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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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와 카카오페이지가 공동 개최한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1회 대상작 『스노볼』이 출간됐다. 평소 창비에서 출간하는 한국문학, 청소년 문학에 대한 신뢰도가 무척이나 높은데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만나 영어덜트 장르문학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문학상이 등장하여 1회 대상작이 출간됐다고 하니 이건 꼭 챙겨 읽어야 하는 작품이자 앞으로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해야 할 문학상이라는 게 바로 느껴진다. 창비와 카카오페이지의 만남이라면 재미, 흡인력, 작품성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이번에 창비가 발굴한 작가와 작품은 흡인력 있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묵직한 메시지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건드려줄지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갔다.

"무력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는 아주 제한적이며, 공정한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유혈 사태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세상의 균형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더 이상 총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피를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스노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상의 균형을 이룰 것입니다."

"이 일은 초밤 양만이 할 수 있어요."

이백 년 전 갑작스럽게 시작된 혹한기에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가라는 개념도 희미해진다. 겨울 평균 기온은 감기 바이러스도 살지 못하는 지독한 추위의 영하 41도. 오직 스노볼만이 유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 이본 미디어 그룹이 만들어낸 스노볼 시스템 속에 사는 극소수의 '액터'들의 삶은 드라마로 편집돼 만천하에 방송되고 스노볼 바깥세상에서는 운동 에너지로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며 전기를 생산하고 그 대가로 스노볼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렉터의 꿈을 가지고 스노볼 입성을 꿈꾸는 열여섯 살 소녀 전초밤에게 스노볼의 채널 중 가장 인기 있는 고해리 채널의 차설 디렉터가 나타나 자신과 닮은 액터 고해리의 자살 소식을 전하며 고해리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고해리의 대역이 되어달라고 제안한다. 늘 꿈꿔왔던 스노볼 입성은 전초밤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고 차설 디렉터가 꾸며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너는 왜……."

가쁜 호흡을 하며, 그녀가 중얼거린다.

"너는 왜 죽어도 죽질 않아?"

고상히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네?"

"이제부터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아도 항상 해리야."

450여 페이지의 소설이 단숨에 읽히는 그야말로 미친 긴장감과 몰입력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거대한 유리 천장의 돔 안에서 인공 하늘로 날씨를 조종하고 수많은 카메라가 액터들의 사생활을 바깥 세상에 송출하는 스노볼 안의 세상은 영화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 하고 겨울 평균 기온 영하 41도, 여름 평균 기온 영하 15도의 끔찍한 추위 속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하며 전기를 생산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바깥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스노볼에 입성하여 고해리의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전초밤이 거울 엘리베이터로 다른 장소에 다다르는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떠오르며 박소영 작가가 건설한 독특한 세계관에서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소설을 읽는 내내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마지막 제대로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의 마무리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정의로운 인간도, 특출난 인간도 아니었기에 거대한 시스템 앞에 무기력했어. 그래서 그냥 도망가기로 했지. 저 더러운 세상에 나 하나라도 삭제하는 것. 딱 그 정도의 반항이 내 그릇이었어."

"모두가 꿈꾸는 삶을 손에 쥐여 줬는데 왜 즐기지를 못하지?"

박소영 작가가 구축한 『스노볼』의 탄탄한 세계관과 스토리의 짜임은 독보적인 흡인력을 선사한다. 이본 미디어 그룹이 만들어낸 스노볼 안에서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와 선택받지 못한 스노볼 바깥의 디스토피아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계급사회와 가진 자들의 특권, 기획 상품처럼 소비되는 액터와 언론의 독립성 등을 작정하고 꼬집으며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소설 속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과 그들이 모여 비밀을 파헤치고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느낀 짜릿함은 강렬한 독서의 쾌락으로 남는다. 영화나 드라마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세계관을 제대로 살려낼 자신이 없으면 감히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엄격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격자로 크리스토퍼 놀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엇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냐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명소명이 신시내의 머리띠를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린다.

"짜증 나게 둘이서만 결연한 척하지 마, 나 얘 머리띠에서 쉰내나 맡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니까."

명소명의 허리 뒤춤에 달린 권총을 힐끔거리던 신시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운다.

"이 깡패도 우리랑 한 팀이에요?"

차향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이만하면 너희의 의지와 결속력은 확인된 거 같네."

