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손바닥 소설 1~2 세트 - 전2권 - 개정증보판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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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를 생각하면 다른 작가가 저절로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슷한 장르나 소재의 작품으로 자주 비교되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소문난 친분을 가진 작가들이 있기도 하다. 어떤 작가가 작가가 되기까지 막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 이른바 작가들의 작가들도 있고 인터뷰나 강연에서 다른 작가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준 뒤 영향을 받아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몇 년 전 김연수 작가의 강연에 참석했었는데 김연수 작가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평생에 걸쳐 읽는 작품이라 극찬하고 몇몇 문장들을 짚어준 강연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덕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생각하면 저절로 김연수 작가를 떠올리게 된 것은 물론이고 김연수 작가처럼 문장들을 골똘히 살펴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다시 읽게 되기도 했다. 


 "인생의 분홍빛 새벽이에요. 당신의 아침, 나의 아침. 세상에 두 개의 아침이 동시에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지! 두 개의 아침이 하나가 돼요. 그래요, 멋지군요. 나는 '두 개의 아침'이라는 소설을 써야겠어요."

 그녀는 기쁨에 넘쳐 소설가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좀 봐요. 병원에 있을 무렵의 당신의 스케치예요. 당신이 죽고 내가 죽었다고 해도, 두 사람은 이 소설 속에 살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두 개의 아침이 되었어요. ― 성격이 없는 성격의 투명한 아름다움. 봄 들판에 그윽한 꽃가루처럼 당신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향기 같은 아름다움을 인생에 풍기고 있어요. 나의 소설은 아름다운 영혼을 발견했어요. 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당신의 영혼을 내 손바닥에 얹어 보여주세요. 수정 구슬처럼. 나는 그걸 언어로 스케치해요……."

 "네?"

 "이토록 아름다운 재료―. 내가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나의 정열도 당신을 머나먼 미래까지 살릴 수 없었을 테지요." (1권) p. 61 「하얀 꽃」


우리에겐 생소한 '손바닥 소설'(또는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의 짧은 소설이지만 작가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이고 옮긴이의 말도 한 편의 작품인 문학과지성사의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 완역본이라 하면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달라진다. 남다른 신뢰를 자랑하는 문지만의 작품 선정은 물론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주는 작품에 대한 믿음이 더해지는데 짧은 소설이 2권에 묶여 출간된 점(이 책의 애칭을 '두 손바닥 소설'이라고 지어봤다)이 흥미롭게 느껴지며 작품을 읽기도 전부터 모든 요소들이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전적인 소설이 초반에 배치된 탓에 독서 초반엔 『손바닥 소설』을 제목으로 한 산문집인가 잠시 착각하기도 했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 특유의 허무와 세밀한 묘사, 감각적인 문장의 짧은 소설들을 읽어가는 과정이 즐겁다. 짧은 분량의 소설들이지만 문장을 하나하나 짚어보게 만들고 한 편을 다 읽고 여운을 음미하기도 해야 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은 속독이 안 된다. 분명 한 문장 한 문장 열심히 읽어가지만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빠지는 거'라던 에쿠니 가오리 소설 속 대사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읽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감각적으로 구축한 작가의 글을 믿고 빠지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묘지는 저와 죽은 아내에게 랑데부 장소에 불과합니다. 같이 가고 같이 돌아옵니다. 요즘은 삶도 죽음도 그리 모나고 고정된 형태로는 보이지 않고, 구체와 추상에도, 현재도 과거와 미래에도, 두드러진 경계가 없는 듯 느낍니다. 삶과 죽음의 이음매가 없는 죽은 아내의 생명의 은혜가, 둔재인 제게도 내려오는 것이라고 여겨 새삼 보답하고 있습니다. (2권) p.281 「편지」


