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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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 가장 오랜 과거의 것이자 가장 먼 미래의 것이다. 이야기의 것이다.

제목이 『흑』이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던 건 한강 작가의 『흰』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와는 대비되기도 하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마침 두 소설이 난다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과 두 작가 모두 시집과 소설을 발표한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에서 자연스럽게 『흰』이 생각났지만 『재』라는 재목과 그 제목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표지 디자인은 『흰』과는 180도 다른 정반대의 이미지라 소설을 읽기도 전부터 많은 상상력을 불어 일으켰다.

 

 살아갈수록 우리의 우주는 점점 작아져서 한 채의 집이 되고 한 장의 명함이 되어버렸으니, 많이 살았다고 큰 생각을 갖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러니 저 우주 속에서 삶과 죽음의 비밀 가운데를 헤매는 자를 억지로 끌어내려 안일한 지상에 가둘 필요도 또 가둘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조금은 슬픈 느낌으로 하루를 사는 것처럼 사춘기의 그 자녀도 언젠가는 자신을 지나갔던 소중한 순간조차 잊을 날이 오겠지만, 잊어버린 순간이라고 해서 없어도 좋은 시절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시절은 제 몫을 다하며 지나간다. 그 앞에서 우리는 응원단원이 되거나 도리어 우리가 잊거나 놓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애써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p.101

 

내가 이 사랑에 더 성실했으니까, 괜찮아.

모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현재의 시점과 전 연인인 수와 관련된 과거의 회상, 고등학생 시절 모와 붙어 다녔던 과거의 기억이 교차하며 소설은 펼쳐진다. 서사보다는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게 만들며 몰입시키는데 촘촘한 문장들이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게 만들어준다. 수의 여러 재주 중의 하나는 감상적인 말을 오그라들거나 오버하는 느낌 없이 할 줄 안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신용목 작가에게도 유효한 것 같다. 문장들이 독자들을 찌른다. 철학책 속에서 만난 구절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문장들, 한 편의 시로 봐도 무방해 보이는 문장들이 모여 이야기가 이어지고 한 권의 소설이 되었다. '지극히 사적私的이면서도 더없이 시적詩的'이라는 띠지의 문구가 더없이 강렬하게 와닿는다. 소설은 물론이고 표지 디자인과 질감, 내부 레이아웃 디자인 등 책의 만듦새가 너무나도 훌륭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시간을 이기고 그 자리에 남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고학자가 된다. 시간과 함께 영영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이 된다. 시간은 그렇게 갈라지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사랑은 같은 자리에 없다. p.125

 

작가는 말이야. 관객이나 독자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관객이나 독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

『재』를 읽다 보면 작가를 향한 많은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아마 신용목 작가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틈틈이 쌓여진 각자의 질문들은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둘 것 같다. 그러니까 『재』의 독서는 질문들이 결을 이루고 그 결들이 겹을 이루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 시간을 이기고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을 사랑하게 된 독자들은 어느새 고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었다(소설 속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쓰니 오그라들고 만다). 한강 작가의 『흰』을 떠올리며 엉뚱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재』의 독서는 이런 소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잘 살린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보다는 <디 아워스>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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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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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은 '시 쓰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저를 소개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저는 단어 생활자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이 책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말의 최소 단위인 '단어'이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시 쓰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단어가 그저 단어가 아니라 저를 이루는 피와 살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한 단어에 대해 말하는 일은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요. p.6 「프롤로그 : 촛불을 들고 다가서면」


안희연 시인의 세 번째 산문집이 출간됐다. 『단어의 집』이란 제목을 듣자마자 안희연 시인의 작품집치고 제목이 밋밋한 것 같아 의아해하다가 제목을 통해 바로 짐작 가능한 작품의 소재, 분위기에 안희연 시인이 어떤 단어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모든 걸 짐작 가능하게 하고 많은 것들을 알려주는 것 같은 제목과 달리 길항, 규모, 적산온도, 주악, 삽수, 라페로 이어지는 목차를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야말로 알쏭달쏭하다.


