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비와 카카오페이지가 공동 개최한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1회 대상작 『스노볼』이 출간됐다. 평소 창비에서 출간하는 한국문학, 청소년 문학에 대한 신뢰도가 무척이나 높은데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만나 영어덜트 장르문학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문학상이 등장하여 1회 대상작이 출간됐다고 하니 이건 꼭 챙겨 읽어야 하는 작품이자 앞으로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해야 할 문학상이라는 게 바로 느껴진다. 창비와 카카오페이지의 만남이라면 재미, 흡인력, 작품성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다. 이번에 창비가 발굴한 작가와 작품은 흡인력 있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묵직한 메시지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건드려줄지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갔다.

"무력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는 아주 제한적이며, 공정한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유혈 사태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세상의 균형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더 이상 총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피를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스노볼은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상의 균형을 이룰 것입니다."

"이 일은 초밤 양만이 할 수 있어요."

이백 년 전 갑작스럽게 시작된 혹한기에 세계 경제가 무너지고 국가라는 개념도 희미해진다. 겨울 평균 기온은 감기 바이러스도 살지 못하는 지독한 추위의 영하 41도. 오직 스노볼만이 유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 이본 미디어 그룹이 만들어낸 스노볼 시스템 속에 사는 극소수의 '액터'들의 삶은 드라마로 편집돼 만천하에 방송되고 스노볼 바깥세상에서는 운동 에너지로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며 전기를 생산하고 그 대가로 스노볼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렉터의 꿈을 가지고 스노볼 입성을 꿈꾸는 열여섯 살 소녀 전초밤에게 스노볼의 채널 중 가장 인기 있는 고해리 채널의 차설 디렉터가 나타나 자신과 닮은 액터 고해리의 자살 소식을 전하며 고해리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고해리의 대역이 되어달라고 제안한다. 늘 꿈꿔왔던 스노볼 입성은 전초밤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고 차설 디렉터가 꾸며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너는 왜……."

가쁜 호흡을 하며, 그녀가 중얼거린다.

"너는 왜 죽어도 죽질 않아?"

고상히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네?"

"이제부터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아도 항상 해리야."

450여 페이지의 소설이 단숨에 읽히는 그야말로 미친 긴장감과 몰입력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거대한 유리 천장의 돔 안에서 인공 하늘로 날씨를 조종하고 수많은 카메라가 액터들의 사생활을 바깥 세상에 송출하는 스노볼 안의 세상은 영화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 하고 겨울 평균 기온 영하 41도, 여름 평균 기온 영하 15도의 끔찍한 추위 속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하며 전기를 생산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바깥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스노볼에 입성하여 고해리의 삶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전초밤이 거울 엘리베이터로 다른 장소에 다다르는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떠오르며 박소영 작가가 건설한 독특한 세계관에서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소설을 읽는 내내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마지막 제대로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의 마무리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정의로운 인간도, 특출난 인간도 아니었기에 거대한 시스템 앞에 무기력했어. 그래서 그냥 도망가기로 했지. 저 더러운 세상에 나 하나라도 삭제하는 것. 딱 그 정도의 반항이 내 그릇이었어."

"모두가 꿈꾸는 삶을 손에 쥐여 줬는데 왜 즐기지를 못하지?"

박소영 작가가 구축한 『스노볼』의 탄탄한 세계관과 스토리의 짜임은 독보적인 흡인력을 선사한다. 이본 미디어 그룹이 만들어낸 스노볼 안에서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와 선택받지 못한 스노볼 바깥의 디스토피아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계급사회와 가진 자들의 특권, 기획 상품처럼 소비되는 액터와 언론의 독립성 등을 작정하고 꼬집으며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소설 속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과 그들이 모여 비밀을 파헤치고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느낀 짜릿함은 강렬한 독서의 쾌락으로 남는다. 영화나 드라마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세계관을 제대로 살려낼 자신이 없으면 감히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엄격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격자로 크리스토퍼 놀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엇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냐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명소명이 신시내의 머리띠를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린다.

"짜증 나게 둘이서만 결연한 척하지 마, 나 얘 머리띠에서 쉰내나 맡자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니까."

명소명의 허리 뒤춤에 달린 권총을 힐끔거리던 신시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운다.

"이 깡패도 우리랑 한 팀이에요?"

차향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이만하면 너희의 의지와 결속력은 확인된 거 같네."

"우리 만나요. 다 모여요. 다 같이 목소리를 내서 망가진 삶을 되찾아요……."

개인적으로 『위저드 베이커리』로 구병모 작가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이번 박소영 작가의 『스노볼』에서도 느껴져 작가의 다음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책의 정식 출간 전 가제본으로 빠르게 읽은 상태인데 이야기의 확장이 기대되며 남은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은 극도로 증폭돼 박소영 작가가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엔 소설만 집필했으면 하는 조급증이 생겨버렸다. 박소영 작가가 액터여서 집필 과정을 시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건 반드시 창비에서 책임지고 시리즈로 만들어야 한다. 소설의 다음 시리즈를 애타게 기다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박소영 작가의 등장이, 『스노볼』의 시작이 너무나 반갑다. 이제 막 1회 대상 수상작이 탄생했는데 앞으로의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에 대한 기대감도 더불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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