짧은 분량의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의 힘, 감정의 흐름과 아름다운 문장들도 엄청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만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풍경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는 재미와 감탄도 엄청나다. 1920~30년대에 발표된 작품을 2021년의 독자가 보기에 살짝 불편한 지점들도 있지만 그런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마저 소설의 재미로 느껴진다.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며 다양한 감성을 전해주는데 유숙자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다시 작품들을 되짚어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세계에 더 깊게 이해하게 해주며 독서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설국』으로만 알기엔 아까운 작가라는 생각을 『손바닥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했다. 이런 생각은 문지 스펙트럼의 작품 선정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는데 곧 나올 작품들의 목록도 장난이 아니다. 언제나 책장이 비좁아 고민인데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자리는 점점 확장해가고 있고 더 확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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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 내 것이 아닌 아이
애슐리 오드레인 지음, 박현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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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요즘의 나는 우리 사회가 모성애라는 단어를 단순화 시키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지에 관해 생각이 많았다. 예전에 슬프고 감동적으로 보고 읽었던 모성애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이 지금 다시 보고 읽으면 별로인 것들이 많은데 모성애를 다루고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전히 단순하고 낡은 탓에 불만이 많았는데 마침 "엄마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 『푸시』가 출간됐고 반가움과 기대감, 호기심이 넘치게 밀려왔다. 자연스럽게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올랐고 두 작품이 주었던 만족감을 기대하게 만들면서 기대치가 클 수밖에 없었는데 출간 즉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38개국 출간 계약, <그래비티> 제작사 영화화 확정 등 작품이 지닌 무수한 수식어들은 소설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더욱 비정상적으로 높게 만들어 주었다.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 모성애와 서스펜스의 만남을 애슐리 오드레인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촘촘한 이야기의 구조와 인물들의 치밀한 심리묘사로 독서 내내 독자들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한다. 에타, 세실리아, 블라이스, 바이올렛 4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모성애의 결핍과 엄마를 미워하는 딸의 이야기의 서사를 지금까지 없었던 이야기와 지금까지 없었던 방법으로 다루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그야말로 엄청난 소설이다. 소재에 이끌려 읽어가기 시작했던 소설 『푸시』의 큰 수확은 이토록 놀라운 작품이 첫 번째 작품이라는 작가 애슐리 오드레인의 발견이다. 화자 블라이스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독자와 노련하게 밀당을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며 몰입도를 폭발시키는데 영화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불어 커진다.


그동안 많은 창작자들이 단순하고 게으르게 다뤄왔던 모성애의 범주를 비트는 소재, 서스펜스라는 장르에 걸맞은 애슐리 오드레인의 날카로운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출산과 육아로 일을 그만둔 작가가 모성의 어두운 면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계기부터 내내 긴장감 넘치다가 맞이하게 되는 압도적인 소설의 결말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강력한 흡인력으로 결말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왔고 압도적인 결말을 맞이 했음에도 기꺼이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데 더 확대된 시야로 다른 인물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다시 읽어보고 싶고 다양한 유형의 독자들과-이를테면 출산 경험이 있는 독자, 남성 독자, 모녀 사이가 좋은 독자, 반대로 모녀 사이가 나쁜 독자 등등-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독서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소재에 대한 반가움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의도치 않게 올해의 서스펜스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영화화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고 작가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까지 생기는데 이토록 견고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지금까지 없던 캐릭터들, 치밀한 심리묘사를 능수능란하게 해낸 애슐리 오드레인은 어떤 소재와 장르의 소설을 쓰더라도 중간 그 이상을 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작가가 너무나 잘 해낸 모성의 어두운 소재, 서스펜스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바람 반, 다른 분위기, 다른 소재의 소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반이다. 과연 애슐리 오드레인의 차기작은 어떤 작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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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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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김지현 작가가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SF소설집 『로드킬』을 발표했다. 작가의 매력적인 행보만큼 SF라는 장르도, 소설의 소재와 배경도, 표지도 모두 매력적인 것들로 넘쳐난다. 얼마 전 김지현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인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으며 무수한 문학 작품들 속 캐릭터들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읽었었는데 소설가로서 아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떤 시선으로 어떤 세계와 인물들을 만나게 해줄지 기대감을 키워준다.


짐작조차 쉽지 않은 6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로드킬』은 남다른 몰입도로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아밀 작가가 구축한 흥미로운 소설 속 세계와 입체적인 캐릭터들, 섬세한 감정 묘사와 시선을 사로잡는 문장들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합은 독자들에게 산만할 틈을 주지 않는다. 소설이 주는 재미와 사고의 확장, 미래 사회를 통해 날카롭게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 등 작가의 내공과 기교가 그야말로 엄청난 작품집인데 소설가로서 첫 번째 작품집이라는 점은 『로드킬』의 가장 큰 반전이다. 작가의 천재성이란 이런 것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밀 작가의 다음 소설도 당연하게 SF소설로 기대하게 되지만 새로운 장르의 작품으로 차기작을 발표한다고 해도 높은 기대심을 가지고 빠르게 챙겨 읽게 될 것 같다. 이런 세계관을 다룰 줄 아는 작가라면, 이런 인물들을 창조해낸 작가라면,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 읽게 될 것 같다. 지금의 『로드킬』이 완성되기까지 작가 아밀이 탄생하기까지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와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경숙은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 재건축으로 지어진 반짝반짝한 새 아파트에서, 바깥 날씨도 모를 만큼 겨울에는 난방을 때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돌리면서, 먹고 싶은 것을 차려먹고 보고 싶은 텔레비전 채널을 보면서 지내고 있다. 두 아들 모두 아주 성에 차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였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을뿐더러 자식들에게 들려줄 집도 있고 이 집은 계속해서 가격이 오를 것이다. 유일한 불만이라면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의 빈자리였다. 경숙은 남편이 지금 자신과 함께 세상을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대기질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정부에서 감염병을 위해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저개발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기청정탑을 세우고, 결국 그 지역들의 집값이 껑충 뛴 이 세상.

