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이 사라진 세상에서 동화향기 22
류영진 지음, 임윤미 그림 / 좋은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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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창작물들을 꽤 많이 접했습니다. 모두 썩 나쁘지도, 그렇다고 기억에 강렬하게 남을만큼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역사동화상을 받은 작품들도 몇 권 읽었지만, 독서가 끝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머릿 속에서 금방 지워져 버렸습니다. 읽다가 포기한 역사 소설도 있습니다. 역사물은 나랑 맞지 않나보다,하고 생각할 무렵 류영진 작가님의 <갓이 사라진 세상에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작품이 진짜 역사 동화구나!'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한 편의 웰메이드 미니 시리즈를 본 느낌이었거든요.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유교걸', '유교보이'라는 말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대개 보수적이고 얌전한 사람들을 칭하는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유교'를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쓸데없이 진지한, 소위 꼰대같은 이미지가 씌워진 게 유교인 것 같습니다. 유교의 핵심은 그런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갓이 사라진 세상에서>에는 조선을 지탱해온 선비문화, 즉 '진짜' 유교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비하되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만 유교를 알고 있다면, 꼭 이 동화를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회, 문화, 경제, 국제 정세 등 모든 것이 뒤흔들리기 시작한 구한 말입니다. 조선의 모든 것들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타격을 입은 직업 중의 하나가 바로 '갓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단발령이 실시된 이후로 갓을 쓸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갓이 뭐 중요한건가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거예요. 조선 시대에 갓은 유교를 평생 공부했던 양반의 프라이드를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갓을 쓰고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거나 머리를 방정맞게 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갓을 쓴다는 건 양반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조선의 선비라고 하면 갓을 쓰고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을 떠올리지, 상투만 튼 사람을 떠올리지 않지요.




이 동화에서는 '갓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아버지를 둔 '원식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원식이는 아직 10대 초반의 아이인데,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평생 해왔던 직업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인 상황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칙칙하거나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분제가 무너져 가는 시대여서 원식이는 학당에 다니며 선교사 선생님에게 공부를 배우기도 하고, 양반 신분인 승욱이와도 친구가 됩니다.




저는 그동안 조선 시대 역사를 공부하면서 '갓'에 대해 그렇게 의미를 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갓'이 얼마나 조선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장인이 갓을 만들기 위해 힘든 과정을 거치는 장면을 보면서 감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저 상투 위에 쓰는 모자인 줄만 알았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 작품에서는 조선과 개화기 사이에 끼어 있는 세대인 원식이처럼, '갓'도 이렇게 애매한 시대에서 그 생명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지되는지가 흥미롭게 드러나 있습니다.


원식이가 성장하여 결국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어나가는 결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동화 속 원식이 아버지, 원식이, 그리고 의병들 등 외세에 맞서 싸워나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겠지요. 이 동화는 역사를 너무 어렵게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이 재미있게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도록 잘 쓴 작품입니다. 역사동화는 그냥 다 그저 그렇다라는 편견을 깨준 아주 훌륭한 작품이었고, 앞으로 류영진 작가님의 차기작도 기대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갓이사라진세상에서 #좋은꿈 #동화향기 #류영진 #어린이책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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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저항이다 - 시스템은 우리를 가질 수 없다
트리샤 허시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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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동안 피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등록금이 비싸기로 유명한 사립대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돈에 허덕이며 하루 하루를 비참하게 보냈습니다. 게다가 대학원생의 생명줄을 틀어쥐고 있는 교수들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온갖 신경을 쓰다보니 늘 힘이 들었습니다. 우울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버티지 못하고 꿈을 포기했습니다. 한때는 '내가 잠을 줄이고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대학에 남아 양질의 일자리를 가졌을텐데' 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때 참 미련하게 살았구나하는 후회만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주경야독을 하며 공부를 하려 했을까,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 상하는 일도 많았고, 허리디스크로 꽤 고생을 한 기억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트리샤 허시 작가님의 <휴식은 저항이다>를 만났을 때,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휴식'을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0대 시절에는 공부에 미쳐 살아야 하고, 20대에는 스펙을 쌓아야 하고, 30대 이후로는 돈을 계속 벌어 들여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휴식은 마치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이 책에서 여전히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우리의 몸을 악용했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으나 직접 말로 하기에는 꺼려지는 진실을 과감하게 드러냅니다. 누가, 언제 저에게 '휴식 따위를 할 시간은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입을 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잠도 줄이고, 열심히 살고자 발버둥쳤던 시간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저의 진짜 의지로 했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트리샤 허시도 이 책의 87쪽에서 '과로문화와 그것이 내 몸에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나의 저항은 한층 깊어진다.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지배와 부를 추구하는 체제의 것이라는 과로 문화의 조작, 사기, 주장을 살펴보노라면 분노와 슬픔이 솟구친다'라고 썼는데,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가님의 분노가 곧 제가 느끼는 분노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가님은 '낮잠사역단의 교리'를 만들어 '낮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휴식은 단순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 생각없이 쉬는 게 아닙니다. 작가님은 휴식이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뒤흔들고 밀쳐내므로 하나의 저항'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낮잠이란 상상과 발명과 치유의 관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낮잠은 그저 한가로운 사람이나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험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위해 해야만 하는 저항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평균 노동 시간이 압도적으로 높은 우울한 국가에서 반드시 '낮잠사역단'이 널리 널리 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과로문화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영적으로는 그 기만을 끊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작가님의 Q&A가 수록되어 있는데, 'SNS에 대한 문답'도 있습니다. 작가님은 소셜미디어를 낮잠사역단을 팔로우하는 분들과 소통하는 도구로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릴스, 콘텐츠 제작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SNS'입니다. 작가님은 자본주의의 도구들을 완전히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잘 이용합니다.


