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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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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에 갇힌‘ 형편이라면, 이 자본제(capitalism) 내에서의 성취를 온전히 제 힘으로만 일굴 수 있다든지 이뤘노라 여김일 테다.
그림자로 배후로 미루고 젖히며 이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데 다가가 보고 들어 알리는 데 주저함 없는, 거기 있는 이와 사람으로 동지되는데 ‘갇힐‘ 리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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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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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는 만큼 누구든, 하루 아니 반나절이면 읽어내릴 법.

한편 독후 아니 읽는 중에도 계속해서 이는 상념들.

때문에 나로서는 이러하다든지 저러하다든지 모두 예단이요 속단이어서 어느 편으로든 벗어나는 것만 같아 무어라 이르는게 버겁기만 하다.

버거움이라 표하였지만 그렇게 간단히 갈음될 수 없는 곤란이랄지, 하는 심경을 어디에든 부려놓고파 남긴다.

그뿐이다.

─────

'해방'과 '일지'는 과연 어울리는가. 치 떨리는 상태를 현실로 마주한 채 몸서리치면서도 버티며 살겠다고 살아보자고 몸부림인 하루가 고스란히 담기고 쌓이는 한해서 '해방'을 감(感)으로 맛보는 순간 또한 있을테니 이러한 면으로는 어울린다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제각각, 현실로 맞닥뜨리는 상태를 불화(不和)에서 화해(和解)라는 식으로 말처럼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물론 이러한 개별성을, 이입 가능한 보편으로써 마련해둔 이야기 등은 그래서 '좋은'이라는 수사를 취하기도 할 테다. 말하자면 개연성. 그런 한편 바로 그 때문에 아편일 수 있겠다 싶기도. 어찌 되었든 화해(가능성)를 희망하는 한해서,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복무(혹은 종속) 또한 견딜만 한 것으로 화(化)하니 만큼.

불화라고는 했지만 이같은 수사로 재단은 쉬워도, 배경에 자리한 서사는 그렇지 않다/ 아니 낱낱의 서사는 그리 될 수 없다라고 생각하다, 어쩌면 그럴 수 있겠다라고 생각. 뭉뚱그린다라는 표현을 앞세우면 어딘가 불편하고 나아가 발끈할 만큼 유별난 특색을 강조도 하지만 그런 한편, 소위 평범치라는 무탈(無頉)을, 바라는 이상(理想)으로 꼽으니 또한 '민중'인 만큼. 그러니 헉슬리가 일렀다는 말처럼, '아편'을 '종교' 삼는 '민중'?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은 한다.

다만 카타르시스라는, 잠시 잠깐의 배설로 취하는 '화해'와 같은 느낌을, 과연 화해라 할 수 있는지. 애초에 독후 활동은 느낀 바를, 딛고 선 자기 자리로 끌어다 길을 내는 데서 사람은, 생각하는 종(種)의 달란트를 가치로 실현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면, 현실과 유리된 무대의 품(品)으로 제작, 소비하는 데서만 취해 들일 수 있는 걸 화해(기타 등등)이라 이르긴 어려울 성싶은데.. 나아가 부(富)로 수렴하는 입신양명 서사를 고스란히 빼박은 채로 쓰기를, 아니 쓰기를 통해, 쓰는 것으로, 실천한다는 '민중'은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혈육을 등지다시피 하면서까지, 혈연서사를 뒤로 하고 신념 관철하기를 그야말로 헌신(獻身)하다시피 한, 소설 속 아버지 '고상욱' 같은 인물에 가까울수록 '오죽하면'으로 품을 듯싶긴 하다. 결국 '여북하면'의 역치를, 남다른 경험 통해 범인(凡人) 수준을 초월해야 겨우 태도로 취하는 게 가능한 경지의 일종일지. 그도 아니면 세파에 깎이다 못해 부러지거나 송두리째 뽑힌 채 부유할 뿐인 이의 체념을 바탕삼은 마지못한 수긍 같은 것일지. '자기 소외'를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1인 무대로 뒤덮이는 세계야말로 진행 중인 '시뮬라시옹'. 어쩌면 무대로 올려 조명하는 작품 속 현실이야말로 엄연한 현실로 여전히 자리해 있으니, 그와의 간격 그러니까 괴리 넓히는 걸, 총체로 아울러 현실이라 이르니 아무래도 나는 죽는 날까지 화해하긴 그른 듯싶다.

물론 이러한 태도(?)야말로 당장을 직시 않고 구별지은 이상에 목매는 낡은 사고랄 수 있지만. 만일 이를 짚을 요량이면, 호오(好惡)를 양극으로 찢어놓듯 구분하여 취하는 태도를 서슴지 않는 자기 면면을 우선 돌아볼 법. 말처럼 성행하는 반성이니 성찰이니 제대로 작동한다면, 자본이 구별짓는 미추(美醜)에서 미(美)만 쏙쏙 골라뽑아 소비로 취해들인 순간을 일상으로 전시하는 삶을 부러워하고 추구하지는 않을 터인데 소위 SNS로 보이는 상은 그렇지도 않은 듯. 네트워킹으로 이룬 소셜의 상이라는 게 죄다 욕구 충족을 이상적인 행복으로 전제하니, 시간을 앗는 것으로 현실을 옥죄는 화폐 서사야말로 종국에까지 지속 가능하지 싶긴하다.

'해방'과 어울리는 '일지'.. 생각 거듭할수록 떠오르느니 장용학 『요한 시집』 가운데 한 구절, '다른 데를 열심히 산다' 뿐.