 나의 책 읽기는 매번 이런 식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들을 붙들고 살다 보니 책이든 삶이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갈 리 없다. 소설을 읽을 땐 소설을 읽어야 하는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머무느라 방금 전까지 읽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소망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해 길항이라는 단어에까지 다다른 하루였으니 이를 생산적 난독이라 말해도 될까. p.18 「길항」




작가의 친필 사인 인쇄본엔 '각자의 단어로 각자의 속도로'라는 문구가 적혀있지만 일상 속에서 시선이 머무는 단어들을 채집하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안희연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과정은 마치 시인과 눈높이와 속도를 맞춰가는 과정 같았다. 현재의 일상을 엿보고 추억을 곱씹으면서 '단어 생활자' 안희연 시인은 45개의 단어들을 음미한다. '가장 비문학적인 단어들에서 가장 문학적인 순간을 길어 울'린다는 표현이 더없이 완벽하다. 대부분의 낯선 단어들이 좀처럼 눈에 익지 않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다정한 이야기들과 단정한 문장들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무엇보다 시를 특별히 어려워하는 독자가 시인이 가진 시를 향한, 문학에 관한 무수한 고민들을 산문의 곳곳에서 함께 마주하면서 안희연 시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시인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간 것 같았다.


 없음의 있음을 기약하며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시의 임무가 아닐까.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복숭아나 마 아닌 무엇이 언제 또 나의 손을 부풀게 할지 알 길 없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왔기 때문에 마를 만질 땐 꼭 장갑을 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오늘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 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p.196 「밀코메다」


『단어의 집』을 통해 안희연 시인의 단어들을, 안희연 시인의 단어들을 통해 시인의 일상과 삶을 향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단어에 관한 이야기들이 좋았고 안희연 시인이라서 좋았다. 다른 작가들의 단어의 집엔 어떤 단어들이 있을지 궁금해지고 앞으로 안희연 시인이 채워갈 단어들에 대한 궁금증도 더불어 커진다. 어떤 형태로든 이토록 멋진 기획의 책이 더 확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만들어주고 나의 단어들에 대해 고민하고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단어가, 각자의 속도가 있으니까. 



*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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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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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에서 깐죽거리는 말포이를 향해 헤르미온느는 "비열하고 악마 같은 바퀴벌레 새끼"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주먹을 날린다. 『소공녀』에서 사라와 베키는 바퀴벌레에 대해 질색을 한다. 심지어 사라는 쥐하고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바퀴벌레와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을 거라 말한다. 굳이 이런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인간들에게 바퀴벌레는 그 단어만 들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충분히 유해하고 끔찍한 존재라는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소식이 반가운 이언 매큐언의 신간 제목이 『바퀴벌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모티프로 한, 브렉시트 사태를 풍자한 소설이라고 한다. 역시 이언 매큐언이다. 읽기도 전부터 상당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p.13


마치 영화 <500일의 썸머>의 오프닝을 연상시키는 소설의 시작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완벽히 패러디한 첫 분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소설은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잠을 깼을 때 자신이 벌레로 변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레고르 잠자와 반대로 영국 수상으로 변신한 바퀴벌레 짐 샘스의 이야기를 통해 이언 매큐언은 작정하고 신랄하게 정치 풍자를 한다. 어떤 인물이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는 순간들을 소설 곳곳에서 만나게 되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뿐만 아니라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 유명한 고전 작품들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핵심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는 현시대에 이 작품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바퀴벌레』가 단순히 브렉시트 사태를, 영국 및 몇몇 국가의 특정 정치인만 저격하여 비판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공감과 이해로 쓸쓸함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변신』만큼 얇은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재치 넘치는 상상력과 함께 떠오르는 다른 작품들, 역사에 남을 현재의 정치인들, 여러모로 떠오르는 무수한 감정들이 그야말로 풍부한 작품이다.


