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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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돌베개, 2018)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장도비라 뒤의 사진이다. 각 장들은 그 장에서 해설하는 역사책의 펼침 사진으로 시작하는데, 5장에서 주로 다루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페이지가 비어 있다. 저자 혹은 편집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어 있지만, 저자는 독일어 원전을 읽고 인용했다. 새로운 번역과 독자를 기다리며 비어 있는 책을 펼쳐 놓는다(146쪽)."그 사진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세계(사)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일종의 세계관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이의 마르크스를 향한 감정을 가늠해보게 만든다. 


"역사를 비껴간"이라는 장 제목의 구절처럼 유시민은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역사를 비껴갔다고 주장한다. 냉전의 역사를 '민주주의 vs. 전체주의'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역사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통속적인 자유주의자다. 그가 마르크스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역사의 종말』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언급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 즉 '종말론'의 취약함을 비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시민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즉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완성이고 인간은 이 완성된 시간 속에서 계속 살리라는 주장 역시 공산주의적 비전만큼이나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쿠야마가 '역사의 방향'이라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도 이야기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에 '역사의 방향'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되살려 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169쪽)" 유시민의 통속적인 역사 해석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얼마 전에 새로 번역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책의 「4장. 시간과 진보: 또다시 역사철학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진보progres가 아니라 과정proces 혹은 과정processus―마르크스는 탁월한 방식으로 이를 변증법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이었다. 진보는 주어진 것이 아니며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진보는 과정을 구성하는 적대들의 발전에서 비롯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보는 항상 이런 적대들에 상대적이다. 그런데 과정은 (정신주의적인) 도덕적 개념도 아니고 (자연주의적인) 경제적 개념도 아니다. 과정은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과정은 헤겔을 넘어 모순은 화해 불가능inconciliable하다는 관념으로의 회귀 위에 구축되는 만큼이나 논리적이며, 또한 과정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들', 그러니까 자신의 필연성을 자신의 표면적 반대물, 즉 노동의 영역과 경제적 삶의 영역에서 찾아야 하는 만큼 정치적이다(『마르크스의 철학』 234~235쪽). 


거칠게 말해서 마르크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직선적인 시간관이라기보다는 경향과 반反경향이 격렬하게 대립하며 얽혀 있는 변증법적 시간관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역사의 방향(진보)'이라는 추상에 대한 마르크스 혹은 발리바르의 대답은 아마도 역사는 매순간 투쟁/대립을 통해 새로 생성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에 대립하는 것으로 '실제' 내지는 '사실fact'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추상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사실을 통해 추상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다). 그렇지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시간관이 이렇게 명료하게 나타나지만은 않으며 진보의 도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발흥이라는 '나쁜 방향'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숙제로 남겨져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할 때, 『공산당 선언』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철학으로 부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추상에 대립하는 구체의 세계 속으로, 바로 노동과 계급투쟁의 실제로 파고든다. 바로 여기서 '경향'과 '반경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타난다. 유시민이 『공산당 선언』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나란히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론'을 비판할 때, 『자본』을 회피하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탐색할 때 그가 배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바로 '적대'라는 문제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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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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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그로이스는 『코뮤니스트 후기』(문학과지성사, 2017)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즉 스탈린주의)야말로 공산주의의 중핵이라는 테제를 기꺼이 떠안는다. 그는 소비에트 국가가 플라톤 식의 '철인 왕국', 즉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의 처참한 실패였다는 우파의 비난을 적극 긍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로이스는 바로 그 모순과 역설이야말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이며, "흰 소도 일 잘하고 검은 소도 일 잘한다"는 식의 논리야말로 총체성을 손안에 그러쥐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레닌 사후의 노선 투쟁에서 좌파(트로츠키)와 우파(부하린)에 대항해 승리한 중앙파(스탈린)가 좌우파의 노선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이 대목은 스탈린이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당신들은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트로츠키는 저 '평범하고 음험한 사내'가 그의 주특기인 회유와 협박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오염시켰다고 비난했지만, 스탈린은 그 스스로가 레닌의 원칙, 즉 변증법에 충실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와 언어를 매개로 하는 공산주의를 대질하면서 구소련이 '언어의 왕국'이자 '철학의 왕국'이었다고 기술하는 대목,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서구보다 앞서 '언어학적 전회(기호학적 전회)'를 선취했다고 해석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그로이스는 그렇게 우파의 비난("스탈린은 레닌의 충실한 제자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모두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광포한 독재자들이라는 점에서 똑같다")을 뒤집어 놓는다. 그는 지젝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비판'은 파시즘이 충분히 '전체(주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보다 불충분한 이념일 수밖에 없음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내려는 몸짓(데리다)이나 '영원한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긍정하는 입장(바디우)을 넘어,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해체가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있다. 이와 같은 예정설은 그로이스가 이 책에서 그토록 비난하는 '소피스트적인 말하기', 즉 궤변처럼 들린다. 그로이스가 드러내는 사유의 광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건너뛴 채 '만약if'만을 강조하는 태도("만약 레닌이 10년만 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면…"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면…" "스탈린 혁명 없는 혁명이 가능했다면…")보다 이 편이 우리를 더욱 사유하게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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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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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의미망’으로 대체할 때, 이곳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주장을 상당히 깔끔하게 전개한다. 변증법을 ‘슈퍼 생각’이라며 떨쳐버리려는 시도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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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론 - 전면완역개정판 카이로스총서 41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김만수 옮김 / 갈무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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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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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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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컵 솔의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메멘토, 2016)는 회계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회계를 통한 재무적 책임성이 국가와 문명의 번영과 몰락에 매우 큰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이때 재무적 책임성으로 번역된 accountability는 회계accounting를 통한 책임성responsibility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회계(학)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면서 '건강하고 올바른 자본주의'를 제시하는 등 책에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주장이 들어 있다. 국내 학자가 쓴 부록에는 개성 상인의 복식부기 발견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자생적 자본주의'까지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본격적으로 창안된 복식부기 회계에 신에 대한 믿음이 녹아 들어 있고(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언급했듯이 죄schuld와 빚schulden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회계가 절대왕정 시기를 거치며 통치술로 활용되었다는 것, 근대 회계감사가 철도의 발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숫자와 제국주의 통치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행위자연결망이론에서 이야기하는 action at distance와 governing at distance) 등 베버와 푸코에 익숙한 독자라면 회계와 관련된 꽤 풍부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저자는 회계와 숫자를 비非정치적인 것 내지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다룬다. 하지만 회계는 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이를 '객관화된 믿음' 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믿음은 이중장부와 부실회계, 회계사의 자의적인 판단과 기업과의 유착 등으로 의심받는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이내 '더 올바른 회계 관행과 감사'를 요구하는 것으로 봉합된다. 그렇다면 회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회계라는 장치 없이 우리를 둘러싼 사물을 다룰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홍기빈 샘 같은 이들이 (칼 폴라니를 비롯한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안했던) 사회주의적 회계 내지 사회적 회계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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