만나 그들의 삶에 스며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고 성장해간다.
이페오마 고모는 오비오라를 조수석에 태운 채 떠나갔고 아마디 신부도 잠시 후에 떠났다. 치마는 윗집에 놀러 갔다. 아마카는 자기 방에 가서 음악을 틀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베란다에 있는 나한테도 또렷이 들릴 정도였다. 이제는 나도 그 애의, 문화적 자의식이 있는 음악가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오니에카 온웨누의 청아한 목소리와 펠라의 자신만만한 박력과 오사데베의 진정시켜 주는 지혜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오빠는 정원에서 이페오마 고모의 전지가위를 들고 있었고 나는 거의 다 읽은 책을 무릎에 놓은 채 오빠를 보고 있었다. 오빠가 양손으로 가위를 들어 올려 머리 위 가지를 잘랐다.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해?" 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기니?"
"아마카가 우리더러 비정상이래."
오빠는 나를 쳐다봤다가 앞마당에 늘어선 차고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정상이 뭔데?" 그렇게 대답을 필요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질문을 던지고는 다시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p.190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타이틀에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세계가 먼저 떠오르기도 했지만 작품 속 공간이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 대비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던 『비바, 제인』과는 다른 공기를 가지고 있다. 이국적일 수밖에 없는 나이지리아의 풍경과 억압적인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 밖에 모르는 소녀의 모습에서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경쾌한 이페오마 고모네의 등장에 『천 개의 찬란한 태양』도 금방 잊히고 만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향은 나이지리아만큼이나 이국적이고 낯설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세계적인 명성과 성공에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며 만족도를 선사해주었다.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는 소녀의 성장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 민주주의 등 무거운 주제들을 아우르면서도 재미와 긴장을 놓치지 않아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16년 전 발표된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기승전결이 확실함에도 등장인물과 감정에 대해 독자 몫으로 남겨둔 여백이 많은 이야기이다. 책은 370여 페이지이지만 이야기의 무게는 훨씬 묵직하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작가가 내한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