정치가 실종 지경이라는 토로가 곳곳에서 불거지는 이즈음. 그러나 이를 포착, 그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을 기획하는 언어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운 듯싶다. 무엇보다 실종 지경이라는 그 정치판에선 정말이지.. 도리어 빚느니 혼란이요, 하여 점입-가관이랄지. 지지자든 꾼이든 입장은, 평소 사안 별 사유로 벼리고 다진 견해를 받침 삼아 취하게 되는 것일 텐데. 입장을 소속처럼 앞세우는 정서에 과연 이러한 게 따르는지부터 의문.

화해라는 표현이 현실로 자리하는데 필히 수반되는 지난한 과정. 이를 '항꾼에'로 임해야 겨우 가능할 테지만 그와는 동떨어진 상태로, 쓰고 말하는 이로써 자기 자리 마련/지위 확보하려는 데로 뭐랄까 독서 관련 활동마저 왜곡되는 듯도 하다. 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곡학아세 아닌가 싶어 개탄스럽지만 그런 한편 우연한 결과로 응집, 세포 분열 끝에 자리한 생물-종(種)으로서 그 '민중' 낱낱 갑남을녀를 떠올리면 무리도 아니다 싶고 나아가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그렇다. 이렇게 보아야 마땅한 것인지 어떤지. 이를 태도로 취할 수 있을 때에나 참 유물론자-됨인지..

그러나 일천한 배움으로 약간 깨우치는 것도 같은 느낌을 간직하는 머리로는, 아무래도 태생부터 우연을 숙명으로 그러안았으나, 제 레종-데뜨르를 후천으로 구축하니 또한 아니 참으로 사람 아닌가 한다. 그러니 사람[人] 미만/언저리 존재로 나서는 사이[間]를, 어떻게 사는가로써 겨우 사람으로 매듭짓고[成人] 가는게 아닌가 싶은데..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라는 말을 앞세워봐야 각자도생의 이전투구 장(場)이 절로 탈바꿈되는 것도 아닌 마당에야.. 당초 '모르는' 자기 상태를 직시함이 우선이라는 레거시 명제부터 거듭 장전하는 편이 그래도 나은 결과를 구축/조형하지 싶고. 그러자면 역시 제 이름 앞세워 말하고 쓰는 것으로 추수에 혈안인 건 아닌지 돌아보고, 마부작침의 끈기로 언어를 촌철의 마디로 벼리어두는 데 힘쓸 요량이다 싶고 그렇다. 그래야 시의적절/적재적소에 쓰여 활인(活人) 기능으로 역할 수행, 하지 않겠나. 개개의 민중이 바뀌는 데에야 사회 또한 바뀌지 않을 도리 없을 테고..

─────

IMF 이후 『가시고기』 등장에서처럼, 묘하게 아버지 상을 소환도 하는데 아마도 기대어도 좋을 항시 지탱하는 버팀목을 그리기 때문이지 싶다. 때문에 제각각의 경험에서, 혈연서사에 충실한 울타리로서 (일본서 습관적으로 쓰이는 표현처럼) '등으로 말하는' 가부장(또는 가모장)을 향수하는 듯도 하고. 그러나 그렇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 얽듯' 유야무야 흩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일 테다. 혈육 특히 자녀 양육 위해 알고도 모르고도 저지르니 협잡이요, 무언으로 가담한 공모이자, 그로써 이루니 침묵의 카르텔이기도 할 터. 빌미 삼을 구석을 내어주는 걸 어떤 인간미로 치환할 수 있는지. 이를 바탕으로 승화하니 화해일 수 있는지.. 읽고 난 이들이 떠올리며 등치시키는 상은, 정말 굳은 신념으로 살아내는 속에서 다시금 재현실의 면면 가운데 지속가능한 운동의 방법을 고민하며 실천한 소설 속 아버지와 같은지 어떤지. 또 화자 등과 자신은 얼마나 가까운지 여부부터 살피는 게 어떨까 싶기도. 어쩌면 당장 목전(目前)의 '서까래에 매단 마늘 반접'을 탐하는 '민중'의 일원으로 욕구를 우선하며 충실할 뿐인 건 아닌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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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이춘수 외 지음, 강맑실 엮음 / 사계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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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문 살피며 책이 꾸려진 계기를 가늠해봅니다.

'5월에서 8월까지 저자와의 만남을 신청한 동네책방은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사계절 출판사 공문에 응한 곳, 그렇군요. 그를 중심으로 출판사 대표분과 만남 통해 책이 탄생한 듯싶군요. 들추어 잠시 훑은 바로 들어본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고. 들고 나길 거듭하는 업계인 만큼 당연하다 싶습니다. 하기야 안다는 것도 이름을 들어 안다는 것이지, 관내 지근거리도 아니고 대체로 마주한 적 없는 곳이니 실상은 모른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겠어요.