 복잡한 첫날 일정이 끝난 후 총리는 관저 꼭대기층의 작은 거처로 물러나 트위터를 익히느라 분주했다. 그는 트위터가 페로몬적 무의식의 원시 형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치 터퍼의 최근 트윗을 읽자 어쩌면 미국 대통령도 '우리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화이트홀 IT팀에서 파견된 아첨꾼이 트위터 계정 만드는 걸 도와주었다. 총리는 두 시간 만에 팔로워 십오만 명을 확보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 수는 두 배로 늘었다. p.74


높은 기대치에도 값지게 부응하는, 역시 이언 매큐언 임을 증명하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좋았던 것 덕분에 혹여나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나 디테일 중 놓친 부분이 있어 작품을 100% 즐기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노파심이 생기기도 한다(그런 의미에서 영국 독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문화강국답게 영화와 소설 등 여러 작품들을 통해 우리나라 국회의사당만큼이나 친숙한 웨스터민스터궁을 배경으로 바퀴벌레를 통해 시계방향주의, 역방향주의에 관한 전혀 영리하지는 않지만 심오해지는 대화들을 따라 읽어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블랙코미디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국에서 2019년에 출간된 작품이 2021년 말에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면서 어쩌면 '우리 중 하나'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했던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의 재선 실패로 어느새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바퀴벌레』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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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
최현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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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해석보다 시를 읽어내는 일이 더 힘들 때가 많지만 시인들의 산문이나 에세이는 내가 선망하는 너무나 근사한 문장들의 집약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집을 많이 챙겨 읽지는 못하더라도 시인들이 쓴 에세이나 산문은 일을 삼고 챙겨읽는 편이다. 최현우 시인의 첫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당신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 역시 그러한 이유로 관심을 가지고 챙겨보기 시작했다. 제목과 표지부터 시집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궁금했는데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에 불을 지른 건 김금희 소설가의 인스타그램 추천 글이었다. '시인을 닮아 멋지고 단단한 책'이라는 문장은 책은 물론이고 최현우 시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지금 바로 읽어야 하는 책이 되어 주었다.


 한없이 함께 있고, 함께 웃고, 기억을 떼어 나누던 사람이 내가 감지할 수 없는 장소에서 나의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다닐 때. 그에게 내가 고작 그런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믿었던 이의 이면을 알게 되고, 그것에 실망하고. 이런 일들은 너무나 상습적이고 별반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으레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안다. 나의 병이 거기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나의 삶 깊숙한 곳에 자리를 주었던 사람을 다시 도려내는 일은 나의 일부를 함께 도려내는 일이었을까. 나의 절연은, 내가 지불했던 믿음이 턱없이 모자라서 몸의 고통까지 끌어다가 인연의 값을 갚고 있는 걸까. p.27





본격적으로 본문을 읽기 전, 작가의 말만 읽어도 이 책이 얼마나 밀도가 큰 책인지 알 수 있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예민하고 예리한 통찰력이 문장에서 보이고 읽힌다. 최현우 시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다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내는 버전이 다른 사람 같다. 김금희 소설가의 '불행과 슬픔에 대한 섬세한 탐색자'라는 표현이 더없이 탁월하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을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다가 너무 빈번하게 만나게 되는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을 보면서 책에 밑줄을 긋는 일이 크게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만큼 놓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이 소중해진다.


 나는 저마다의 삶이 결국 각자의 몫이라는 게 자주 무섭다. 거리를 지나다가 지나치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크고 작은 희망과 절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경이롭고 두렵다. 가끔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견디셨죠? 네 탓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자주 무섭고 가끔 행복한 지금이, 나는, 괜찮은 걸까요? p.61




나는 감히 흉내 내기조차 하지 못하는 문장들을 따라 읽어갔지만 청소년기를 지나왔고 시인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시인의 문장이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페이지터너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감정의 선을 따라 깊게 이입하게 되어 작품을 읽기 전부터 나름의 각오와 준비가 필요한 작품이 있다. 후자의 경우 몇몇 작가들의 소설이 그러했는데 최현우 시인의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 역시 소설을 빠져 읽듯 감정선을 따라 깊게 이입하며 읽어가게 해주었다. 비슷한 또래의 여성작가들을 통해 받았던 위로와 공감을 받아 놀라기도 했고 나쁜 편견을 깨뜨려 좋은 기분이 밀려오기도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을 믿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우리는, 시가 있는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작고 짧고 낮고 깊게. 꼭 불행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불행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고, 삶을 조금은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이 여기서부터 조금 더 멀리 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63