"우리 만나요. 다 모여요. 다 같이 목소리를 내서 망가진 삶을 되찾아요……."

개인적으로 『위저드 베이커리』로 구병모 작가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이번 박소영 작가의 『스노볼』에서도 느껴져 작가의 다음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책의 정식 출간 전 가제본으로 빠르게 읽은 상태인데 이야기의 확장이 기대되며 남은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은 극도로 증폭돼 박소영 작가가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엔 소설만 집필했으면 하는 조급증이 생겨버렸다. 박소영 작가가 액터여서 집필 과정을 시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건 반드시 창비에서 책임지고 시리즈로 만들어야 한다. 소설의 다음 시리즈를 애타게 기다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박소영 작가의 등장이, 『스노볼』의 시작이 너무나 반갑다. 이제 막 1회 대상 수상작이 탄생했는데 앞으로의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대감도 더불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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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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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출간됐다. 가장 최근에 읽은 하루키 에세이가 『장수 고양이의 비밀』인데 두 제목이 담고 있는 분위기는 180도 다르지만 이어지는 고양이 제목이 개인적으로 흥미롭다. 하루키라면, 하루키의 에세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익숙하지만(그럼에도 언제나 반갑지만) 아버지에 관한 - 전쟁에 세 번이나 참전했던, 불운했던 시대를 살았던 - 회고는 처음이라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관심이 쏠린다. 작년 <문예춘추>에 기고했을 때 한국 독자들이 바로 인터넷에 번역본을 올리고 찾아볼 정도로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작품인데 가을의 시작과 함께 에세이 출간 소식이 들려왔다. 너무나 잘 알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잘 몰랐던 하루키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지만 얇은 책 속에서 무수히 마음을 건드려줄 것이라는 건 당연하게 예상된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쉽게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학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학교 성적이 늘 신통치 않았다. 좋아하는 일은 끝까지 열심히 물고 늘어지지만, 좋아할 수 없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나의 학업 성적은 그렇게 한심하지는 않아도 절대 주위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적잖이 낙담한 듯했다. 당신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방해하는 것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왜 좀 더 면학에 열심히 정진하지 않는가'하고, 내 근면하다 할 수 없는 생활태도를 보고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내가 톱클래스의 성적을 받아주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시대의 방해로 걸을 수 없었던 인생을, 당신을 대신해 내가 걸어주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아까워하지 않을 심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수 없었다. 차분히 공부에 집중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학교 수업은 대부분 따분했고, 그 교육 시스템은 너무도 획일적이며 억압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내게 만성적인 불만을 품게 되었고, 나는 만성적인 고통(무의식적인 분노를 포함한 고통이다)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아버지는 무척 기뻐한 듯하지만, 그 시점에 우리 부자 관계는 이미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일상적인 일이었고, 딱히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행위도 아니었던)과거 하루키와 아버지는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고 왔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집에 도착하니 바닷가에 버리고 온 고양이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회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지승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뒤를 잇는 문제로 형제들과 고민을 하고 불운했던 시대 속에서 전쟁에 참전해야 했고 이후 매일 아침을 먹기 전 불단 앞에서 열심히 경을 외웠던 아버지의 회상이 하루키만의 감성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복원한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나 기록을 찾아보며 알게 된 아버지 사이의 간극이 종종 보이는가하면 하이쿠에 심취했던 아버지의 회상에 하이쿠가 비중 있게 다뤄지기도 한다. 그 속에 그 시대의, 일본의 역사가 있고 전쟁을 치른 후 공허만 남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있다.

어머니 이야기로,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상당히 거칠게 살았다고 한다. 가혹한 전쟁 체험이 아직도 몸안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인생이 자신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는 스트레스도 나름 심했을 것이다. 술을 자주 마시고, 때로 학생들을 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성장하면서, 그 성격도 행동도 점차 온후해져간 듯하다. 때때로 침울해하거나 언짢아하고, 술을 과도하게 마시는 일도 있었지만(그리고 그 일로 어머니는 자주 푸념했지만), 아들로서 집 안에서 불쾌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마 온갖 상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런대로 진정되었던 것이리라.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자라지 못했고 끝내 사이가 좋지도 못했던 부자관계지만 불운했던 시대를 감당하며 비인간적인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하루키만의 회상은 그의 소설과 많이 닮아있다. 특유의 허무와 상처가 이번 에세이에 많이 녹아있다. 하루키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더 좋아하는 소설파,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에세이파로 종종 나뉘곤 하는데 이번 에세이는 하루키 소설을 더 좋아하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을 전해주기 때문에 소설파, 에세이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하루키가 아버지를 회상하는데 소설파, 에세이파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당신이 그 인생에서 다하지 못한 일을 외동아들인 내가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이리라. 내가 성장하고 자아가 발달함에 따라 나와 아버지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은 점차 심해지고 보다 명확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쪽이나 상당히 강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차가 자신의 뜻을 쉽사리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얘기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비슷한 동지였을 수도 있다. 싫으나 좋으나.

