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에 써넣으며 본인의 입지를 밝히고, 장을 번갈아 가며 관련 담론을 펼친다.
그렇다면 동양인/여성/시스젠더/○○섹슈얼/비장애인 신체/중산층인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비록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정상인'이라 부르는 규범으로부터는 조금 어긋나있을진 몰라도 나는 내가 속한 이 땅에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비록 소수자성을 향한 타자의 혐오를 느껴본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PTSD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또한 어떤 순간적 '힘듦'으로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행하려 노력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앞서 말한 '정상인' 템플릿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처음 알았다. 활자로 썼을 땐 사소할지 모를 이 정체성의 간극이 근본적인 대역을 태초부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소수자성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하거나 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보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여자라고 임금을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도 동반자 법 아래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비수도권 자들에 대한 처우가 수도권과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이런 단순한 입장들은 어떻게 보면 '장애인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조를 요청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남들'만큼의 제 기능은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니 전복될 가치관조차 없어 얼떨떨했다는 감상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고개를 수도 없이 끄덕였으나, 이입한 횟수는 그와 비례하지 않았다. 감히 공감해도 되는지조차 어렴풋했다.
분명 성 소수성을 주제로 꺼낼 때도 비슷할 테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에이즈와 예수님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반反동성애 연대협회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지리멸렬하고도 지긋지긋하게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의 주인공 자레드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만, 그가 주체적으로 결론 내린 본인의 정체성은 교회 사회 안에서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져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 제목 그대로 주변인들로부터 본연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험은 불쾌하고 비자주적이다. 그런데 장애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생애 얼마 동안 생각하고 걱정하고 분노할까?
-
현 시각 대한민국 서울은 전쟁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권리 확보 선전을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등 '시민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발표했다한국일보, “못 만날 이유 없다”던 오세훈, 전장연과 단독 면담 불발” 2023.01.19. 혹자는 이를 두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시민은 어엿한 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단 입장만 굳혔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 평소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던 나는 회사 동료들의 불평으로 아침을 맞았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 지각했다느니,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시위하냐느니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얘기들은 듣지 않아도 됐다. 귀결되는 논점은 단 하나. "괜한 불똥에 멀쩡한 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단 것".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거나,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거나, STS 같은 학문은 이 책에 소개된 것을 넘어 더 깊이 알아볼 시도를 하거나 연구로 이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기엔 아주 의아하다. 내가 이전에 썼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독후감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에 관해 의심한 적 있듯, 그것들을 알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연이은 투쟁과 끊이지 않는 논란에 기사 전문 대신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중, 문득 한창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 영어권 국가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볼 수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저상버스가 아닌 차량이 오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는 타지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김원영 작가는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와 같은 의문을 던진다. 흔히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 권리인 이동권은 투쟁해야만 겨우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잘 감동 받곤 하는 마케팅에서도 이런 시선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적인 신기술'의 뛰어난 업적으로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농인, 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된 청각장애인, 로봇 다리를 장착하고 다시 뛸 수 있게 된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비장애인은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앞서 언급한 성소수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곧 도래할 최신 과학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란 믿음은 기후 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교화 대상으로 여기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자면 학창 시절에 공모했던 '전국 학생 설계 경진대회'가 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여타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꽤 큰 행사였다. 대주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따뜻한 기술의 개발'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힘이 미치도록 기획되었다. 그맘때쯤 공대로 입시의 방향을 정했기때문에 단순히 외부 활동 스펙이 필요해 참여했던 대회였다. 운좋게 입상까지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역시권 출생/명문 학군/전문직종 자제인 나와 친구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단순히 미디어와 고정 관념이 그리는 이미지들을 캐치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이름 아래 설계한 ○○ ○○○의 도면은 스케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설계 취지와 내용도 부실했다. 기억에 본인이나 주변인의 장애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를 한 팀은 전무했다(이점은 특히 대학부보다 고등부에 특출나게 드러났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였을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무능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얼마 전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곳에는 조명과 난방을 포함한 모든 기본 설비들을 하나의 터치패드로 중앙 제어할 수 있다. 