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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실패 - 개정판 ㅣ 걷는사람 소설집 1
이경자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7월
평점 :
책을 구매하기 전, 이경자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있다. 영상 초반부터 작가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다. "작품이 나온 이후 들었던 얘기는 재수 없다, 싸가지 없다 등의 말뿐이었다"라는 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이 없는 그의 행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1세대 페미니즘 작가가 만든 한국 문학의 긍정적 선례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12가지 이야기 속 여성 인물은 때로는 남성 인물만큼 직선적이거나, 혹은 세상의 어떠한 존재보다도 여리디여리다. 놀라운 점은 어떠한 유형의 여성 인물이든지 간에 전부 (특히 여성)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여자가 성격이 왜 이렇게 드세냐'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던 이전과는 달리 어느새 남성 인물과 대립하는 그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여전히 낮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스스로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체감한다.
표제작인 <절반의 실패>를 비롯한 이경자 작가의 작품은 억눌렀던 화병 비슷한 증세를 유발했다. 시기나 지역을 불문하고 말이다. 당연히 작가가 허용한 서사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상황들이 전혀 옛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는 주인공의 50%의 실패를 통해 역으로 삶에서의 진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가능성이라 함은,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놓고 남성과 대등하게 살기 위해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그 권위 앞에 '굴복'할 것인가라는 선택에 대한 문제다. 그렇지만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문학, 나아가 역사의 성별에 대한 진보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시점이 '알페스 논란'이 터진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인해 더 이상은 어릴 적 견고한 사고방식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회가 끝도 없이 주입하는 남성 중심적 관념에 곧바로 반기를 들기까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행히 필자 곁엔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중이다(심지어 현재진행형이라니). 아마 리뷰를 읽는 사람 중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는 동지애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