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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2018년, 미투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요동을 쳤다. 스웨덴의 한림원도 미투 운동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명성 높은 한림원의 권위를 뒤흔든 성폭력 스캔들은 117년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취소 사태를 빚어냈다. 같은 해
맨부커상의 경우 50주년 수상작으로 '밀크맨'이라 불리는 나이 많은 권력자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부풀어지는 스캔들로 고통받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애나 번스의 소설 『밀크맨』을
만장일치로 선정하여 노벨 문학상의 권위
추락과는 반대로 수상작에 화려한 영광의 왕관을 제대로 씌워줬다.
작년 맨부커상은 마침 맨부커상 제정 50주년이기도 해서 수상작에 대한 관심이 더 뜨거웠었는데 수상작
『밀크맨』이
드디어 한국에 출간된다. 개인적으로 맨부커상 수상작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챙겨읽는 편이라 출간 소식이 반가웠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작년
늦가을 창비에서 출간된 맨부커상 최초 퀴어 소설인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에 대한 진한 여운에 젖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며 2년 연속
창비에서 가을에 내놓는 맨부커상 수상작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져만 갔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신이 너무
강해서 나를 도와주고 지지하고 위안해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을 못 믿었고 나 자신을 못 믿었고 나한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p.207
1970년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종교적 이념과 갈등이 이어지는 시기 평범한 18세 주인공의 일상에 '밀크맨'이라 불리는 남성이 침범하여 보이지 않는 위협을 가한다. 주인공의
상황과 두려움과는 반대로 자신과 밀크맨과 향한 스캔들은 부풀어져 간다. 엄마조차 진실에 관한 설명을 거짓말이라 치부해버리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주인공은 계속되는 밀크맨의 등장과 압박에 홀로 싸워 나가며 자신을 지켜간다. 권력자와 젊은
여자의 스캔들이 빠르게 부풀어지지만 주홍글씨는 힘없는 젊은 여자에게만 새겨지고 그 피해는 오로지 젊은 여자 혼자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들이
개브리얼 제빈의 『비바, 제인』과도 닮아 있지만 이야기 전체를 풀어가는 방식과 소설 자체의 분위기는 서로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자기가 기이한 별종으로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기쁠 사람은 없지만 특히 십대에게는 최악의 충격이다. 내가! 내가 알약소녀와 같은 부류라니! 충격적이고 부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쩌면-남자친구를 제외한 (인정하기는 싫지만 밀크맨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내가 걸으면서 책 읽는다는 사실을 비난하는 상황이었다.
밀크맨이 등장한 이래 지난 몇달 동안, 그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는 사실조차 인식 못했는데 실은 내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름끼치고 변태적이고 옹고집이야." 가장 오래된 친구가 계속 비난했다.
p.229
당시의 시대상과 익명(밀크맨,
어쩌면-남자친구, 아무개씨 아들 아무개, 알약소녀 등)에 숨어있는 진짜 인물들에 대한 진실과 보이지 않는 폭력과 억압 등 18세 어린 소녀가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상황들은 가히 재난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주인공은 놀랍도록 의연하게 자신을 지켜나간다. 작가 애나 번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 밝혔다고 하는데 정식으로 출간될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들려줄지도 궁금한 부분이다.
『밀크맨』 속엔 정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 애매모호한 부분들이 있다. 종내엔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마지막까지
애매모호함을 유지하는데 현실 또한 소설가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1970년대 북아일랜드도, 2020년을 코앞에 둔 현재의 많은 나라들도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들이 너무나 많다. 단순히 이것이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절망으로 다가온다. 부디 50년 뒤엔 『밀크맨』을
읽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해 시대적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