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뒤의 간략한 줄거리를 접한 뒤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책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주변의 감시와 그에 따른 인간의 공포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앞부분에 거론된 200년만의 폭염은 영화의 맥거핀 장치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인간 개개인이 지닌 소신과 직업 의식을 지켜나가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억압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찾느냐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자의 말대로 답을 내놓지 않는 작품이다. 때문에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인생의 딜레마에 대해 오롯한 내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다.
인간이라는 자격을 박탈했다고 느끼는 요짱,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제대로 배워가고 있었다.그래. 인간은 본래 나약하고 부질없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인간은 강해진다. 그래서 개개인이 원하는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실격이란, 자신이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영악한 자만심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절대 알려지면 안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꼭 알려져야 할 이야기들. 비밀과 비밀이 아닌 것들. 이들의 조합은 인간의 기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도 딜리터가 있다면, 그에게 무엇을 가장 먼저 지워달라고 부탁할 것인가? 그러나 과연 딜리팅에 대한 의미가 정말 있을까? 우리는 딜리터의 딜리팅 과정을 알 수 없다. 딜리팅은 우리가 꼭 죽어야 이루어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 알 수 없음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플롯과 주변 인물들의 도처에 넓게 깔려있다. 의미 있는 비밀, 어쩌면 무의미한 폭로된 이야기들. 그 경계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인가에 대해 이 책은 질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있음에도 관련 종교 서적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비로소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말에는 절대 과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여느 때보다 내면의 관리가 절실할 때 읽어서인지 여러 챕터들이 실천 자체에 대한 도전감을 안겨주었다.
평소 김혜리 기자의 책을 시간 내어 읽어보고 싶었다. 접해보니 단순한 영화 평론에 그치는 글들이 아니어서 좋았다. 어딘가 모르게 냉철하고 비판적 시선으로만 글을 쓰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건 버려야 할 편견이었다. 중간중간 메모해놓고 싶은 부분들도 많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김혜리 기자는 책 제목에 대한 일화를 털어놓는데 그 부분이 많이 공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