전부 읽은 것도 아니니 뭐라 이르긴 어려우나 '가장'이라는 수사로 꾸밈이 가능한가, 어차피 꾸릴 책이면 단정이 아니라 의문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매일 도처에서 서로 간 부대끼는 속에서 크고 작은 악전(惡戰) 빚으니 이를 일러 일상(日常). 세간(世間)의 실상이 이러하니 따지고 보면 죄다 저마다 딛고 선 바로 그 자리에서 분투(奮鬪)하는 고군(孤軍). 체계를 수긍, 솟는 의문을 도외시 하면서 '자기 소외'를 내면화하니 이미 '인격화된 자본'. 물화(物化)로 격하된 인격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자본 소유에의 의지'인 만큼 당장의 자본 소유 여부로 구별짓는 건 무의미할 테고. 분열된 자아상이 고스란히 투영되니 체계는 고착, 전장(戰場)으로써의 일터와 휴식 취하는 공간 구별. 이러한 분리에 의문 부호 하나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로 자발적이라 여기니, 갈급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하는 소비 활동을 거창하게 '노마드'라 칭하고. 공간을 비롯하여 새로움만 추구, 사냥하듯 쫓으며 SNS 전시해봐야 잦아들긴커녕 더욱 커지니 덧없음. 이를 실감하면서도 불분명하니 다시금 새로움을 사냥하는 소비 연속. 애당초 여읜 자족(自足) 임을 모르고서 만족(滿足) 만을 추구하니 곤고한 삶이요, 피폐해지는 영혼. 이게 '중독'이 아니면 무엇인가. 마치 개신교 성경에 언급된 사마리아 여인처럼, 갈급함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 연속하던.


세간의 사정과 형편이 이러하건만, 왜/어째서로 옮아가지 못하는 시선이야말로 문제이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해서 어느 곳을 특정하여 마치 그곳에만 이를 테면 이 '서점/책방'이라는 곳에만 '문화'를 비롯하여 '낭만'이니 '아름다움' 등등 갖가지 수사가 가리키는 바가 고인다 여기는 자체가 허위의식 아니겠나 싶고요. 나아가 이를 자처하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지경되는 게 아닌가 싶을 따름입니다.

'눈 밝은 독자'라는 표현처럼, 작자는 물론 출판계 또 출판물 유통하는 서점 업계에 드는 치들은 바로 이 '눈 밝은 독자'에서 전화되지 않나 싶습니다. 자본 수익 환원은 물론이거니와 입신양명 서사와도 거리두면서까지 덕업일치의 궤에 오르는 자체가 애당초 그야말로, 도처의 비명인 세음(世音)에서 눈 돌리지 못하고 자꾸 보게[觀] 된 때문 아닌지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고 들어 아는 것만으로 요원하던 실천을, 당장 소수로 배제되기 일쑤인 이웃과 자기 안의 그 어떤 소수성(少數性)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감수성'으로 해서 동기화 되니 자연스레 옮아가지 않냐는 겁니다. '눈 밝'다는 표현은 이처럼 관(觀)-세음(世音)의 보살행과 맞닿아 있지 않습니까? 설법(說法)을 담는 그릇으로 글에, 눈이 익은 이들이라면 자연 이리 되지 않나요? 하면 계속해서 분리를 낳고 조장하며 기어코 양극으로 가르고 찢어놓는 체계와 그 체계를 확대재생산하는 문법과 방식을 그대로 아무 생각없이 따르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물론 '악전고투'로 '아름다움'을 영예로 취할 수 있겠으나 그러자면 더더욱 (누가 되었든 간에) '표리부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겁니다.



인천에서 사각공간(思覺空間)이라는 서점을 5년 째 운영 중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훑었을 뿐 제대로 살핀 바 없으나 다만 한 곳, 눈에 드니 '북극서점'. 구립도서관에서 마련하는 '서점 간담회' 비롯하여 이런저런 기회로 몇 차례 마주한 적 있어 유일하게 읽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내 마주하여 겪어본 바와 책 본문 내용에서 내비치는 모습 간 차이가 너무 커서 괴리라 해도 과언 아닌 느낌. 오해여서 불식됨이 아니라 외려 일었던 의구심 더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넘기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지 싶어 겪은 바를 바탕으로 남겨봅니다. 소위 '객관', 빌고픈 심경 없지 않으나 딱히 기대는 않습니다.

