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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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어질 결심> 스포일러 주의!

정확한 대사가 다분히 인용되었으며, 장면에 대한 설명과 감상이 적나라하게 이어집니다.



극장에서 영화의 완성본을 보는 관람객은 영화를 ‘영상’으로 인식한다. 움직이는 인물들, 지나가는 풍경, 흐르고 머무르는 말소리, 잔잔하게 깔리는 배경음악.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엮여 창조되고 편집된 영상 한 편을 온전하게 구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쏘는 이 ‘영화’란 기록물은 촬영물이기 전에 글의 형태로 존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주로 관람하는 영화들은 각본, 콘티, 스토리보드 등을 반드시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인지 그걸 처음 안 사람처럼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었다. 영화를 좋아하긴 해도 전공자도 아니고, 나름의 평론을 쓸 만큼 전문성도 있는 게 아니어서 차려본 예의라고는 재관람밖에 없어서 그랬나. 예전부터 시중에 출판되고 판매되어 온 각본이 많단 걸 분명히 알고는 있었는데, 왜인지 그걸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숨겨진 감정선들, 미묘하고 사소한 묘사와 표현들. 배우의 연기만으로는, 감독의 연출만으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비하인드 인터뷰나 코멘터리 같은 동종의 매체가 아닌 수단을 통해 극장에 다시 찾는 것보다 더 많이 느껴지고 되짚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화가 나고, 심장이 찌르르하고, 끔찍한 동시에 사랑스러움을 나타내는 문장들.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부분들을 마음대로 몇 가지로 분류해보았다.




  • 각본에는 이유가 적혀있다.

    • 바람에 머리칼이 엉망. 말소리도 자꾸 흩어지니 크게 외치는 수밖에. / p.8
      • 세찬 바람에 등장인물의 머리칼이 헤쳐지고, 목청을 돋운다면 관객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아, 바람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는구나’라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각본에는 이유가 설명으로 적혀있다.
    • 사진을 이어서 보다가 어느 순간 못 참겠다는 듯 태블릿 PC를 돌려놓는 서래. / p.19
    • 벌떡 일어서 의자와 테이블을 거칠게 차 버리는 수완.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테이블이 없어지자 벌겨벗겨진 기분이 드는 지구. 가랑이를 오므린다. / p.49

  •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이 기인한 까닭을 별달리 설명하지 못하니까.

    가벼이 지나가거나 캐릭터의 성격이나 특성에 따라 자연스레 나온 것만 같은 장면들도 사실은 의미가 있다. 의문스러웠던 태도나 동작을 마침내 제대로 바라보고 속사정을 파헤쳐보게 된 기회.

    • 미세하게 끄덕. 그 단호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해준 / p.18
      • 단호함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단 걸 알아챌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 노동으로 너덜너덜해진 반창고를 보란 듯이 휙 떼어내는 서래. / p.35
    • 거울 앞에서, 저 예의 바른 형사는 뭘까. 저 맛있는 초밥은 뭘까. 의문을 지워 버리려는 듯 열심히 이를 닦고 헹구는 서래. 방수 밴드 꺼내 상처 부위에 조심스럽게 붙인다. 갸웃하더니 향수를 꺼내 귀 뒤에 뿌리고는 밴드 위에도 살짝 뿌리고 가만 들여다본다. 정말 방수가 되나 시험해 보듯. / p.42~43
    •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해준. 심장이 찌르르. / p.57
    • 운전하는 해준. 화가 났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해서. 안개 때문에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 p.62
    • 오른 층계 ― 138층.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 p.105
    • 당연히 해준 옆자리로 가 앉는 서래. / p.107
      • 당연한가? 서래의 치기처럼 보일 수 있었던 행위가 사실은 당연했다.
    •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행복’을 언급해 놓고는 더 화가 나) 내가 품위 있댔죠? / p.109
    • 해준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말 안 해도 기다리셔. 하주 (그 거짓말에 웃다가 엄마 핑계 대는 아빠 맘 알아채고) 아빤 별일 없으세요? / p.110
    • 고급 옷에 보석을 착용하고 화장한 서래, 해준을 보고 당황하지만 그 부부가 다정한 것을 보고 재빨리 호신의 손 찾아 잡는다. / p.124
    • 해준이 무안해하거나 말거나 무표정으로 천천히 팔을 들어 옷장을 가리키는 서래. / p.135
    • 서래 (사태의 심각성을 잘 파악 못한 듯) 삼 일 있다 관광 가이드 일이 있는데 그때까진 풀려날까요? 어이없어 하는 해준. 체포 처음 해 보는 형사처럼 ‘다음 절차는 뭐더라……?’ 생각하다 수갑을 꺼내면서 한 발짝 다가간다. / p.143
    • 해맑은 서래 표정에 당황하는 해준, 굳었던 결심이 도로 무너지려 한다. / p.166

  • 사랑에 빠지고 파괴되는 과정의 서술

    영화를 볼 적에는 해준과 서래가 갑작스레 사랑에 빠지고, 돌연 밀어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각본을 짚다보니 꽤나 초반부터 적나라하게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 더러 있다. 뺨을 붉히거나, 눈이 부신다던가 하는 표현들은 글 속에만 존재할 수 있고 영화 속에서 티나게 드러난다면 자칫 촌스러울 수 있어 잘 알아채지 못 했던 것 같다.