최현우 시인은 작은 것들을 자세히 보는 사람 같다. 그의 시선을 통해 그동안 그냥 지나치며 살았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고 모르며 살았던 감정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쉽게 엄두는 안 나지만 그가 쓰는 시들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덕분에 나의 삶도 여기서부터 조금 더 멀리 가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것이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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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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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이름은 '무하 스타일'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올봄 정우철 작가의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통해 알폰스 무하를 처음 알게 되었다. 세상 모두가 다 알고 너무나 유명한 화가인데 나만 모르고 살았던 덕분에 뒤늦게 그의 삶과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모르고 놓쳐버린 그의 전시회를 안타까워하며 요란한 뒷북을 치고 있는 중이다. 알폰스 무하를 알게 된 지 6개월도 안됐는데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큼 나에게 알폰스 무하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뒤늦은 관심에 응답이라도 받은 듯 알폰스 무하의 생애와 작품들을 제대로 다뤄주는 아트북이 출간됐다. 판형부터 압도적이다.




예술이라는 주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가들이 확립한 신화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무하는 예술에 대한 전통적 의인화를 현대화했다.

영화적 서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순탄하지 않았던 삶과 그럼에도 그의 화풍만큼 화려한 성공을 이끌어낸 그의 생애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어가는 것처럼 흡인력 있게 읽힌다. 지금의 알폰스 무하를 있게 해준 <지스몽다> 포스터가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와 포스터가 도난당하는 일이 속출했다는 후일담은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임에도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마치 지난 6개월 동안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며 조금씩 찾아봤던 알폰스 무하가 어린이 문고판 버전이라면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를 통해 제대로 된 세계문학 전집을 읽어낸 것 같다. 알폰스 무하의 삶과 작품들, 그의 화풍과 그가 살았던 시대와 역사가 압도적인 판형의 책 안에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다. 




무하는 운명을 믿었다. 그는 세 차례의 중대한 운명과도 같은 기회를 통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어떤 예술가는 인정받기 위해 일생을 기다리지만 결국 사후에 명예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무하는 살아 있는 동안 명성을 얻었고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무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른다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가 살아간 삶의 여정에도 때로는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성공을 얻었고, 영예가 찾아왔을 때 최대한 누릴 수 있었다. 무하는 이목을 끌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오랫동안 충실히 작품 활동에 임했고, 그 모든 결과물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무하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파리에서 명성을 얻었고, 뉴욕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으며,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p.87


무하는 예술이 사람들의 이해를 높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도와야 한다고 믿었고, 주기도문을 삽화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믿음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는 체코 출신의 화가가 유럽 일대와 미국으로 무대를 옮기며 작품 활동을 하고 무일푼의 학생이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고 체코의 국민 화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보고 그의 무수한 작품들과 화풍, 작업 방식을 깊이 있게 다루는 유일무이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한 판형에 집에서만 봐야 할 책이라 생각하고 외출 때 챙겨 나가는 건 상상도 안 했는데 외출하는 몇 시간의 공백을 못 견딜 것 같아서, 예쁘게 물든 단풍 색깔과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이 너무 잘 어울려서 이 무거운 책을 기꺼이 들고 외출을 두 번이나 하기도 했다. 올 초만 해도 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알폰스 무하는 내가 제일 잘 아는 화가가 되어 있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수천 년에 걸친 슬라브족의 역사를 다루고, 각각의 그림은 신화적 과거뿐만 아니라 희망찬 미래를 아우르며 기념비적 사선을 기록했다.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를 읽고 가장 큰 후유증은 그의 작품을 실컷, 자세히 보았음에도 전시회에 대한 갈망이 무척이나 크다는 것이다. 전시회가 가고 싶고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유럽 여행이 가고 싶다. 알폰스 무하를 알고 나니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이, 그의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온다. 지난 6개월 동안 알폰스 무하에 관한 책이 몇 권이나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알폰스 무하의, 알폰스 무하에 의한, 알폰스 무하를 위한 책을 소개한다면 자신 있게 권할 단 한 권의 책,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이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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