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뇌가 아니다 - 칸트, 다윈, 프로이트, 신경과학을 횡단하는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2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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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과학주의, 그중에서도 뇌과학의 과학주의를 '신경중심주의'라고 명명하고 비판한다. 그를 따르자면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철학자다. 가브리엘은 셸링의 문구 "모든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자유다"에 따라,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뇌과학에 맞선다. 실험과 물질적 증거를 바탕으로 사고함을 강조하는 자연과학자는 논증의 세계로 내려오는 순간 철학적 논쟁의 장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다. 의식과 자기의식, 정신과 영혼이라는 문제에 대한 '유물론적' 해법과 그에 대한 비판들은, 이미 가브리엘이 충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논쟁을 참조하고 반복한다(그런 점에서 '두 문화'란 허구다. 다만 실제로 작동하는 허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뿐이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자유의지란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 존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그는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인간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이와 대조적으로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절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분하고자 했고, 철학적 인간학에 대항해 반인간주의를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논의는 어째서 우리가 '개념'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 속류유물론에 대항해 '진정한'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념론자가 되는 걸 주저해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레닌의 저 악명 높은 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비과학적인' 책으로 비칠지라도 '이론의 계급투쟁'(알튀세르)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는 책인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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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우주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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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7)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그의 글이 노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경계(트리에스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안테르셀바)를 헤매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군상을 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단조로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함께 조명한다. 이때 마그리스는 늙은이들을 거듭 소환한다. 온화한 늙은이, 소란스런 늙은이, 심술궂은 늙은이까지 가리지 않는다. 


도나우 강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하는 『다뉴브』와 비슷한 스타일로 쓰였지만, 『작은 우주들』에는 그 제목 그대로 '작은 우주들microcosmi'에 대한 무한한 집착이 보인다. 죽어가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공감하지 못한 채 문장과 문장 사이를 겅중겅중 건너뛸 뿐이다. 너무나 낯선 그 우주들 안에 맴도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나이가 들면서 자기 안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광대한 세계를 끄집어내지 못해 안달인 어떤 늙은 남자들에게는 없는 미덕이 있다(그런 남자들의 글은 대부분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의 작은 세계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이론을 창안하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차라리, 코앞에 놓인 꽃의 냄새를 맡고 흘러가는 것들 그 자체의 무상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가 훨씬 낫다.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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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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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돌베개, 2018)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장도비라 뒤의 사진이다. 각 장들은 그 장에서 해설하는 역사책의 펼침 사진으로 시작하는데, 5장에서 주로 다루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페이지가 비어 있다. 저자 혹은 편집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지만, 저자는 독일어 원전을 읽고 인용했다. 새로운 번역과 독자를 기다리며 비어 있는 책을 펼쳐 놓는다(146쪽)."그 사진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세계(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일종의 세계관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이의 마르크스를 향한 감정을 가늠해보게 만든다. 


"역사를 비껴간"이라는 장 제목의 구절처럼 유시민은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역사를 비껴갔다고 주장한다. 냉전의 역사를 '민주주의 vs. 전체주의'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통속적인 자유주의자다. 그가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역사의 종말』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언급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 즉 '종말론'의 취약함을 비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시민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즉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완성이고 인간은 이 완성된 시간 속에서 계속 살리라는 주장 역시 공산주의적 비전만큼이나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쿠야마가 '역사의 방향'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에 '역사의 방향'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 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169쪽)" 유시민의 통속적인 역사 해석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얼마 전에 새로 번역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책의 「4장. 시간과 진보: 또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진보progres가 아니라 과정proces 혹은 과정processus―마르크스는 탁월한 방식으로 이를 변증법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이었다. 진보는 주어진 것이 아니며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보는 과정을 구성하는 적대들의 발전에서 비롯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는 항상 이런 적대들에 상대적이다. 그런데 과정은 (정신주의적인) 도덕적 개념도 아니고 (자연주의적인) 경제적 개념도 아니다. 과정은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과정은 헤겔을 넘어 모순은 화해 불가능inconciliable하다는 관념으로의 회귀 위에 구축되는 만큼이나 논리적이며, 또한 과정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들', 그러니까 자신의 필연성을 자신의 표면적 반대물, 즉 노동의 영역과 경제적 삶의 영역에서 찾아야 하는 만큼 정치적이다(『마르크스의 철학』 234~235쪽). 


거칠게 말해서 마르크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직선적인 시간관이라기보다는 경향과 반反경향이 격렬하게 대립하며 얽혀 있는 변증법적 시간관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역사의 방향(진보)'이라는 추상에 대한 마르크스 혹은 발리바르의 대답은 아마도 역사는 매순간 투쟁/대립을 통해 새로 생성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에 대립하는 것으로 '실제' 내지는 '사실fact'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추상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사실을 통해 추상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다). 그렇지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이 이렇게 명료하게 나타나지만은 않으며 진보의 도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발흥이라는 '나쁜 방향'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할 때, 『공산당 선언』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철학으로 부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추상에 대립하는 구체의 세계 속으로, 바로 노동과 계급투쟁의 실제로 파고든다. 바로 여기서 '경향'과 '반경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타난다. 유시민이 『공산당 선언』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나란히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론'을 비판할 때, 『자본』을 회피하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탐색할 때 그가 배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바로 '적대'라는 문제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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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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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그로이스는 『코뮤니스트 후기』(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즉 스탈린주의)야말로 공산주의의 중핵이라는 테제를 기꺼이 떠안는다. 그는 소비에트 국가가 플라톤 식의 '철인 왕국', 즉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의 처참한 실패였다는 우파의 비난을 적극 긍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로이스는 바로 그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이며, "흰 소도 일 잘하고 검은 소도 일 잘한다"는 식의 논리야말로 총체성을 손안에 그러쥐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레닌 사후의 노선 투쟁에서 좌파(트로츠키)와 우파(부하린)에 대항해 승리한 중앙파(스탈린)가 좌우파의 노선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이 대목은 스탈린이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당신들은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트로츠키는 저 '평범하고 음험한 사내'가 그의 주특기인 회유와 협박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오염시켰다고 비난했지만, 스탈린은 그 스스로가 레닌의 원칙, 즉 변증법에 충실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공산주의를 대질하면서 구소련이 '언어의 왕국'이자 '철학의 왕국'이었다고 기술하는 대목,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서구보다 앞서 '언어학적 전회(기호학적 전회)'를 선취했다고 해석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그로이스는 그렇게 우파의 비난("스탈린은 레닌의 충실한 제자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모두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광포한 독재자들이라는 점에서 똑같다")을 뒤집어 놓는다. 그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비판'은 파시즘이 충분히 '전체(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보다 불충분한 이념일 수밖에 없음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몸짓(데리다)이나 '영원한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긍정하는 입장(바디우)을 넘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해체가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있다. 이와 같은 예정설은 그로이스가 이 책에서 그토록 비난하는 '소피스트적인 말하기', 즉 궤변처럼 들린다. 그로이스가 드러내는 사유의 광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건너뛴 채 '만약if'만을 강조하는 태도("만약 레닌이 10년만 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면…"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면…" "스탈린 혁명 없는 혁명이 가능했다면…")보다 이 편이 우리를 더욱 사유하게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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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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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의미망’으로 대체할 때, 이곳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주장을 상당히 깔끔하게 전개한다. 변증법을 ‘슈퍼 생각’이라며 떨쳐버리려는 시도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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