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종말론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4
야콥 타우베스 지음, 문순표 옮김 / 그린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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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타우베스가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드러낸 종말론적 사유를 더욱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서구의 사유를 묵시주의적-영지주의적 종말론으로 꿰어내는 패기가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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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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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스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로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소비에트 체제가 갑작스럽게 무너졌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납득해버린 동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소비에트의 다중적인 담론적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꼭 수행성 이론과 들뢰즈/가타리를 끌어와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억압 대 저항, 질서 대 자유, 위선 대 정의라는 '전체주의' 소련 비판을 훌쩍 뛰어넘어 다양한 문화적 실천이 지배적인 담론에 얼마나 크게 의지하며, 그와 동시에 지배적인 담론을 본래의 의도와 달리 내파할 수 있다는 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사회주의적 가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도 이를 일상 속에서 갱신하고자 했던 인민의 이야기(보일러실 록커, 단파 라디오 엔지니어, 엑스레이판에 록음악을 녹음하는 애호가, 선전물을 쓰는 동시에 록콘서트를 기획하는 콤소몰 활동가)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힘있게 논의를 펼치는 곳은 후반부에 해당하는 4~7장이다. 여기서 아이러니와 역설은 1960~80년대의 '후기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무엇보다 '썩은 개그의 해석학'이라고 할 만한 <7장 데드 아이러니: 네크로미학, 스툐프, 그리고 아넥도트>는 '공산주의 유머'를 반공주의적으로 읽는 우리의 시선을 교정해준다.


유르착은 페레스트로이카(1985년 이후의 '개혁' 조치)가 인민의 비공식적인 수행적 활동을 공식화해 권위적 담론의 취약함을 그대로 폭로함으로써 원래 의도와 달리 체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고 본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렇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그저 당 지도부의 실수이기만 한 것인가? 페레스트로이카는 '후기 사회주의'의 담론적 실천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유르착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당 지도부가 아무런 '개혁' 없이 현상유지만 잘했어도 다중적인 소비에트가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과연 그런가? 또한 '체르노빌 전투'를 비롯한 경제적·생태적 위기는 소련의 해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라는 질문도 떠오른다. (한편 "모든 게 영원할 거라는 완전한 인상"이라는 말에서 뽑아낸 '영원성'이라는 시간 감각은 '소비에트 리얼리즘' 대신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소비에트 해체의 공백은 자본주의가 채웠다. 그런데 자본주의 해체의 공백은 무엇이 채울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소비에트가 없으므로 남은 건 공멸뿐인가?) 그러나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질문은 다른 데서 던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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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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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대 저항, 질서 대 자유, 위선 대 진실이라는 이분법을 깨며 구소련 연구를 갱신한 역작. 우리야말로 자본주의가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만큼, 먼저 ‘포스트‘를 지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것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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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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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단편은 역시 「관내분실」. 다시 읽으니 작가의 세심하고 예민한 감각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구체화시킨 「감정의 물성」과, 사유의 외부성을 긍정하는 듯한 「공생 가설」도 좋았다. 사랑과 질투심을 함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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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퀑탱 메이야수 지음, 엄태연 옮김 / 이학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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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은 『유한성 이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를 간략하게 보충하는 책처럼 보인다. 메이야수는 흄의 당구공 문제에 대해 포퍼(과학적 사실과 위배되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칸트(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카오스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와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사라지더라도 인식은 남는다. 당구공에는 물리학적 인과성에 따라 움직일 아무런 필연성이 없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우연성을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과학의 재현 가능성을 위배하는 사실은 존재하며, 극단적인 우발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존재를 의식하고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메이야수가 "실제로 이 법칙들이 미래에 변화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데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도 없으며,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그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16~17쪽)고 주장할 때, 그는 은연중에 경제 지표의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경제 지표는 미래를 확증하지 못한다.)


한편 메이야수가 과학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에서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 또는 '과학 밖 소설'을 발견할 때, '과학 밖 소설'은 마치 비평적 용어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과학 밖 소설'은 세계에 대한 과학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사변적 도구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과학 밖 소설의 가장 근접한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1943)을 들 때 나타난다. 『대재난』은 전기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2052년을 배경으로 이전까지 당연시되던 과학이 사라져버린 세계와 그 안에서 분투하는 인간들을 묘사한다. 오늘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만한 세계가 펼쳐지고, 주인공은 자신의 고향인 오트프로방스로 돌아가 전원적 삶을 개척한다. 도시문명에 대한 혐오와 전원생활에 대한 이상화는 그 소설이 1940년대 프랑스 괴뢰정부의 반혁명적 공기를 호흡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소설의 반혁명적 분위기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20년대 극우파 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활동한 레옹 도데는 과학을 비방하면서 "우리는 전기電氣 과학은 마치 전기 자체가 그런 것처럼 어떤 지적인 누전에 의해 소멸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90쪽)고 말한다. 이때 메이야수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방데반란이라는 역사적 경험까지 파고들어가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가 나치의 침략으로 갑작스럽게 패배했듯이, 누구나 "그럴 리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전혀 다른 일이 발생한다. 여기서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메이야수의 토픽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세계'에서는 쿠데타도 고문도 학살도 없을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 (탄핵정국과 기무사의 계엄령 준비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무런 확실성도 주어져 있지 않다. 기후변화도 지진도 노심융용도 지금 당장 벌어질 수 있다.(반대로 지금 당장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메이야수는 우리가 오직 우연성만이 확실한,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이를 직시해야만 한다고 촉구한다. 절대적 존재자나 이성적 확실성에 의존하지 않은 채 우연적이고 환영적인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메이야수의 사변은 근대과학의 파국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중세의 '신이 부재하는 신학'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메이야수는 과학의 무능력을 겨냥하는 듯하지만, 그의 맞수는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적 사회주의자' 또는 '역사유물론자', 바로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야말로 '법칙'과 '경향'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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