저는 이 책의 중간 정도에 나와 있는 휴식 방법 20가지를 포스트잇에 써서 작업 공간에 붙여 놓았습니다. 늘 압박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며 저를 아껴주고 싶습니다. 남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쫓기며 살아가는 삶, 심지어 쉬는 날 조차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삶. 그런 삶은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라는 말을 매일 되뇌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백인우월주의와 자본주의가 망가뜨린 자존감과 자기 가치를 회복하는 작업을 시작하라고, 피곤에 빠져있는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은 저항이다>를 읽고, 자신의 삶을 지금보다 더 여유롭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휴식은저항이다 #트리샤허시 #장상미 #에세이 #추천도서 #갈라파고스 #신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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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쪼꼬 용사 원정대 1 탁주 쪼꼬 용사 원정대 1
탁주쪼꼬 원작, 한바리 글, 김기수 그림 / 대원키즈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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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판타지 장르의 컨텐츠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현실 세계를 표현한 작품들은 굳이 찾아서 즐기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라면 굳이 컨텐츠까지 소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타지 장르는 다르지요. 제가 갈 수 없는 신비로운 장소, 신기한 마법, 무서운 몬스터 등이 나오는 판타지 세계는 매력이 넘칩니다. 그래서 해리포터 시리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들, 파이널 판타지 게임 등 판타지 장르 컨텐츠들의 인기가 식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읽은 <탁주 쪼꼬 용사원정대 1>은 제가 좋아하는 정통 판타지 계열의 만화입니다. 이 만화에는 용사, 마법사, 드래곤, 왕국, 모험, 정령 등이 나옵니다. 용사인 탁주와 마법사 쪼꼬가 '용사 자격시험'을 보러 떠나면서 겪는 일들이 이 만화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배경이 마법, 용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무대이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겪는 일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이 만화의 장점입니다. 뻔한 내용이라면 시시해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텐데, 이 만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전개가 어떻게 될지,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 책을 읽기 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으니, 반드시 할 일을 먼저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저도 조금만 읽다가 다른 것을 할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니 한 권을 다 읽고 말았습니다. 올 컬러로 인쇄되어 있어서 꼭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만화는 캐릭터의 성격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탁주와 쪼꼬는 사심이 없고, 밝고 명랑합니다. 그래서 일행이 된 자칭 미남 용사인 미그랑의 못된 마음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다다 왕국의 문지기가 심술 내는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지기가 탁주와 쪼꼬를 골탕먹이려고 길을 잘못 알려주어도 탁주와 쪼꼬는 그 길을 믿고 나아갑니다.