  1. [부평구문화재단] 관내 문화공간 등을 '명소'로 소개하는 책자 제작 관련 ─ 2018년 4월 개점 후 부러 나서서 개점 사실 광고에 힘을 쏟던 그렇지 않던 홍보, 특히 외부 기관 등에서 먼저 알아보아주는 것처럼 반갑고 고마운 일도 없을 겁니다. 다음해인 '19년도 2월께였지 싶습니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문화공간 등을 '명소'로 소개하는 책자를 제작하기 한 듯싶었어요. 관내 공간 취재부터 글로 다듬어 앉히는 편집까지를, 기존 그러니까 먼저 자리해있던 문화기획자를 표방하는 등 관련 여러분께 맡긴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각공간 취재는 북극서점 대표분이 맡았고. 사전, 직접 통화 후 일정 픽스. 그런데 픽스했던 일정 해당 시각에 오질 않으니 전화만 세 번, 문자를 해도 답 없는 상태로 흐르길 2,30여분. 이때가 공간주로는 첫 대면(서점 차리기 전 수 차례 방문, 책도 사고 스티커 등 얻기도 해서 나름 호의를 품고 있었음)인데 그러고보니 이날부터 이후 '서점 간담회' 등 나는 '북극서점' 대표분이 단 한 번을 제 시간에 자리한 모습, 보지 못했군요. 왜 어떻게 늦었는지 사과는 없었습니다. 크게 중한 일 아니니 나로서도 넘겼고. 그런데 본격 인터뷰 전 '꼭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광고도 나서서 발로 뛸 판에, 들어온 홍보 기회를 내가 나서서 걷어치울 이유, 없지요. '아닙니다, 해야지요' 했습니다. 이날 저 '베드로'도 아니고, '인터뷰, 꼭 하지 않아도 된다' 세 번을 거듭하는 만류(?)에 '아니 제가 왜요;; 안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역시 세 번을 부인하면서 하겠노라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뜸 첫 질문이 '대형서점에서 일하다 어떻게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가?'였는데 나로서는 당시 누구에게 떠든 바 없고 떠들 생각도 없었기에(관에 계신 여러 선생님 말고는, 여타 독자분께 떠들 만한 배경도 아니거니와, 그쪽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며 꾸려보자 나선 것이니 더더욱 함구할 생각이었으니) 좀 놀랐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떠올리다 아마, 서점전수조사 후 직접 찾아주셨던 구립도서관 사서 선생님 통해 이야기가 된 것일지 모르겠단 나름의 짐작으로 넘겼지요(후에 미루어 짐작컨대 전화번호 레터링 서비스에 등록해둔 걸 내 잊고 삭제하지 않은 때문에 알게 되었나 싶긴 했고). 그래서 설명은 하되 '오프 더 레코드' 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후 책이 되어 나온 내용 살피니, 버젓이 올라 있는 겁니다. 그것도 도입, 첫 문단에. 의아했습니다(후술하겠지만 이 책을 받아들기까지도 매끄럽지 않았고). 이후 인터뷰 잇는 데, 이름짓게 된 연유부터 자리하게 된 배경을 계속해서 설명하려니 중간에 끊고는 저가 염두에 둔 콘셉이 아니랍니다.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의 사실 관계 확인 비롯하여 듣기 전부터 재단을??', 당황스러웠습니다. 딱히 중언부언 내용도 아닌 데다 '명소' 이전에 자리한 공간 나름의 색은 정체성으로 분명하게 전해져야 마땅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닐며 들르는 여행이 콘셉'이라면서 자르니 지금 떠올려도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각이 그저 네모로 각진 사각(四角)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思)+각(覺)의 조합으로 확장을 뜻하는 데 이게 중한 데 이것이 정체성 이루는 핵심이건만 이를 빼고서 전하겠다? 그걸 왜 자기 눈높이에서 마음대로 마름질하는가. 왜 '인터뷰,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거듭하여 일렀나. 이것이 공간주로 처음 대면 후 인 내 첫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도 인터뷰 마치는 순간까지 공공기관 납품 관련 당면한 현실과 필요성에까지 언급하였습니다. 했더니 '자신은 모르는 일'로 간단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저야 이쪽에서 밥을 빌어 온 터이고 제쪽에서 보면 이런 사정에 전무한 신생이야말로 '북극서점'이니.

  2. 제작 후 보내주겠다는 책자가 두어 달이 지나도록 닿질 않던 차. 마침 해당 문화재단에서 마련하는 <브런치 콘서트> 담당 선생님께서 임시 가판 두어 동네에 서점이 자리해 있음을 알리는 게 어떻겠는가 제안 주셨습니다. 역시 마다할 이유 없으니 흔쾌히 아니 이렇게 살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지요. 4월부터 6월까지 섭외된 관내 서점/책방이 콘서트 관람 주민과 마주할 기회. 당시 4월 첫 콘서트 자리가 '북극서점'(당시 선생님께서 어느 때가 괜찮은가 묻기에 이렇게 자리 마련해주시는 것만도 고마우니 편하신 대로 말씀달라 했었고. 일자를 주장한 편을 우선 배정하였지 싶으나 이건 문제 아니니). 예의 그 '명소' 소개 제작 책자 진척도 문의할 겸 가판은 어디서 어떻게, 또 실제 주민과는 어찌 마주하게 되는가도 살필 겸 해서 '북극서점' 나오는 4월에 문화재단 공연장 찾았습니다. 당시 대표분이 팔을 크게 흔들며 내 상완 부위를 툭툭 치며 세상 반가운 것처럼 맞아들이긴 했는데 '인터뷰, 하지 않아도 된다'를 세 번 거듭 이르던 때의 느낌과 너무 달라 어떤 위화감에 사로잡히긴 했어요. 어리둥절한 대로 그저 나도 웃으며 예의 그 책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책 마치고 이미 전했다고;; 아직 못 받았는가 하면서 담당 선생님께 확인해주겠다 하기에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직접 통화하지요 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가판 신경쓰고 바쁠 터인데 이런 건 제가 직접 통화해도 되는 것이니까요. 담당 선생님과 통화하니 잊은 건 아니고 전해야지 하다 놓치신 것 같더군요. 그래 내 오늘 왔으니 받아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고 살피니 앞서 언급한 바대로 '오프 더 레코도'해줄 것을 당부드렸던 내용이 떡하니 자릴 차지하고 있더군요;;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수긍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심야책방 등 모임은 물론 오시는 분들과 무슨 말이라도 나눌라 치면 스스럼없이 이야기, 내쪽에서 꺼내들긴 했어요.