 "아니다, 아니야.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마뜩잖아했겠지."

 경숙은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모퉁이를 돌아 걷는다. 보수적인 남편이 이런 새 시대에 적응하며 사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p.140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범접할 수 없는 세계관과 상상력, 몰입도를 높여주는 캐릭터들과 감성, 묵직하게 건드리는 문제의식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완벽한 이야기들이지만 21세기임에도 비정상적인 일들이 당연하게 벌어지는 2021년의 대한민국의 상황들은 『로드킬』의 화제성을 높여주는데 일등공신이 되어주고 있다. 지자체에서 농촌 총각과 특정 국가 유학생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정책을 세우는가 하면 숏컷 헤어스타일과 여대 출신이 트집을 잡히고 국가적 망신이 되는 2021년 여름 『로드킬』의 독서는 여러모로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작가는 몰랐겠지 소설 출간 즈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뉴스가 되고 국가적 망신이 되는 사태들을... 작가가 건드리는 문제의식들과 맞닿은 뉴스들이 진짜 뉴스가 된다는 사실을... 이쯤 되면 『로드킬』은 시국 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해 보인다.


『로드킬』로 처음 알게 된 아밀 작가는 나의 독서 목록에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김지현 번역가였다. 나의 독서 목록 중 작가의 번역 작품들을 되짚어보게 되고 창작자로서 아밀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준다. 


2021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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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 - 버락 오바마 대통령 회고록 1
버락 H. 오바마 지음, 노승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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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회고록 『약속의 땅』이 한국에도 출간됐다. 제목도 표지도 너무나 좋은데 자꾸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과 비교하게 된다. 『비커밍』과 『약속의 땅』, 정면을 응시하는 컬러의 미셸 오바마와 측면의 흑백 버락 오바마. 『비커밍』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은 『약속의 땅』을 향한 기대감을 끝없이 키워주는데 만만치 않은 두께의 책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시각으로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솔직히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믿어본 적이 없다. 운명론은 힘 없는 자들에게 체념을, 힘 있는 자들에게 자기만족을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이든 우리의 유한한 고민거리에 관심을 두시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으시다. 한 번의 생에서 사건과 우연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결정하는 듯하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느끼기에 옳은 편에 서서 혼돈으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고 매 순간 품위와 용기를 발휘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p.98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첫 대선을 치르는 과정, 그리고 첫 임기 2년 반의 과정을 담고 있는 『약속의 땅』을 통해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개인적 이야기와 대통령 재임 시절 각종 정책 이야기를 유려하게 들려준다. 백악관을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던 오바마는 돋보이는 스토리텔링과 필력으로 자신의 재임 시절의 이야기도 친근하게 들려주는데 덕분에 묵직한 책을 언제 어디서나 끼고 다니며 읽어내느라 바빴다. 상황들에 대한 묘사와 대화, 이야기의 마무리가 더없이 근사하다. 덤덤하고 군더더기 없는 900여 페이지의 책이라니 굉장히 모순된 표현 같지만 더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효과적인 공공 외교 수단은 나의 선거운동 각본에 쓰여 있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젊은이들과 간담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처음 실현하느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나토 정상회의 기간에 3000여 명의 유럽인 학생들 앞에 섰을 때는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야유를 받으려나? 장황한 답변으로 청중을 따분하게 하려나? 하지만 대본 없이 진행한 한 시간의 간담회 동안 청중은 기후변화에서 테러와의 투쟁에 이르는 온갖 사안을 열정적으로 질문했고, 우스운 이야기(이를테면 '버락'이 헝가리어로 '복숭아'를 의미한다는 사실)도 들려주었다. 우리는 간담회를 외국 방문의 정식 일정에 포함하기로 했다. 