언뜻 보면, 너무 순진하고 바보같지만 결국 탁주와 쪼꼬는 오히려 문지기가 길을 잘못 알려준 덕분에 우다다 왕국의 왕에게 늘 골칫거리였던 문제를 해결하고 진짜 용사로 인정을 받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탁주와 쪼꼬의 태도가 귀여우면서도 멋졌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탁주와 쪼꼬가 만들어가는 에피소드들로 인해 크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탁주와 쪼꼬를 골탕먹이려던 사람과 몬스터가 오히려 자기 꾀에 넘어가는 장면은 정말 유머가 넘칩니다. 힘도 세고 영리하고 이것저것 잘 계산하는 사람이 용사가 되는 게 아니라, 탁주와 쪼꼬처럼 순수한 아이들이 용사가 되는 마무리가 좋았습니다.


탁주 쪼꼬를 좋아하는 어린이 팬들, 판타지 콘텐츠를 좋아하는 독자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성인임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보통 어린이 판타지라고 하면 조금 시시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이 만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탁주 쪼꼬 용사 원정대> 2권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컬처블룸을 통해 책을 제공받아 읽은후에 쓴 후기입니다

#탁주쪼꼬용사원정대 #컬처블룸 #컬처블룸리뷰단 #대원키즈 #신간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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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 - 최영미 시인이 엮은 명시들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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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감동적인 명시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곁에 두고 계속 읽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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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 - 최영미 시인이 엮은 명시들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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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깊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최영미 시인님의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입니다. 제목부터 로맨틱하면서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책 표지를 보고 환호가 절로 나왔습니다. 표지에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있는데요. 책의 본문에도 낭만이 느껴지는 모네의 그림들이 삽화로 들어 있어서 시집을 읽는 내내 눈이 즐거웠습니다. 명시, 명화, 시인님의 해설이 잘 조화된 책이어서, 독서를 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이 책을 쓴 최영미 시인님은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시인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대중에게 무척 잘 알려져 있는 인기 있는 시집이죠. 그리고 시인님은 문단 내 남성 중심 권력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확산시킨 정의롭고 멋진 분입니다. 문단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어도 쉬쉬하고 있던 문제를 시인님은 당당하게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고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주눅들지 않고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한 쪽에 부당하게 쏠린 권력을 싫어하는 시인님의 성향을 반영하듯,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을 쓴 시인들은 '김남조, 로버트 브라우닝, 사디 사라즈, 조이스 킬머, 로버트 번스, 김경미, 마츠오 바쇼, 왕유, 이성복,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등입니다. 모두 국적도 다양하고, 성별도 편향적이지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처럼 원래 '소설가'로 유명한 작가들의 시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했던 시인들의 에피소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에피소드를 읽고 나서, 다시 시를 읽어보면 더 이해가 잘 됩니다.




그리고 시인님의 시를 선별하는 넓은 안목과 외국어 감각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번역시들을 소개하면 번역된 내용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님은 원제와 우리나라에 의역된 제목, 번역의 비교 등을 통해 좀 더 탁월한 시의 번역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난해하거나 어려운 시가 없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입니다. 시인의 개성이 느껴지지만, 그 개성이 남은 알아들을 수 없는 치기어린 모습이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꾸며진 시가 아니라, 진솔함이 느껴지는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명시들만 쏙쏙 뽑아서 소개를 해주시니 '이런 시가 좋은 시구나'라고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시의 내용, 주제를 암기하는 게 재미도 없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시가 이렇게 재미있는 장르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시인님이 곁에서 한 편, 한 편 시를 읽어주면서 그 의미를 천천히 알려주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시인님과 마주 앉아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 같아 책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사랑, 청춘, 그리움, 외로움, 슬픔 등에 대한 시들을 읽으면서 세월에 따라 그저 무뎌져버렸던 저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은 로버트 번스의 <올드 랭 사인>입니다. 시인님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올드 앤 사인>을 부르며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고 쓰셨는데요. 끝과 시작이 모두 들어간 노래처럼, 이 책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와 같은 최영미 시인님의 명시모음집이 꾸준히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를 더 행복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 덕분에, 올 가을은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이 허무해지고, 한편으로는 괜히 눈물이 나는 이 가을에 이렇게 아름답고 감성적인 시들을 만나 저의 삶이 한층 더 빛나는 기분입니다.


 

#명시모음집 #시 #나에게영혼을준건세번째사랑이었지 #최영미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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