  3. 그럴 수 있지 했습니다. 처음 인터뷰(?) 이후 녹취본 공유 부탁, 받아보니 그 부분은 없었으니. 복기하며 잊었나 보다 했어요. 그리고 6월 <브런치 콘서트>를 앞두고. 담당 선생님께서, 사전 섭외가 되었든가 아니면 섭외가 되지 않았든가, 아무튼 서점이 자리하지 못하니 4월, 5월 진행하셨던 '북극서점'과 '사각공간'이 함께 자리하면 어떻겠나 하셨지요. 역시 마다할 이유 없지요. 아니 외려 어떻게 해서든 지역민과 마주할 기회라면 부러 나서서 마련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할애된 기회를 저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나름 신생인데. '고맙습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드니 비보;; '북극서점'에서 마다해서 어렵게 되었다고. 나름의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 조심스레 여쭈었습니다. 혹시 '어떤 사정으로 못하겠노라 하든가요?'라고. 그랬더니 '콘셉이 달라서'라는 말씀 전해듣고는, 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한 2초 멍~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역민과 만날 기회로 보면 목마른 형편이긴 오십 보 백 보일 터인 데. 콘셉이 같아 겹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게 왜 문제가 될까요? 동일한 의문을 떠올리며 그대로 선생님께 딱히 묻는 것도 아닌 말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되더군요. 당시 담당 선생님께서도 듣고 그냥 웃으시더라고요. 이러니 좀 4월 맞이하듯 반겨 맞는 듯한 태도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괜한 건 아니었구나 했습니다. 이상하더군요. 인터뷰 당시 첫 질문, 그래서 '오프 더 레코드' 당부에 따라 녹취도 하지 않은 내용을, 떠올려 글 첫머리에 남긴 것이나 하지 않아도 된다 강조(세 번 거듭하니 강요처럼 느끼기도 했고)한 것도. 뭔지 모르게 석연찮은 느낌. 사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대단한 잘못씩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는 게 외려 과한 처사일 겁니다. 문제삼을 정도의 일은 아니죠.

  4. 사실 서점 오픈 후 얼마되지 않은 때 <휘파람 마켓>이라고 이 '북극서점'이 소위 기획하여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마련한 행사가 있었지요. 지척인데 열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2018.5.26.이군요. 생긴지 한달 남짓 신생인 '사각공간'이 참가할 수야 없지요. 사전 신청 등 이미 받아두었을 테고(빠져서 섭하거나 삐친 거 아니니 오해 마시고요). 전 다만 우리 '사각공간'에서 들였던 독립출판물 작가분도 참가함을 알고 조용히 가서 직접 추가 매입해왔습니다. 그런데 가서, 해당 작가분 찾는 동안 잠시 둘러보니 셀러로 참가한 몇몇 삼삼오오 무리지어 볼맨 소리를 하는 걸 뜻 아니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POP!!으로 UP!!되는 페스티벌을 기대하고 참가한 분들이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쉽지 않지요;; 주최하는 편도 참가한 편도 모두 이해하는 한편, 저는 저대로 다만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를 다시금 새기는 계기였지요. 저자도, 독자도, 서점원도 아니하는 것보다 그래도 낫지 않는가 해서 마련하는, 불가피한 사인회 같은 자리는 제발 말자는. 나아가 1:多 구도, 다수를 갤러리&들러리로 결국 저와 제 경력/이력을 비롯하여 브랜드고 뭐고 간에 자기 중심 지형 만을 돋우는 따위는 애저녘에 말자 하고. 이건 아니다 싶거든요. 이를 제게 가르치고 가늠할 향방 가리킨 게 다름 아닌 책이고. 현업 종사 당시부터 거듭한 고민, 이를 우린 끝에 겨우 가까스로 닿은 형편. 그러나 바람직하다 싶은, 지금 필요한, 옳은 바이기에 '박리(博利)'여서 '다매(多賣)'하지 않고는 생존 곤란한 업(業)에 임하면서도 외려 '사즉생(死即生)'이면 '궁즉통(窮即通)'이려니 꾸릴 힘으로 화(化)한 것이고요. 때문에 지원 사업 비롯하여 국민 세금 소위 혈세를 지원받는 입장으로 제공해 마땅한 가치에 우선하여야지 사업 영위 위해, 뒤로 수익을 타산하면서 겉으로 문화~ 접근은 아니라 수차례 언급하였던 것이고요. 이를 '19년 11월께부터 다음 <브런치>에도 남기기 시작했으나 그보다 오래 전 모 서점 종사 당시 '마케팅 게시판'에 읽은 책 내용을 병기하며 서점이라면 서점인이라면 좀 이러저러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저러 했음 한다 남겨두기도 했고. '라떼는 말이야' 되는 듯싶어 이만 줄입니다만 아무튼. 그런데 앞서 인터뷰 당시 납품 관련 문제나 그래서 필요함을 역설하는 데에 '모르겠노라' 이르던 '북극서점'주의 변천이라 해도 좋을 변화(?), 하도 기가 막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저로서는. 페스티벌도 그렇거니와 '연수구책축제' 때도 마련된 무대에 나와 앉아 기타를 손수 치면서 노래를 읊조리는 모습까지. 그에는 하나같이 나/자기/자신으로 세간의 이목을 그러모아 추수하려는 열망에 남다르게 열띤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만. 앞서처럼 한창 서점의 책무를 강조하니 언젠가부터는 난데없이 '독립출판 스테이션'을, 제가 주도하겠다는 식으로 던지더니 작년 말께 '서점 간담회' 자리에선 이 모든 고민을 홀로 깊이 안은 끝에 낸 답인 것처럼 문화를 제공하기에 지원을 받는 것이라며 기성 서점 한 곳 대표분에게 웅변. 내 늘 이르던 말이요, 남겼던 글이 남의 입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바를 목도하니 기도 안 차긴 하더군요. 그냥 웃으며 지켜봤습니다.

