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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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을 읽은 뒤 페리 앤더슨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1977)(『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평의회 사상과 이행전략』(김현우·신진욱·허준석 편역, 갈무리, 1995)에 수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일종의 연구 노트이기도 한 유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에게 토대 내지 생산양식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텅 빈 개념이며 '진지전'은 수정주의와 다름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때 알튀세르는 전형적인 스탈린주의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프랑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사실상 폐기하고 선거를 통한 집권을 지향하는 유로코뮤니즘 노선을 따라가는 데 대한 비판과 연관된다.(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은 그의 또 다른 유고집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알튀세르를 스탈린주의자라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사회주의)를 고수하되 스탈린적 편향에 대한 반편향이 우익기회주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뿐이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는 연구 노트라는 점에서 논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김석민 옮김, 중원문화, 2010)의 책 소개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고, 즉 우리의 실수는 출판하지 않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실수는 출판한다"라는 알튀세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실수라는 말을 절대적 오류로 이해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옳다.) 


한편 페리 앤더슨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은 알튀세르가 『검은 소』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을 시기(대략 1977~1978년경)에 쓰인 글로, 그람시 논의의 공백 내지 약점을 좀 더 정세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그람시는 헤게모니 개념의 의미를 프롤레타리아의 농민 지도(레닌)에서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로 이동시켰으며, 이는 러시아와는 다른 환경하의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문제는 헤게모니의 의미가 그람시의 『옥중수고』 안에서 조금씩 다르게 바뀜에 따라 개념의 혼동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앤더슨은 무엇보다 (알튀세르라면 '부르주아 독재'라고 불렀을)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중핵인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이 부재하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헤게모니 개념이 지배의 두 가지 측면인 강제와 동의 중 후자에 가깝게 쓰일 때 '부르주아 독재'의 난폭한 측면(군대와 경찰)을 망각해버리기 쉽다는 것도 짚어낸다. 아마도 당대의 유로코뮤니스트들이 그람시를 자신들의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한 것도 이런 망각 때문일 터다. 앤더슨은 '기동전 대 진지전'이라는 구도를 선취했던 논쟁으로 카를 카우츠키의 '지구전략'과 그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진지전 논의에 스며 있는 수정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앤더슨이 부연하듯이 그람시는 결코 수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끝까지 고수한 공산주의자였다. 다만 그람시의 헤게모니-진지전 개념의 공백("언제 그리고 어떻게 진지전에서 기동전으로 전환할 것인가?")은 진지전 논의를 보다 전략적으로 독해해야 할 이유가 된다. 


알튀세르와 앤더슨 모두 (그람시의 의도와는 상당히 멀어진) 헤게모니-진지전 개념의 수정주의적 편향을 지적한다. 이들이 겨냥하는 것은 그람시 자체라기보다 말 많고 탈 많은 저 유로코뮤니즘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알튀세르는 그람시를 완전한 유로코뮤니스트로 규정하다시피 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그람시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긴장을 해설함으로써 '반反그람시주의자 알튀세르'라는 상을 교정한다. 알튀세르는 그람시 독해를 통해 「모순과 과잉결정」(1962)을 썼지만 마오쩌둥 독해(보다 정확하게는 마오의 『모순론』 독해)를 통해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1963)를 썼다는 것, 그 때문에 그람시를 보다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읽는 동안 그는 다시 그람시로 돌아가며 진동했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에서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모순과 과잉결정」의 주에서 그람시를 자신의 기획에 선행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했던 알튀세르가 왜 그 후에 그람시를 마오로 대체하고 마오로부터 대량으로 차용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질문을 복잡화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아마도, 질문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닌 한 방향으로 정위시킬 수 있게 해줍니다"라고 말한 뒤, "그리하여, 이 시점에 그는 그람시에 반대하여 자신을 내내 방어하지만, 반대로 그가 마키아벨리에게로 돌아갈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그람시를 찬양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람시의 사고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 그것으로부터 조금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라고 지적한다.) 


유로코뮤니즘은 1970년대 말, 그러니까 '볼커 쇼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반격'이 있기 직전에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에스파냐 공산당 등 유럽의 유력 공산당들이 펼친 개혁주의 프로그램을 느슨하게 지칭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 당국가 외에, 적어도 자코뱅과 볼셰비키의 후예라고 할 만한) 공산당이 사라진 지금, 혁명이냐 개혁이냐 라는 식의 질문은 너무나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발리바르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과 한 대담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본다. "이 시대의 우리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당신이 개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순간 당신은 혁명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저는 점점 더 문제를 이렇게 제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 거기서 저는 영속혁명이라는 마르크스의 관념 또는 부단혁명(不斷革命)이라는 마오의 관념을 다시 취해야 하며, 그것을 분명 공산주의 전통 전체가 치명적으로 비난한, "최종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모든 것이다"라는 베른슈타인의 유명한 말과 혼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양자를 종합할 경우, 제가 보기에 그람시의 관심사들에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어떤 것을 얻게 됩니다." 