다른 글과 같이 엮기 어려워 작은 책으로 냈다는 『고양이를 버리다』에는 하루키의 애정이 많이 엿보인다. 거기에 그가 화풍에 매료되었다는 가오 옌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 어우러져 따뜻함을 더해준다. 워낙 작품이 많은 작가이다 보니 나의 경우 - 특히 에세이의 경우 - 작품이 헷갈리거나 섞이는 웃지 못할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하는데 『고양이를 버리다』는 선명하게 기억될 작품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책의 정식 출간 전 프리뷰북으로 먼저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책을 넘기는 방식이 재밌기도 했고 작품 그 자체만으로 특별하기도 했다. 프리뷰북이라 본문만 수록될 거라 예상했었는데 작가 후기까지 수록되어 있어 제작의 세심함, 친절함이 엿보인다. 출판사에 대한 호감이 상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번 가을 독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로 진하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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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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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식대로 한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019년 맨부커상은 역대 두 번째 공동 수상과 첫 여성 흑인 작가 수상,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두 번째 부커상 수상 등 많은 이슈들로 화제를 모았었다. 그 화제의 중심엔 마거릿 애트우드와 함께 공동 수상한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 있었다. 지금까지 맨부커상 수상작들에 대한 만족감이 남달리 높았던 나는 어느새 맨부커상 수상작을 신봉하고 있는데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여자들』에 대한 기대감도 남달라 어느 출판사에서 언제 출간하는지 줄곧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비채 출판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 출간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작년 많은 화제를 모았던 맨부커상 수상작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여자들』 출간 소식을 알려왔고 이번에도 특별 제작한 프리뷰북으로 빠르게 읽어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윈섬은 손주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 삶에 귀 기울여 주었지만, 손주들이 그녀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빠져 있다고 이해하며, 부모가 성을 낼 때 그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보살펴주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윈섬은 자신이 어머니가 되기 전, 레이철이 말했듯이 한 개인이었을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레이철이 궁금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지금은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다.

 

 

앰마는 딸이 페미니스트이자 자유롭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전설적인 흑인 레즈비언 연극 감독 앰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2명의 여성들의 거대한 이야기가 촘촘하게 펼쳐진다. 누군가의 친구이자 스승, 누군가의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흑인, 성소수자, 페미니즘, 역사, 문화, 정치, 이민자, 미혼모, 가부장제, 데이트 폭력, 편견, 차별 등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로 견고한 구조 속에서 힘 있게 전개된다. '무슨 일이든 허용하는 환경'인 앰마의 연극 뒤풀이 풍경처럼 전 세대와 다양한 소재들을 허용하고 아우른다. 인종, 세대, 젠더 갈등과 수년간 누적된 문제의식의 민낯을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도 따뜻한 화해를 도모한다. 현대사회가 여전히 숙제로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들을 건드리는 방식에는 특유의 설득력이 있는데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독보적인 세심함에 반하게 되는 포인트가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 곳곳에 가득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출퇴근길에 <더 타임스>를 읽는 자일스는 지적 자존감으로 한껏 부풀었고, 집에 오면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여서 포기했다, 그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서재로 들어가면

 그동안 그녀는 아이들을 재웠다

 교사 일을 시작하는 문제에 관해 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베이비시터도 쓰지 못할 형편은 아니잖아

 직장 상사와 남편, 이렇게 두 명의 윗사람을 두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그가 대답했다

 농담하는 건가? 그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이 아니었다

 

인생은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모험이야  

개인적으로 직전에 읽었던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의 여운이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독서에서도 이어져 유난히 더 좋았는데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소재를 가진 긴 소설을 읽으면서 이민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줌파 라히리,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 많은 여성 작가들이 떠오르면서 소설에 대한 만족을 극대화 시켜 주었다.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 전한 메시지와도 이어져있는 것 같아 흥미로운데 기억해야 할 작가가 늘어, 깊은 인상을 남긴 흥미로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12챕터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얽힌 긴밀한 관계와 다채로운 빛깔의 이야기는 6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만큼이나 묵직하다.

