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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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만 봤을 땐 그다지 곱씹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책으로 접한 뒤 더 강한 여운으로 다가왔다. 주인공 은희의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아주 많은 시선들, 그 시선은 은희에게만 국한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1994년 10월 은희가 갇혔던 소용돌이 속에는 과거에 내가 부딪혔던 크고 작은 혼란들이 있었다. 신기하고 묘했다.


내 인생도 영화적인 해가 있었다. 2014년.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때에 나는 크론병을 진단 받았고, 갑작스레 휴학을 했다. 집안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어렴풋이 너무 힘든 탓에 울었던 기억들이 스쳤다. 6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큰 덩어리들은 어느새 편린이 되어있더라. 중학생 은희의 영화적인 해가 작품 속에서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은희는 표현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보편적이나 말할 수 없는 은희의 고통을 가장 진실되게 표현했기 때문에.


물론 흥미로웠던 점도 있다. 작품에서 눈물을 쏙 빼놓는 인물은 아버지와 대훈 단 둘 뿐이라는 것. 가부장제 속 권력을 쥔 두 사람이 오롯이 슬픔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의미로 보이기도 하는구나. 김보라 감독이 꼬집으려 했던 내용이 보통 심오한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두 말할 것 없이 올해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 후보에 들어간다. 굳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아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는 어떤 이처럼, <벌새>는 그렇게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따금씩 스스로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가장 작은 새가 떠나는 여행이 녹록치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 단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해준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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