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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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에서 깐죽거리는 말포이를 향해 헤르미온느는 "비열하고 악마 같은 바퀴벌레 새끼"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주먹을 날린다. 『소공녀』에서 사라와 베키는 바퀴벌레에 대해 질색을 한다. 심지어 사라는 쥐하고는 친구가 될 수 있지만 바퀴벌레와는 도저히 친해질 수 없을 거라 말한다. 굳이 이런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인간들에게 바퀴벌레는 그 단어만 들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충분히 유해하고 끔찍한 존재라는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소식이 반가운 이언 매큐언의 신간 제목이 『바퀴벌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모티프로 한, 브렉시트 사태를 풍자한 소설이라고 한다. 역시 이언 매큐언이다. 읽기도 전부터 상당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p.13


마치 영화 <500일의 썸머>의 오프닝을 연상시키는 소설의 시작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완벽히 패러디한 첫 분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소설은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잠을 깼을 때 자신이 벌레로 변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레고르 잠자와 반대로 영국 수상으로 변신한 바퀴벌레 짐 샘스의 이야기를 통해 이언 매큐언은 작정하고 신랄하게 정치 풍자를 한다. 어떤 인물이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는 순간들을 소설 곳곳에서 만나게 되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뿐만 아니라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 유명한 고전 작품들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핵심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는 현시대에 이 작품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바퀴벌레』가 단순히 브렉시트 사태를, 영국 및 몇몇 국가의 특정 정치인만 저격하여 비판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공감과 이해로 쓸쓸함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변신』만큼 얇은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재치 넘치는 상상력과 함께 떠오르는 다른 작품들, 역사에 남을 현재의 정치인들, 여러모로 떠오르는 무수한 감정들이 그야말로 풍부한 작품이다.


 복잡한 첫날 일정이 끝난 후 총리는 관저 꼭대기층의 작은 거처로 물러나 트위터를 익히느라 분주했다. 그는 트위터가 페로몬적 무의식의 원시 형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치 터퍼의 최근 트윗을 읽자 어쩌면 미국 대통령도 '우리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화이트홀 IT팀에서 파견된 아첨꾼이 트위터 계정 만드는 걸 도와주었다. 총리는 두 시간 만에 팔로워 십오만 명을 확보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그 수는 두 배로 늘었다. p.74


높은 기대치에도 값지게 부응하는, 역시 이언 매큐언 임을 증명하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좋았던 것 덕분에 혹여나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나 디테일 중 놓친 부분이 있어 작품을 100% 즐기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닌지 노파심이 생기기도 한다(그런 의미에서 영국 독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문화강국답게 영화와 소설 등 여러 작품들을 통해 우리나라 국회의사당만큼이나 친숙한 웨스터민스터궁을 배경으로 바퀴벌레를 통해 시계방향주의, 역방향주의에 관한 전혀 영리하지는 않지만 심오해지는 대화들을 따라 읽어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블랙코미디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국에서 2019년에 출간된 작품이 2021년 말에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면서 어쩌면 '우리 중 하나'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했던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의 재선 실패로 어느새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바퀴벌레』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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