  5.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럴 정도로 고민 깊었다면 모를 리 없는 '도서정가제'와 그 안착에까지의 배경이나 왜 들어서게 되었는지 연유 등등. 그렇게 열변 토하더니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의 그 매입율 낮은 '온라인 서점 알X딘'을 이용하면 좋다면서 구체적인 요율까지 언급하더군요.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두 차례 그러니까 그때까지 총 세 차례 언급. 이러니 이른 말의 진위를 굳이 따져묻지 않아도 간단히 그리고 충분히 짐작가능하지 않겠어요? 타인이 오래 겪으며 고민한 데서 비롯한 바를 저를 우선하여 세우려니 급급하여 가져다 쓰는구나. 이런 거 '아전인수'의 전형 아닐까요. 구립도서관장으로 새로 오신 분은 이에 맞장구 치면서 일본의 동판·서판 운운(저 또한 이미 오래 전 주워들은 풍월로 앞서 언급한 서점 몸담았을 적 해당 게시판 게시글로 내용 남긴 바 있고, 브런치 등에도 언급한 바 있고)하면서 '교보'가 들어와 문제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더군요. ─ 아, 그전에 저는 이 분이 부임하고 가장 눈에 띈 변화는, 이전 관장분(이희숙 관장님)이 개방, 다른 사서 선생님들과 함께 사무 보던 공간이 통으로 '관장실'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관장으로 찾아주시는 손님 접대 위한 응접 기능을 염두에 두고 복원. 그렇잖아요? 이를 염두에 두면 충분히 그럴 법 합니다. 그런데 회기 년에 그렇게 맞아들여야만 하는 손님이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애당초 그런 손님의 격은 또 어떤 레벨일지 저로서는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만;; 시민으로 그렇게 찾아가 그 자리에서 대면할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과연;; ─ 제가 이 업계에 들 당시 도매처 가운데 상위 그룹(어차피 그래봐야 손가락으로 꼽는 정도가 전부)에 속한 '송인'이 자빠진 것만 세 번째입니다. 들은 것으로 한 번, 목도한 것으로 두 번이군요. '인터파크'도 곤란한 지경되어 실상 놔버리는 현실서 도매처 '북센' 급을 어떻게? 누가? 무슨 돈으로?? 와중에 오프에 그래도 탄탄히 뿌리내린 '교보' 들어와 (출판사로는 딱히 어떠하다 이르기 어렵지만;;) '북센' 독주를 견제하니 매입율 자체도 조정되다시피 하는 판에, 이게 '조삼모사'면 알*딘/Y*s24 B2B 거래하며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식으로! 동네서점 돕자고 내민 손길에 코빼기 한 번 비추는 바 없이 알*딘/Y*S24 박스째 (작은)도서관 등에 택배 보내는 작자들이 '나 동네서점주입네' 떠드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닙니까? 모르면서 아는 척, 관심 바탕으로 저를 돋우고 제 수익으로 환원 거두는 데에만 혈안이니, 남이 이른 말 가져다 임기응변 연속하게 됨 아닌가요? 혈세가 재원이라니, 자신 같은 이가 받아서 누려 마땅한 것으로 여기니 '혜택' 운운하는 것 아닌가요? 이를 보고도 그저 '문화기획자'이니 더하여 '여성CEO'라고 조명하고 살펴주는 관내 구립/교육청산하도서관 실무진은 물론이거니와 구청/시청 관계자 여러분. 답답합니다. '여성'이란 출신 성분이면 태생적 페미니스트인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6. 인터뷰 당시에만 납품 관련 이른 것도 아닙니다. 인근 새로이 자리한 독립서점 비롯하여 부평구 관내 10여개 서점이 뭉쳐 서로 간 보완하면서 납품 문제도 적극 대처 이상 대안 찾고 제안해보자 협의체 꾸렸던 게 2020년. 나/자기/자신 그런 중심주의 저로서는 참 그래서 협의체 속한 서점 가운데 연장자이신 '어!서점' 대표분이 협의체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바탕으로 함께할 것을 제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인즉, '딱히 관심 없고, 언제 서점 그만둘지 모르겠다'는 것. 그런 이가 얼마 뒤 '서점 간담회' 자리에서 마치 관내는 물론 모든 서점주/책방지기의 대표인 것처럼 저리 말하는 모습을 곁에서 목격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아니 사이에서 '어!서점' 대표분이 다른 말을 전했거나 혹은 거짓을 일렀거나 그랬을까요?! 글쎄요, 기성 서점주로 어떤 면이 드러나는 바를 저도 느끼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요? 역지사지 해보아도 저가 '어!서점' 대표분이면 '북극서점'주에게 다른 말을 전하거나 또 말과 다른 내용을 제게 전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렇잖아요?!


미처 이르지 못한 내용 수다하건만 중간에 건너뛰고도 이 정도이니 좀 더 디테일한 부분 세세히 짚어 이르자면 끝이 없을 듯싶으니 우선 이만합니다. 아, 공교롭게도 이 책 본문에 '북극서점' 대표분이 언급한 '돌멩이 수프' 내용 역시 제가 서점을 공동체와 결부지어 이른 바, <심야책방>을 비롯하여 <동네서점은 문화사랑방>, <북타운 부평> 등 모임에 참석한 분은 아실 겁니다. 애당초 본문 분량 한정이어서 내용을 축약한다 해도 직접 읽어 아는 것이면 내용이 달라지진 않겠지요!! 더구나 제 서점을 그와 결부지어 설명할 정도라면 말입니다. 아닙니까?!