    • 크게 숨을 들이쉬어 체취를 맡으며 뺨을 붉힌다. / p.32
    • 서래, 처음으로 해준을 향해 미소를 보낸다. 해준. 잠시 눈이 부시다. / p.39
    • 수사기록철로 얼굴을 가리고 코를 벌름거리며 향수 냄새 맡는 해준, 돌아온 결혼반지를 본다. / p.43
    • (싱긋 웃는 서래를 보면서 심장이 또 찌르르 하지만) 어디 뒀어요, 펜타닐? / p.66
    • 서래에게 문자한다. ‘자요?’ 답 기다리는 해준 뒤로 이층에 불이 켜진다. 마당의 해준을 내려다보는 정안의 실루엣, 해준은 못 본다. 알림음이 들리자 재빨리 확인하는 해준. ‘어이, 불면증. 내 차도 부탁(부탁하는 이모티콘)’ 정안에게서 온 문자다. 놀라는 해준, 돌아본다. 창가에 선 정안을 향해 엄지척 해 준다. 손 흔들고 사라지는 정안, 이층 불 꺼진다. 큼직하고 더러운 정안의 차를 돌아보는 해준. 쩝. 문자 도착 알림음에 또 놀란다. 이번엔 서래. ‘병원. 화요일 할머니가 위독하세요ㅠㅠ’ (…) ‘그럼 월요일 할머니는요?’ ‘아, 걱정이에요.’ ‘내가 가 볼까요?’ ‘정말요?’ ‘잠 못 자 죽어가는 형사보다 산 노인이 중하지 않겠습니까.’ (…) 한숨 쉬는 해준, 양동이의 물을 정안의 차에 확 끼얹는다. / p.95
      • 아내 정안의 부탁엔 ‘쩝’ 하고 못 내켜하곤 대충 물을 확 끼얹더니 서래의 문자엔 되려 나서다.
    • 서래 여보, 그 형사님이셔, 나 의심했던. ‘여보’에 마음 무너지는 해준. / p.125
    • 눈에는 눈물 가득. 해준은 그녀가 끔찍하다. 무시무시한 살인범임을 확신하는데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정을 꾹꾹 누르며 ― / p.133




이 밖에도 영화에 나온 몇몇 장면에 대해 풀이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었다.



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 p.57

  • 서래는 매일 아침 먹이를 주던 고양이가 고마움의 표시로 까마귀를 물어오자, 중국어로 고백한다. 그러면서 땅에다 그 사체를 묻는데, 결국 나중에는 자신도 모래사장에 묻힌다. 해준에게 주는 선물일까. 선물을 묻어버리니까.


우리 팀장님이요, 이렇게 호구 같아 보여도 사실은 무서운 분이에요. 다음에는 서래님 꼭 잡으실 거예요. 다음 남편 죽일 땐 조심하세요. / p.78

  • 다음에는 꼭 잡을거란 수완의 지나가는듯한 말을 기억하고 다음 남편을 죽인걸까. 그렇게라도 해준을 보기 위해서.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내려가요. 점점 내려가요. 당신은 해파리에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중국어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내가 다 가지고 갈게요. 당신한텐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 p.87~88

  • 영화는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이 난다. 아마 기폭제가 된 건 서래의 자장가. 증거는 녹색으로 보였다 파랑으로 보였다 하는 서래의 드레스. 결국에는 해준의 죄책감이나 불명증 같은 모든 것을 서래가 가져갔구나. 저 깊은 바다로.


테라스 / 서재 ― 정안 집 (밤) 파도 소리 들리지만 안개 탓에 바다는 안 보인다. 그래도 바다를 향해 난간에 기대선 해준. / p.60

호미산 앞 주차장 (밤) 바람에 실리지 않고 천천히 떨어지는 눈, 이포와는 달리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공기. / p.163

  • 처음에 해준이 기도수를 발견한 비금봉에서는 해가 떴다가 안개로 사라졌고, 이포에서는 자욱한 안개가 걷힐 줄 모르고, 호미산은 눈이 와도 공기가 맑다. 그러다 ‘서래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바람직한’ 대목에서 어처구니없어 픽 웃을 수밖에 없는 해준)’이란 대목이 나온다. 서래에게 ‘바람’직한 남자가 안 와서 이곳 호미산에는 바람이 안 부나. 모든 게 말장난이다.




나는 이제 안다. 어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각본까지 찾아 읽는다면, 그 사람은 장시간의 고민과 무수한 인력의 협업과 노력끝에 만들어진 작품의 토대를 (아마 감독이나 각본가의 사소한 생각까지) 한층 한층 살펴보고싶단 의미라는 걸. 영상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읽어야했단 사실이 참 묘하다. 아마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단 점이 공통점이 있어 그럴까.

처음 영화를 보고 나올 적에는 꽤 잘 만들어진 영화이고, 평균 별점이 높을 수밖에 없지만 최고점은 못 주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각본을 읽고 나서는 이 영화가 좋아 죽을 것 같았다. 한동안 얼핏 읽고 넘어간 대사가 머릿속에 한참을 맴돌아서 몇 번을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종지에는 다시 한 번 극장을 찾았지만 (그것도 영자막을 함께 상영해주는 곳으로) 각본을 읽을때만큼의 감동을 받진 못했다. 찾아보니 표현의 유연성이 없고 고정적인 문자언어와 감각적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해독 가능한 영상 언어의 차이라는데, 결국 이 두 가지가 모두 섞여 호감도를 급격히 올렸단 사실이 색달랐다. 똑같은 시각자료더라도 정보 처리 속도가 감상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한가보다. 또 기회가 된다면, 좋아하는 영화의 각본을 찾아 더 다채롭게 사랑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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