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서 8월까지 저자와의 만남을 신청한 동네책방은 어디든 찾아가겠다는' 사계절 출판사 공문에 응한 곳, 그렇군요. 그를 중심으로 출판사 대표분과 만남 통해 책이 탄생한 듯싶군요. 들추어 잠시 훑은 바로 들어본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고. 들고 나길 거듭하는 업계인 만큼 당연하다 싶습니다. 하기야 안다는 것도 이름을 들어 안다는 것이지, 관내 지근거리도 아니고 대체로 마주한 적 없는 곳이니 실상은 모른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겠어요.
전부 읽은 것도 아니니 뭐라 이르긴 어려우나 '가장'이라는 수사로 꾸밈이 가능한가, 어차피 꾸릴 책이면 단정이 아니라 의문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매일 도처에서 서로 간 부대끼는 속에서 크고 작은 악전(惡戰) 빚으니 이를 일러 일상(日常). 세간(世間)의 실상이 이러하니 따지고 보면 죄다 저마다 딛고 선 바로 그 자리에서 분투(奮鬪)하는 고군(孤軍). 체계를 수긍, 솟는 의문을 도외시 하면서 '자기 소외'를 내면화하니 이미 '인격화된 자본'. 물화(物化)로 격하된 인격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자본 소유에의 의지'인 만큼 당장의 자본 소유 여부로 구별짓는 건 무의미할 테고. 분열된 자아상이 고스란히 투영되니 체계는 고착, 전장(戰場)으로써의 일터와 휴식 취하는 공간 구별. 이러한 분리에 의문 부호 하나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로 자발적이라 여기니, 갈급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하는 소비 활동을 거창하게 '노마드'라 칭하고. 공간을 비롯하여 새로움만 추구, 사냥하듯 쫓으며 SNS 전시해봐야 잦아들긴커녕 더욱 커지니 덧없음. 이를 실감하면서도 불분명하니 다시금 새로움을 사냥하는 소비 연속. 애당초 여읜 자족(自足) 임을 모르고서 만족(滿足) 만을 추구하니 곤고한 삶이요, 피폐해지는 영혼. 이게 '중독'이 아니면 무엇인가. 마치 개신교 성경에 언급된 사마리아 여인처럼, 갈급함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 연속하던.
세간의 사정과 형편이 이러하건만, 왜/어째서로 옮아가지 못하는 시선이야말로 문제이지 않나 생각은 합니다. 해서 어느 곳을 특정하여 마치 그곳에만 이를 테면 이 '서점/책방'이라는 곳에만 '문화'를 비롯하여 '낭만'이니 '아름다움' 등등 갖가지 수사가 가리키는 바가 고인다 여기는 자체가 허위의식 아니겠나 싶고요. 나아가 이를 자처하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지경되는 게 아닌가 싶을 따름입니다.
'눈 밝은 독자'라는 표현처럼, 작자는 물론 출판계 또 출판물 유통하는 서점 업계에 드는 치들은 바로 이 '눈 밝은 독자'에서 전화되지 않나 싶습니다. 자본 수익 환원은 물론이거니와 입신양명 서사와도 거리두면서까지 덕업일치의 궤에 오르는 자체가 애당초 그야말로, 도처의 비명인 세음(世音)에서 눈 돌리지 못하고 자꾸 보게[觀] 된 때문 아닌지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고 들어 아는 것만으로 요원하던 실천을, 당장 소수로 배제되기 일쑤인 이웃과 자기 안의 그 어떤 소수성(少數性)이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는 '감수성'으로 해서 동기화 되니 자연스레 옮아가지 않냐는 겁니다. '눈 밝'다는 표현은 이처럼 관(觀)-세음(世音)의 보살행과 맞닿아 있지 않습니까? 설법(說法)을 담는 그릇으로 글에, 눈이 익은 이들이라면 자연 이리 되지 않나요? 하면 계속해서 분리를 낳고 조장하며 기어코 양극으로 가르고 찢어놓는 체계와 그 체계를 확대재생산하는 문법과 방식을 그대로 아무 생각없이 따르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물론 '악전고투'로 '아름다움'을 영예로 취할 수 있겠으나 그러자면 더더욱 (누가 되었든 간에) '표리부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