발리바르가 이와 같이 말한 것도 당이 부재한다는 현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람시에게 이탈리아 공산당이 있었고 알튀세르에게 프랑스 공산당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당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발리바르를 빌자면 '프랑스식 인민전선' 노선 위에 있었던 알튀세르가 진지전과 인민전선을 동일시한 이론가 그람시를 비판할 때, 그들에게 존재하던 당이, 그리고 그들이 대면하고 숙고했던 인민이 지금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상기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텍스트를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와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지 않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1)」 

http://en-movement.tistory.com/183?category=733236 


「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2)」

http://en-movement.tistory.com/184?category=7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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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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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우리 시대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이다. 문화비평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범해진 지금 시대에, 그리고 지젝식의 자본주의 비판이 이제는 심드렁해진 이들을 향해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한 반복의 제스처가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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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모던 -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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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은 제목과 부제 그대로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을 1930~40년대에 세워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경험에서 찾는다. 식민주의의 다면성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하지만 저항과 타협의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기획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중간 엘리트 내지 준엘리트의 만주국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하고(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국군 출신들의 영향력 등), 30~40년대 만주-60~70년대 남한-00~10년대 남한의 발전을 너무 쉽게 연결하고 있어 논의가 종종 비약한다(단적으로 이른바 'K-POP'의 수출과 한국 영화 발전을 만주국 경험에서 이어진 것으로 서술하는 것 등).


이 책에서 주로 지적할 부분은 1. 한국 개발 체제의 형성에 있어 '지도층'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top-down 식의 서술, 2. 만주국 경험과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 경험이 남한 개발 체제의 형성에 미친 영향력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제(이는 만주국의 독립성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3. 계획경제 내지 '통제경제'의 도입에 있어 만주국을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매개라기보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는 것, 4. 연구 대상에 깊이 개입하면서 발생할 법한, 만주국과 남한 개발 체제의 반공주의를 답습하는 역사 서술('전체주의 체제'로서의 소비에트와 북한 서술) 등을 들 수 있다. 남북한 공히 식민주의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탈식민은 한국인의 영원한 숙제라고 보는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은 주요한 참조점이되 역사의 지형을 그리기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될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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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뇌가 아니다 - 칸트, 다윈, 프로이트, 신경과학을 횡단하는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2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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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과학주의, 그중에서도 뇌과학의 과학주의를 '신경중심주의'라고 명명하고 비판한다. 그를 따르자면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철학자다. 가브리엘은 셸링의 문구 "모든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자유다"에 따라,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뇌과학에 맞선다. 실험과 물질적 증거를 바탕으로 사고함을 강조하는 자연과학자는 논증의 세계로 내려오는 순간 철학적 논쟁의 장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다. 의식과 자기의식, 정신과 영혼이라는 문제에 대한 '유물론적' 해법과 그에 대한 비판들은, 이미 가브리엘이 충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논쟁을 참조하고 반복한다(그런 점에서 '두 문화'란 허구다. 다만 실제로 작동하는 허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뿐이다). 


여기서 가브리엘은 자유의지란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 존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그는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인간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이와 대조적으로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절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분하고자 했고, 철학적 인간학에 대항해 반인간주의를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논의는 어째서 우리가 '개념'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 속류유물론에 대항해 '진정한'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념론자가 되는 걸 주저해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레닌의 저 악명 높은 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비과학적인' 책으로 비칠지라도 '이론의 계급투쟁'(알튀세르)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는 책인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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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우주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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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7)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그의 글이 노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경계(트리에스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안테르셀바)를 헤매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군상을 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단조로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함께 조명한다. 이때 마그리스는 늙은이들을 거듭 소환한다. 온화한 늙은이, 소란스런 늙은이, 심술궂은 늙은이까지 가리지 않는다. 


도나우 강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하는 『다뉴브』와 비슷한 스타일로 쓰였지만, 『작은 우주들』에는 그 제목 그대로 '작은 우주들microcosmi'에 대한 무한한 집착이 보인다. 죽어가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공감하지 못한 채 문장과 문장 사이를 겅중겅중 건너뛸 뿐이다. 너무나 낯선 그 우주들 안에 맴도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나이가 들면서 자기 안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광대한 세계를 끄집어내지 못해 안달인 어떤 늙은 남자들에게는 없는 미덕이 있다(그런 남자들의 글은 대부분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의 작은 세계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이론을 창안하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차라리, 코앞에 놓인 꽃의 냄새를 맡고 흘러가는 것들 그 자체의 무상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가 훨씬 낫다.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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