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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812/pimg_7553891602637627.jpeg)
모두,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기호 작가님의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벌써 세 번째 짧은 소설집이란 소식에 작가의 꾸준함과 성실함에 감탄하다가 『누가 봐도 연애소설』이라는 제목에 갸웃했다. 작가 이름을 잘못 봤나, 내가 모르는 동명이인의 이기호 작가가 또 있나 보다 짧게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아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이기호 작가가 맞다. 이기호 작가의 연애소설이라니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만큼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다.
형사님, 그거 아세요? 제가 그 긴 세월 동안 미옥이를 잊어본 적 없다는 거 아니에요. 아니, 뭐 매일같이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추운 겨울날 혼자 막히는 도로를 운전하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 소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 '아, 그 친구는 지금 뭐 하면서 지낼까?' 목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저한테는 바로 미옥이었어요. 그럼요, 나이가 쉰이 다 되었어도 마음만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 그 마음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은 거죠. 어디 마음이 나이를 먹나요? 세상이 먹는 게 나이지……. p.45-46 「내 인생의 영화」
그의 눈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가 누가 봐도 이기호 감성으로 펼쳐진다. 하필 녹색 어머니회에서 재회한 옛 연인, 치매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 전학 가기 싫은 초등학교 6학년 커플, 긴급재난지원금이 가져다준 용기와 감정, 딸의 외국인 남자친구가 못마땅한 아버지, 사내 비밀 연기 커플의 발연기, SNS 상에서만 유지가 가능한 연애, 사이비 종교의 포교에 진심인 남자의 순정, 이별에 미련이 남은 (대부분 남자) 사람들 등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소설 속 상황, 감정이 자주 웃프고 때때로 뭉클하다. 마치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시리즈 감성이 소환돼 뭉클해지기도 하고 말랑말랑해지기도 하다가 <나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 장도연의 느닷없는 '그 오빠와 잘해봐' 부추김처럼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번 소설 역시 이기호 작가만이 발산할 수 있는 매력에 대책 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은서는 뭉치를 안은 채 일어났다.
"뭉치는 내가 데려갈 테니까 신고하든 소송 걸든 네 맘대로 해."
은서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그러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찬수는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나도 데려가야지!"
은서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돌아보진 않았다.
"개는 데려가면서 나는 왜 안데려가냐구!"
찬수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은서는 끝끝내 돌아보지 않은 채 공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p.64-65 「개만도 못한」
썸도 연애도, 마치 무슨 알바 시급처럼 숫자로 계산되었다가, 숫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이 사치가 돼버린 시기에 이기호 작가가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평범한 사람들, 연애 무식자들의 이야기는 저마다의 특별함을 품고 있다. 유쾌하게 술술 읽히는 짧은 이야기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30편의 짧은 이야기 속 인물들은 소설 세계 속에서 무심히 스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얕지 않고 짧지도 않다. 또한 연애소설 속에 녹여낸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독박 육아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시선, 녹색 아버지회가 아닌 녹색 어머니회, 아이들 교육과 학군 문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과 여러 사회 현상들을 건드리며 이야기의 무게감들 더해준다. 그야말로 로맨틱한 시국 소설이 아닐 수 없다.
"그냥, 고맙다고."
"뭐가?"
"그냥…… 이 나이 됐는데도 옆에 친구가 있다는 게…… 그게 고맙네."
지숙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웃었다. 성구는 지금이라고, 바로 지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식혜나 한 잔 더 줘. 맛있네."
지숙이는 성구의 컵에 식혜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성구는 이게 아닌데, 생각이 들었다가, 또 바로 아니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혜는 달고 또 시원했다. p.186 「식혜 같은 내 사랑 1」
여자의 세계란, 아직 그에겐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은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유쾌함에 개성이 뚜렷하고 오직 이기호 작가만이 쓸 수 있어 대체 불가능하다. 언제나 한결같고 익명으로 발표해도 바로 알아볼 것 같은데 신작을 만날 때마다 새롭고 매번 감탄하게 되는 건 아이러니다. 이 모든 것을 연애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요즘 말로 이기호가 이기호했다. 초등학교 6학년 창수에게 여자의 세계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다. 한국문학 덕후인 나에게 이기호의 소설 세계란 영원히 따라 읽고 싶은 세계다. 이기호라는 장르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