 

 난 오직 나 자신만 대표할 수 있어요, 모건이 말했다, 모든 트랜스가 똑같다고 여기는 청중들의 의심 없는 가정에 미리 경계를 보내며 슬슬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난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트랜스젠더 운동의 지도자도 아니에요, 그저 논바이너리가 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특이한 여정을 설명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난 젠더 프리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모건은 싱싱한 얼굴의 젊은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을 보니 스물일곱 살의 그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매건은 당장 페미니즘이 엄청난 과제라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잘 통과할 수 있을까? 

읽는 책마다 독서 만족도가 특별히 높은 2020년 가을날을 보내고 있다. 정식 출간 전 프리뷰북으로 먼저 만나본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두꺼운 책 두께, 위로 넘겨 읽는 독특한 제본 덕분에 외출 때 챙겨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다. 덕분에 집에서 밖에 읽지 못해 빠른 귀가를 부르는 대견한 책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몰입도도 남달랐던 것 같다.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운문 형태의 산문이 초반엔 낯설기도 했지만(그래서 원서가 궁금하기도 하다) 소설에 몰입하기 시작하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는데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소설 내용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소설을 처음 읽던 내 모습에 대한 기억도 따라 남을 것 같다. 

 

 사실 내가 거슬리는 건 페미니즘의 상업화야, 앰마,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페미니스트를 심하게 비난하다 보니 아무도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몇 세대의 여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외면해왔지, 이제는 미디어와 야합하고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파격적인 옷차림을 한 채 거창한 몸놀림을 보이는 화려한 사진 본 적 있지? 이제는 유행도 아니야

 페미니즘 토대 전체가 바뀌어야 해, 그저 유행을 따르는 변모 정도가 아니고

 

난 오직 나 자신만 대표할 수 있어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도 여느 맨부커상 수상작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작가가 보여주는 불편함, 불쾌함, 희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소설에 대한,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관점을 키워가며 성장한 것 같다. 앰마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을 버나딘 에바리스토에게 건낸다.  

 

모든 게 완벽하다 

그야말로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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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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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얘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나를 더는 원치 않았기 때문에 셋퍼드 마인스에 왔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날 겁니다. 나는 두번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두번 쫓겨납니다. 여러분은 나와 관련해서 꽤 불쾌한 얘기를 듣게 될 겁니다. 그런 얘기는 아마 다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할 말은 전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늘 헌신적이고 충직한 일꾼이었음을 알아주십시오. 비록 지금에 와서 이런 표현은 말 같지도 않겠지만요, 비록 오래전에 신앙은 나를 떠나갔지만요. 비록 여러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요. 여러분이 나를 심판하고 단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9년 콩쿠르상을 수상한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가 출간됐다. 콩쿠르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 기대감이 커지고 작품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데 거기에 "대중성과 문학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라는 극찬의 심사평은 밀려있는 독서 목록의 순서를 바꾸는데 타당한 근거가 돼주었다. 작년 콩쿠르상 수상 뉴스에 실린 작가가 세상 밝은 하늘 표지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보며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일 거라 혼자 착각을 했었는데 프랑스어판 표지 부럽지 않은 밝은 하늘이 이어지는 가을날 혼자만의 착각을 가지고 본격적인 독서를 해나갔다.

 

 

다른 믿음이 이전의 믿음을 밀어냈다.

소설의 주인공 폴 크리스티앙 프레데릭 한센(이하 폴 한센)의 이야기가 보르도 교도소에 수감 중인 현재 시점과 덴마크계 프랑스인으로 개인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과거의 시점으로 교차되어 펼쳐진다. 부모님의 갈등, 그와 가족의 인생에서 종교와 국가, 문화가 가지는 의미, 그의 눈부신 사랑 이야기 속에서 한 개인의 일생을 넘어 프랑스 정권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덤덤하게 격랑의 세월을 지나온 폴 한센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에 그가 무슨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는지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이 더해져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강한 인상을 받았던 프랑스어판 표지 이미지의 느낌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아 내가 이 책에 대해 무슨 오해를 해왔던 걸까 놀라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밝은 분위기를 전하는 표지가 전하는 메시지가 전해지며 책의 온기도 따뜻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전서평단용 가제본으로 책을 읽고 난 후 한국어판 표지는 어떻게 나올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무한하다.