단답이든 논술이든 중요한 건 답지로 내는 주부가 아니라 술부로 실천함일 터인데, 자기 삶을 우선하여 도모하자고 입말로 겉도는 형편을 임시방책으로 모면해가는 치들. 이런 이들이 승승장구하게 마련인 세상?! 그게 바람직하진 않더라도 다 그런 것?? 이럴 거면 책을 뭐하러 가까이 하며 읽습니까?? 곡학아세하려는 제 뻔뻔함과 맞서자고 배움을 연속하는 것이잖아요? 소위 배웠다는 이들은 이미!! 편히 앉아 배우는 데 들일 시간을 상대적으로, 사회로부터 할애받아 누린 축에 속한다 여김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권리보다 책임으로 우선 동기화하는 것이고!! 할 수 있고!! 아닙니까?! '남부럽지 않게'를 필두로 각자도생이 답인 것처럼 매몰된 지경의 사회에서, 그게 아니라!!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를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겁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안다는 자체가 이 부끄러움을 먼제 의식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평범한 민낯들로 가담/공모하여 구성하는 악(惡)과 거리두는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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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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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2차대전) 직후 탄생한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은 국가건강서비스라는 국가 무료 진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대규모 공영 주택을 건설하고, 대학 수업료를 철폐하는 등 생활의 최저 수준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그 효과가 일제히 꽃을 피운 시기가 1960년대였다. 계급 유동성이 없는 사회에 갇혀 부모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인생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그 부모들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직장에 취직했다. 배우,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뮤지션, 작가, 예술가, 그때까지만 해도 중산층 자녀들이 독점하던 업계에 새로운 계급의 다른 사고 방식과 다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의 에너지가 흘러 들어왔다. p159

이렇게 함께 어울리는 방식을 고민하여 실천한 끝에 현실로 자리하였었건만(이것이 바람직한 성장/발전 임은 두말할 것 없겠고) 그런데 이런 사람은 줄고, 대신 서로 간 배척에 골몰하는 이들은 늘어만 간다니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

안정/성장/발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긴축'이 뒤바꾼 현실을, 저자는 탁아소 폐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이며 증거한다. 위축/지체/정체/퇴보.etc 긴축책을 반대하는 편의 우려를 벗어나지 않는, 기대와 상반되는 결과. 불황 타계책이란 것이, 마치 기아 해결 위해 일정 비율의 인구를 제거하잔 식과 다를 바 없으니 이거야 원.

처음부터 기대하고 목적한 바가 ‘저변’의 배제가 아닌 이상 굳이 긴축책을 고수할 이유는 없을 터. 불안정을 현실로 마주하는 속에서 증폭되느니 불안이요, 심화되느니 갈등인 당장의 형편이 장기에 안정되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미생지신尾生之信. 자신만 지키려는 데에 급급한 사회라면 최종 승자 아니고는 죄다 패자일밖에.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사정과 형편에 눈 감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무시와 배제로 담을 높이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상을 안정적이라 이른다면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 또한 바람직한 성장/발전은 더더욱 아니겠고. 그보다 눈 씻고 서로를 찾아 살피는 데에, 눈/손/발로 길을 내어 마음 오가는 데에 힘을 쏟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한 격格이랄까, 성장으로 이루는 사람의 품위 아닐지. 이런 사람들이 주축을 이룰 때에나 국격을 위시한 사회의 품격을 논할 수 있지 않겠나.


사람이 결속하는 모든 것을 '안 된다'고 하며 서민들을 분할 통치하고 있다. '제힘으로주의'가 활짝 핀 상승의 시대라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기대고 지탱해주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하강의 시대가 되었는데도 개인주의라는 토대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시대에 그럼에도 '연대'에 끌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프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p173

광화문에 불려 나온 어르신들, 방황하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¹이 연상聯想되는 대목.

이분들이야말로 '연대에 끌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오른쪽으로 점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는지도 모를 일.

판단은 권좌에 맡기고, 자신은 맡은 일에만 열심이었을 뿐인데 응분의 처우는 고사하고 생각 없는 치로 내몰리면 억울할 만도 하겠다. 그런데 차근차근 살피면 알게 될 일, 당초 생각 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여기는 자체부터가 오해. 요는 사실을 근거로 살펴 직접 판단하기를 바라는 것. 못 믿는 게 아니라, 직접 살피면 이해하고도 남으리라는 믿음이 바탕. 그러니까 믿지 않고는 할 수 없고 믿으니 드리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어르신 -_-;;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다름 아닌 피해 의식. 안타까운 점은, 군부독재 폭정 아래 침묵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었던, 하여 왜곡된 형태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공동체 의식. 판단은 맡기고 침묵을 내면화한 끝에 얻은(아니 잃은), 적의敵意를 토대 삼지 않고는 내보이지 못하는, 연대連帶의 정서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속하기를 바라는 형편에서 '도당감徒黨感'²에 갈팡질팡하다 자꾸만 우측으로 기울고 마는 건 아닌지.

그러니 자신을 산업역군으로 불러주던, 자신이 이 나라 발전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여길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는 번번이 초과 상태.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앙시엥 레짐의 복권復權을 기도.

OMG, 정녕 이 어르신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꽈~~;


얼마 전까지의 영국이었다면 아나키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다..

아나키스트 계열의 무직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실업보험금과 생활보호수당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정치 운동을 했다. 하지만 노동당 정권 시절 이들의 주요 활동은 무농약 야채 재배나 유기농 식품 판매, 혹은 래디컬한 책을 모으는 도서관 운영 등 소프트한 방향으로 전환했다.

소위 '싸우는 극좌'라 불렸던 세대의 못 말리는 펑크족이나 히피 계열의 아저씨들은 그 모습을 보고 뜨뜻미지근하다며 화를 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반긴축의 깃발 아래 모여 생기 넘치게 활약할 수 있을 텐데..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긴축의 영향을 받았다. 실업보험금과 생활보호수당이 끊기자 그들도 저임금의 일자리를 얻었다(노숙자가 되거나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있다)..

