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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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식대로 한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019년 맨부커상은 역대 두 번째 공동 수상과 첫 여성 흑인 작가 수상,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두 번째 부커상 수상 등 많은 이슈들로 화제를 모았었다. 그 화제의 중심엔 마거릿 애트우드와 함께 공동 수상한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가 있었다. 지금까지 맨부커상 수상작들에 대한 만족감이 남달리 높았던 나는 어느새 맨부커상 수상작을 신봉하고 있는데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여자들』에 대한 기대감도 남달라 어느 출판사에서 언제 출간하는지 줄곧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비채 출판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 출간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작년 많은 화제를 모았던 맨부커상 수상작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여자들』 출간 소식을 알려왔고 이번에도 특별 제작한 프리뷰북으로 빠르게 읽어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윈섬은 손주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들 삶에 귀 기울여 주었지만, 손주들이 그녀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빠져 있다고 이해하며, 부모가 성을 낼 때 그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보살펴주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윈섬은 자신이 어머니가 되기 전, 레이철이 말했듯이 한 개인이었을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레이철이 궁금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지금은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다.

 

 

앰마는 딸이 페미니스트이자 자유롭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전설적인 흑인 레즈비언 연극 감독 앰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2명의 여성들의 거대한 이야기가 촘촘하게 펼쳐진다. 누군가의 친구이자 스승, 누군가의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흑인, 성소수자, 페미니즘, 역사, 문화, 정치, 이민자, 미혼모, 가부장제, 데이트 폭력, 편견, 차별 등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로 견고한 구조 속에서 힘 있게 전개된다. '무슨 일이든 허용하는 환경'인 앰마의 연극 뒤풀이 풍경처럼 전 세대와 다양한 소재들을 허용하고 아우른다. 인종, 세대, 젠더 갈등과 수년간 누적된 문제의식의 민낯을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도 따뜻한 화해를 도모한다. 현대사회가 여전히 숙제로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들을 건드리는 방식에는 특유의 설득력이 있는데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독보적인 세심함에 반하게 되는 포인트가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 곳곳에 가득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출퇴근길에 <더 타임스>를 읽는 자일스는 지적 자존감으로 한껏 부풀었고, 집에 오면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여서 포기했다, 그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서재로 들어가면

 그동안 그녀는 아이들을 재웠다

 교사 일을 시작하는 문제에 관해 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베이비시터도 쓰지 못할 형편은 아니잖아

 직장 상사와 남편, 이렇게 두 명의 윗사람을 두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그가 대답했다

 농담하는 건가? 그의 표정으로 보아 농담이 아니었다

 

인생은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모험이야  

개인적으로 직전에 읽었던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의 여운이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독서에서도 이어져 유난히 더 좋았는데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소재를 가진 긴 소설을 읽으면서 이민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줌파 라히리,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 많은 여성 작가들이 떠오르면서 소설에 대한 만족을 극대화 시켜 주었다.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 전한 메시지와도 이어져있는 것 같아 흥미로운데 기억해야 할 작가가 늘어, 깊은 인상을 남긴 흥미로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12챕터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얽힌 긴밀한 관계와 다채로운 빛깔의 이야기는 600페이지가 넘는 무거운 책만큼이나 묵직하다.

 

 난 오직 나 자신만 대표할 수 있어요, 모건이 말했다, 모든 트랜스가 똑같다고 여기는 청중들의 의심 없는 가정에 미리 경계를 보내며 슬슬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난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트랜스젠더 운동의 지도자도 아니에요, 그저 논바이너리가 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특이한 여정을 설명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난 젠더 프리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모건은 싱싱한 얼굴의 젊은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을 보니 스물일곱 살의 그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매건은 당장 페미니즘이 엄청난 과제라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잘 통과할 수 있을까? 

읽는 책마다 독서 만족도가 특별히 높은 2020년 가을날을 보내고 있다. 정식 출간 전 프리뷰북으로 먼저 만나본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두꺼운 책 두께, 위로 넘겨 읽는 독특한 제본 덕분에 외출 때 챙겨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다. 덕분에 집에서 밖에 읽지 못해 빠른 귀가를 부르는 대견한 책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몰입도도 남달랐던 것 같다. 문장 부호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운문 형태의 산문이 초반엔 낯설기도 했지만(그래서 원서가 궁금하기도 하다) 소설에 몰입하기 시작하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는데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소설 내용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소설을 처음 읽던 내 모습에 대한 기억도 따라 남을 것 같다. 

 

 사실 내가 거슬리는 건 페미니즘의 상업화야, 앰마,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페미니스트를 심하게 비난하다 보니 아무도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몇 세대의 여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외면해왔지, 이제는 미디어와 야합하고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파격적인 옷차림을 한 채 거창한 몸놀림을 보이는 화려한 사진 본 적 있지? 이제는 유행도 아니야

 페미니즘 토대 전체가 바뀌어야 해, 그저 유행을 따르는 변모 정도가 아니고

 

난 오직 나 자신만 대표할 수 있어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도 여느 맨부커상 수상작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만족감을 선사해주었다. 작가가 보여주는 불편함, 불쾌함, 희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소설에 대한,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관점을 키워가며 성장한 것 같다. 앰마가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을 버나딘 에바리스토에게 건낸다.  

 

모든 게 완벽하다 

그야말로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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