마치 폴 한센의 외조부와 그의 엄마가 운영했던 예술영화 상영극장에 상영될 법한 프랑스 예술영화처럼 소설은 내내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 속에 작가가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와 때로는 입체적이고 때로는 캐리커처 같은 인물들이 어우러져 콩쿠르상 심사평처럼 대중성과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개인적으로 장폴 뒤부아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의 문체에 제대로 반해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는 중이다. 

 

때때로 삶이 기이한 소임을 맡기려고 나를 택했나 싶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는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기엔 어려움이 따르는 소설이지만 독자들을 대책 없이 빠지게 만드는 매력은 너무나 선명한 소설이다. 많은 나라와 장소를 배경으로 무수한 철학적 사유가 묵직하게 펼쳐진다. 독서 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유난히 궁금해지는 책들이 있는데 나에겐 이번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의 독서가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감상평을 남길 것이지만 저마다 느낀 감상과 매력은 다채로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찾아 보며 음미해야 할 부분이 아직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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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포구 사람인데요?
다니엘 브라이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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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녀들의 수다>, <비정상회담>을 병적으로 챙겨봤던 과거의 나는 지금까지 외국에서 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나를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내가 되었다. 과거의 내가 했던 잘못된 선택이 실패로 돌아와도 크게 후회는 없는 편인데 30살이 되기 전 실컷 고민만 하다가 결국 워킹홀리데이조차 떠나지 않았던 과거의 나는 실컷 증오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언어의 장벽은 물론이고 문화의 장벽까지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으며 현지인들보다 더 그 문화를 잘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이방인들은 선망의 대상이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외국문화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영국 웨일스에서 왔고 제육볶음을 좋아하는 마포구민 4년 차, 유튜브 채널 <단앤조엘>의 크리에이터로 우리에게 친근한 단이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자극 없이 담백한 이야기로 구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단이 유튜브가 아닌 책에서는 어떤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궁금증이 커진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내가 본 한국의 젊은 사람들 중 몇몇은 자기 삶에 대해 만족과 희망이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조엘이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가장 큰 목적도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한국에서 충분히 재미있게, 희망차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p.123 

 

한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유튜버 단이 유튜브 촬영을 하며 경험한 음식, 사람, 장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나는 평소 먹방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데 단의 맛깔나는 음식 묘사를 보며 그 과정들을 눈으로 읽는 걸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가 하면 지방인이라 서울이 마치 외국처럼 멀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는데 영국에서 온 마포구 사람 단이 들려주는 마포구 일대를 비롯한 대한민국 곳곳의 풍경들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덕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모래내 시장 풍경이 친숙하게 느껴지고 마포구가 가깝게 느껴진다. 또한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상대에겐 인종차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몰랐던 사실을 배우고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외국인들의 고민을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 <영국남자>의 올리가 해준 조언이 있다.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인 한 문장으로 자신의 채널을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구독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구독자가 시청하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채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채널에 대한 한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한국말만 잘하는 것이 아닌 외국인들과 지친 삶을 사는 사람이 함께 갖는 따뜻한 한 끼'정도가 아닐까 싶다. p.211

 

예전에 유명 유튜버들의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세상을 내다보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강연을 들으러 갔었는데 나만 빼고 다 유튜버 꿈나무들만 모였던 건지 강연 후 질문은 편집기술, 촬영 장비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때 미처 충족시키지 못했던 부분들을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를 읽으며 충족하게 되면서 책에 대한 만족도가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책 속에 녹아든 시청자들에게 어떤 콘텐츠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창작자의 깊은 고민은 어떤 승부수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씨름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라는 제목과 마포구 지도 한복판에 단이 듬직하게 서 있는 표지 디자인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진짜 천재적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단과 그의 주변 사람들, 유튜브 촬영으로 만난 보통의 사람들, 마포구 일대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되는 장소 곳곳이 친근해져있다. 다른 유튜버들의 책이 그러하듯 <단앤조엘>채널과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의 분위기는 많이 닮아 있다.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의 독서는 마치 '커피 이야기' 시리즈에서 유튜버 단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경험을 전해준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도 남다른 단처럼 이제는 독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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