스위치가 없고 매끄러운 공간은 '심리스seamless'하고 유연한 현대적 공간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시력이 감퇴했거나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는데 서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가 집들이 선물로 드린 가습기는 전원 버튼이 감춰져 있고, 리모컨이나 LED로만 상태를 조작하고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선 호수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가볍게 입력해야 한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의 진입마저 어떤 난관이나 관문처럼 느껴지니 지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는 이사 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계시는데, 혼자서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고택에서는 벨을 누르면 수화기를 들어 문 열림 버튼을 눌러야 했고, 방을 데우기 위해선 장작불을 피워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사용자의 의식적 개입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 이음새는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그 손녀가 공모하고 설계했던 ○○ ○○○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에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인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진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궁극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이 희미해지기 위해선 관계를 장애/비장애의 구분에 묶지 않아야 한단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리처드 사이토윅이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쓰고, 이 책의 9장에서 인용한 아래 문장으로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우리는 움벨트 안에서 나오려고 투쟁해야 한다. 움벨트는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을 각색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해당 독후감을 통해 전장연 활동에 관심이 생기신 분은 하기 정보로 일시/정기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일시 후원 입금 계좌
국민은행 009901-04-01715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기 후원 등은 사이트 통해 가능 https://sadd.or.kr/donate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 P33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 P38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 P57
그러나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identif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 P60
즉 장애라는 인간의 경험이 병리학의 대상에서 존재론의 문제로 이동한 것이다. - P61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 P63
그런데 이 흔한 ‘위로‘ 속에서 우리 사회가 기술과 장애, 의학과 장애의 관계를 어떻게보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 P65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다. - P67
미디어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이제는 기술의 보조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 P71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한다. - P72
그러한 기술은 필연적으로 교정과 향상을 요구한다. - P75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Autism Speaks‘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 P82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기술과 의학으로 교정하려는 정상성 규범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어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발 붙일 곳이 없다. - P84
언젠가 나타날 기적의 과학기술에 이른 찬사를 보내는 대신, 이미 현실에서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 P88
21세기 휴머니스트들은 교육에 걸었던 기대를 과학기술에 건다. - P94
장애가 부정적인 낙인의 총체로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에서 장애인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잇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장애는 완전한 무능 혹은 그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의심의 대상으로 이원화된다. - P123
장애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장애 당사자가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장애에 대한 낙인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장애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특성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애는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 P125
이러한 고민 역시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 P160
장애인들은 삶을 개선하고 환경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고안해내고, 지식을 공유하고, 비장애중심주의적 사회에 균열과 마찰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은 희미해지고, 아예 흐트러진다. - P189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비장애인들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점자 블록을 가시성이 낮은 회색으로 만들거나, ‘비장애인 시청권‘이 보장되기 어렵다며 공영 방송 뉴스에서 수어통역 제공을 거부하곤 한다. 장애인만을 위한 설계가 여전히 가치 절하되어 있다는 증거다. - P204
그러나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매끄럽지 않은‘ 기술이라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기술에 대한 열광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 P237
하대청은 인공지능의 ‘자율성‘ 밑바닥에 놓인 인간 노동자의 구체적인 돌봄 노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이런 이음새 없는 기술 환경 밑에는 이음새를 끊임없이 관리하고 수선하고 보수하는 인간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 P243
장애인은 심리스-스타일의 세계 안에 끊임없이 ‘이음새‘를 만드는 존재다. 많은 것이 자동화되고 인간 행위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늘 거기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주는 존재가 장애인이다. - P248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 P256
오늘날 SF는 소외를 논하는 최적의 장르로 변화해가고 있다. - P261
‘우주선 설계하기‘는 장애가 환경과 상호 작용하여 구성되는 상황에 대한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 이 사고 실험은 접근 가능한 세계를 단지 ‘상상하는‘ 일조차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완전한 상상의 영역에서도 보편은 거기 속하지 못한 이들을 밀어낸다. - P264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 P281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떄,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 P299
그런 세상은 늘 ‘안전‘하겠지만 차이를 존중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차이가 만들어내는 어떤 이음새도 없을 것이다. - P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