 간담회는 대개 그 나라 국영 방송국에서 생중계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든, 뭄바이에서든, 요하네스버그에서든 수많은 사람이 방송을 시청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국가수반이 시민들에게 직접 질문받는 광경을 참신하게 여겼고, 나는 어떤 강의보다 효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설파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해당국 주재 미국 대사관에 자문하여 소수 종교 신자, 소수민족, 난민, LGBTQ 학생 같은 소수집단의 젊은 운동가들을 간담회에 초청했다. 그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했다.

 간담회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개인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나를 웃게 했고 때로는 눈물을 쏟게 했다. 그들의 이상주의를 보면서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젊은 조직가와 자원봉사자들을 떠올렸다. 두려움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을 때 인종, 민족, 국가의 장벽을 넘어 공유되는 유대감을 떠올렸다. 간담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좌절하고 낙심했더라도 나올 때는 시원한 숲속 계곡에 몸을 담근 듯 재충전된 기분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이 지구 방방곡곡에 존재하는 한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p.577-578


정치인의 책, 정치인의 회고록. 나에게 없던 독서 목록에 새로운 장르가 추가된 건 오직 버락 오바마였기에 가능했다(미셸 오바마의 『비커밍』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간을 반가워하며 즐겁게 읽어가기 시작했지만 장르와 두께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900여 페이지의 이야기가 마냥 술술 읽히는 것도 아니지만 버락 오바마의 회고록에 대한 높을 수밖에 없는 기대치를 완벽히 부응하는 책이다. 정치인 회고록 장르의 애송이이다 보니 비교 대상이 없지만 이런 시선, 이런 통찰, 이런 서사는 오직 오바마만이 가능하다는 건 너무나도 명백하다.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오사마 빈 라덴 사살까지의 이야기를 『약속의 땅』에서 들려주고 이후의 이야기가 또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데 남은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나처럼(?) 단 한 명의 정치인 회고록을 읽는다면 당연 버락 오바마다. 일 년에 책 한 권 읽는 사람들에게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올해는 버락 오바마의 『약속의 땅』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통령 오바마만큼 작가 오바마도 너무나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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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인 사람 중 가장 외향적인 사람 - 까꿍TOON
최서연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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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인 사람 중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라니 너무나 내 이야기다. 제목만 봤을 뿐이지만 이미 공감 200%인데 거기에 귀여운 그림체까지 심히 내 스타일이다. 누가 봐도 이건 내 책인데 맙소사 작가가 무려 2000년생이다. 90년 대생들의 등장도 여전히 낯선데 2000년 대생이라니... 2000년생의 일상툰을 내가 공감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 공감보다 낯선 모습들에 괜히 나이 든 나를 마주하게 될까 봐 걱정이 밀려오지만 제목이 주는 공감과 기대가 훨씬 큰 탓에 금방 잊게 해주었다.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대학생활과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그림체만큼 사랑스럽게 펼쳐진다. 가족, 친구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 곳곳에서 현재의 트렌드가 보이고 시국이 보이고 작가의 눈부신 센스가 넘쳐난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에 절대 조용히 읽을 수 없는 독서를 경험하게 되는데 충격적일 만큼 어린 작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너무 어린 작가의 일상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이 든 나의 모습을 마주할까 봐 잠깐 했던 걱정은 2021년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실로 오랜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작가와 작품이 생겨서 기쁘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까꿍TOON의 다양한 굿즈를 기대하게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 책만큼 뒤표지의 추천사도 좋았는데 누구나 알만한 동료 작가나 출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아닌 작가의 이상을 함께하며 까꿍TOON에도 등장하는 작가의 엄마, 아빠, 친구의 응원과 추천사는 그 어떤 추천사보다 값지고 귀해 보인다. 사랑스러운 그림과 공감대 200%의 표지에서부터 남다른 추천사가 실린 뒤표지까지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다. 엄마의 추천사처럼 작가의 능청스러운 생각과 드립이 곳곳에 고스란히 녹아있는데 대책 없이 빠지는 것 외엔 달리 도리가 없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지는 만화를 만나 기쁜 마음도 오래간다. 소소한 일상을 짚어내고 남다른 재주와 센스로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까꿍 작가의 특별한 만화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 작가의 일상이 많은 경험들로 풍부해지길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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