긴축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으니 경제적인 면보다 정치적인 면에서 더욱 효과적이지 않았나 싶다.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휴머니티, 즉 인간성이 자본보다 열등하다고 규정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p69~p71

그래, 결국 사람. '인간성이 자본보다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긴축'에 열 올리는 이 또한 사람이며 이에 맞서 '인간성'을 보이는 이 또한 다름 아닌 사람. 조직/사회에 휘둘리니 사람이지만, 이를 바꾸고 가꾸는 이 또한 바로 그 사람인 것.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싶은 중에도 성원 개개인이 저마다 어찌할 수 있는바를 책임질 때에야 비로소 사회는 변화를 맞게 되는 것.

그런데 변화에는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책임은 사회에 돌리고 '보이지 않는 손' 뒤에 숨는 편리에 기대니(너도 나도 '한나 아렌트'를, '악의 평범성'을 입에 옮기는데 그 악을 별다른, 거창한 무엇이나 되는 양 여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상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 뒤에 숨어 제가 거머쥐게 될 이익─작든 크든 간에─을 셈한 끝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는, 이 모오든 짓거리가 죄다 그 악에 해당. 그러니 과연 평범하다 이를 만하지 않겠냐는 것!) 문제. 이 때문에 정작 돌봄과 살핌이 필요한 개인들은 오히려 소외되고 마는 형국. 공무, 정치를 비롯하여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년 세대라면 특히 자기 목소리만 낼 게 아니라 대의제代議制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마땅! 보신을 비롯한 일신의 안위, 제 편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만 혈안인 자체가 이미 인도人道를 저버린 행태. 따라서 해야 할 일을 함은 물론이거니와(당연하잖아요) 더하여 할 수 있는 걸 찾아 하는 때에만 사회는 마침내 변화를 일구어 낼 수 있을 것. 그런데 응당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조차 책임을 미루고 피하니 사각死角이 발생하고 그 그늘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식의 선先 성장 후後 분배 기조. 트리클-다운이니 어쩌니 죄다 무의미 아니 일편一便에만 유리하게 실현됨이 수차례 증명되고 있음에도 '긴축' 운운이라니. '재정적자'야말로 곳간 자체가 인심人心의 합일合一로 이뤄진 것임을 천명闡明, 다시 그 인심의 씨알을 배양하는 적극적인 실천인 것을!! 

따라서 배운 자들(당초 공부에 들일 수 있었던 시간 만큼 사회에서 다른 누군가가 노동에 참여/감당함으로써 얻어진 것임을 상기해야 마땅. 사회 전체가 향유할 가치 생산은 책무!!),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공무/정치를 비롯한 영역에서 기능하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장년 세대라면 특히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사회적 양육 책임을 공동 분담하는 데에 적극 나서야!! 이것이 이 시대가 요하는 '어른'으로서의 책무!! 그러자면 사즉생死卽生으로 임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가난을 대물림한 청년 세대는 이미 요단강을 배후에 두고 지·옥·고─지하/옥상/고시원─를 진지陣地로 삼고 있잖은가)에 양손에 떡을 쥐려 드니 맴돌 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안으로 굽는 팔을 어쩌지 못하는, 개인 영역/혈연 서사를 넘어서지 못하는 입바른 소리, 국한된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공허. 차든 뜨겁든 분명히 해야!!


분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 저널리스트에게 맡기면 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 p168

굳이 맑스³를 옮기지 않아도 될 것. 그러니까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니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이니 미니멀리즘 등등 예산 선 내로 욕망을 축소하며 자기 만족 만을 극대화하는 형태의 퇴행을 '나답게'라 이르는 욕망의 키덜트를 벗어나자는 것. 후세를 위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는 어른으로 이제 그만 성장하자는 것. 이를 바탕 삼고서 무책임/회피하려는 모든 짓거리를 멈추라고, 책임 분명히 지라고 목소리를 내자는 것.

어른이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방기할 때 아이들 마음에 염증은 뿌리를 내리고 혐오는 싹을 튀우게 마련.

이를 방치/방조 심지어 조장하는 자, 모두 유죄!!

아, 제발 좀!! '_'



물려줄 유산은 돈이 아니에요, 스피릿이란 말입니다, 스피릿!!

(아스피린 말고 아,스피릿 가즈아 ~ '0'/)

"캘리는 너무 기분이 나쁜 거야. 그래서 담임 선생님한테 따졌대. 도대체 왜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어야 하느냐고, 누가 그런 걸 정한 거냐고."

..

"그러게. 그게 우리 탁아소만의 스피릿이지."

..

'보통'이라는 개념을 의심하라.

..

어른이 되면 일을 하는 것이 보통. 어째서?

일하는 부모님의 수입으로 가정의 생계를 잇는 것이 보통. 어째서?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것이 보통. 어째서?

부모님은 서로 다른 성별이 보통. 어째서?

이 탁아소는 '어째서?'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 그리고 이 사회에 '어째서?'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자녀들이 주로 다녔다. 보수당이 정권을 잡아 긴축 재정을 실시하고 복지와 유아 교육에 대한 지출을 싹둑싹둑 잘라버리기 전, 그러니까 저변 탁아소 시절의 이야기다. p200



¹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김원, 현실문화연구


² '긍정적 뉘앙스의 소속감이나 연대 의식, 혹은 부정적인 느낌의 패거리 문화 같은 표현과 거리를 두고, 좀 더 중립적인 의미를 전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어색하지만 원문의 표현 그대로 두었다-옮긴이(노수경)', p171,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³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테제11,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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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겟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글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4. 1. 4.)

_『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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