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그림을 꾸준히 들여다 보다가는, 절로 입이 열려 감탄의 한숨이 나오며 벙찐 모양새가 되는 꼴을 막을 수가 없다. 특히 <만폭동도>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박연폭포>에서는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그림 밖으로 쏟아져나오고, <인왕제색도>에서는 비에 젖은 숲내음이 물큰 어려 코끝이 벌름거린다. 다행히도 <원점소실법>이 아닌 그의 그림은 주체를 움직인다. 만폭동의 계곡 줄기에 쏠려가는 몸뚱이, 박연 폭포 밑에서 절로 고개를 치켜들게 되는 몸뚱이, 인왕산 머리 맡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주눅이 드는 몸뚱이 ㅡ 앞에 있는 그림은 한사코 대상(정지 및 수동)이기를 거부한다. 겸재의 박력과 섬세함은 하나의 동인(動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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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atentlessons.com/brunelleschi's%20dome.jpg

 


Brunelleschi Dome Duomo 4806
from top of Bell Tower, stormy day
17-35AFS, 17mm, f/8

http://www.digital-images.net/Images/Florence/Art_Archit/BrunelleschiDome_Duomo_4806.jpg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4.15]

피렌체 출생. 15세기 이탈리아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세례당 출입문의 양각()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기베르티의 작품이 최종안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磔)》(1409?)과 더불어 브루넬리스키는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콩쿠르에 낙선한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고대 로마건축을 연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다시 유명해진 것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대성당의 커다란 돔(1436 낙성식) 제작을 의뢰받고, 이를 성공적으로 건축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었으며 피렌체에 새로운 미술을 기운을 북돋는데 역활하였다. 또한 그는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고아양육원: 1421∼1444)에서는 9단의 계단 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로렌초성당(1418 이후)과 산토 스피리토성당(1436 이후)에서는 저마다 질서 있고 지적()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데 이는 산로렌초성당의 성기실(: 1428), 파치가()의 예배당(1429 기공),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1434 기공)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특히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성당은 순전히 집중식 형태를 노려서 건립된 것으로 그의 건축양식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1437년에 공사가 중지되어 지금은 1층 벽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에 수시로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구축()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부르넬레스키는 이런한 건축의 업적이외도 회화에서 원근법(perspective)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미술의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피렌체 사진

http://www.digital-images.net/Gallery/Scenic/Florence/Art_Archit/body_art_archit.html

 

<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 p199

1401년 15세기로 접어드는 첫해에 피렌체에서는 공화국 정부가 주최하는 경진 대회가 시민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도시가 자랑으로 삼고 있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산조반니 세례당에 새로 만들어질 문을 장식하는 조각가를 선정하기 위한 대회였다. 과제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이었고, 옆면이 고딕풍으로 장식된 틀 안에 든 청동판자에 돋을새김으로 만들어 넣으라는 것이었다. 당대 유명한 미술가들이 앞다투어 참가했던 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한  사람은 아직 이름 없는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부르넬레스키였다. 두 사람의 작품은 참신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 모두 중세 고딕풍(밀라노풍)의 미학에는 반기를 드는 입장이었으나, 기베르티는 인문주의의 교양과 고전 미술의 면밀한 연구를 토대로 해서 고딕 미학으로부터 온건하게 이탈했던 것에 비해 부르넬레스키는 독창적이고 혁명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아르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기베르티는 면과 삽화를 쌓아 가면서 공간을 '서술'한다. 부르넬레스키는 운동의 동시성, 그 격돌과 역동적인 균형으로 공간을 '구축'한다. 기베르티의 공간은 자연 공간으로 그 안에 일정한 사실이 생겨난다. 부르넬레스키는 자연 공간을 배제해서 허공을 만들어 내고, 그 허공 속에 인간의 육체와 자세와 행동으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한다.

 

새로운 공간 구축 원리란 뒤에 부르넬레스키가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원근법'이었다. 부르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은 찬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였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은 아직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했고 인문주의의 새로운 사조에 밀착한 기베르티의 작품에 대한 평이 더 좋았다. 이에 화가 난 부르넬레스키는 평가 받기를 거부했다.

p212

1418년, 피렌체 대성당 돔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이번에도 기베르티와 부르넬레스키가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고, 부르넬레스키가 이겼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라고 일컬어지는 피렌체 대성당은 13세기에 거장 아르노르포 디 캄피오가 설계하고 착공한, 거대한 고딕 건축물로서 14세기에는 지오토의 설계로 종루가 완성되었다. 큰북처럼 생긴 돔의 토대도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여서 지붕을 제작해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직경이 50m나 되는 거대한 돔을 석재로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고, 더구나 그것을 지상 100m 높이까지 올리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 불가능하게 생각됐다. 파도바나 베네치아의 대상당처럼 여러 개의 돔을 조립하거나, 첨탑을 여럿 세우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은 고딕 양식의 틀을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었다.

부르넬레스키는 단일한 원형으로 된 큰 지붕을 설계했다. 보기에는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부르넬레스키는 계란을 깨서 껍데기를 책상 위에 세워 놓고 그것을 예로 들면서기법을 설명했따. 심사 위원이 이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의 유적에서 고대 건물들의 건축 방법을 면밀히 연구한 부르넬레스키는 자신이 있었다. 그 때까지는 돔이 정점으로 만들어지려면 첸티네라는 틀로 지탱을 두어야 했지만 그는 이미 제작 중인 돔이 첸티네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설계뿐만 아니라 이 대담한 돔 공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맡기게 되었다.

같은 해 부르넬레스키는 피렌체 시내에 있는 산로렌초 성당의 설계에도 착수했다. 이 성당은 그의 원근법 이념을 구체화시킨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원근법이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자연을 더욱 충실하게 묘사하는 방법도 아니고, 2차원의 평면에 깊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술도 아니다. 원근법은 인간 이성이 자연 공간이나 시각의 모든 우연성을 배제하고 합리적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구축된 단일 구도다. 이 구도 속에서 모든 대상은 비례와 균형 관계에 따라 배치되는 것이다. 공간은 무수한 방향으로 연장될 수 있지만 인간의 이성은 그것을 세 개의 직선이 교차하는 축 안에 귀착시킬 수 있다. 산 로렌초 성당은 가로, 세로, 높이라는 세 개의 직선 축을 기본으로 구성되었고, 모든 건축 요소가 비례와 균형 관계 속에서 배치되었다. 이렇게 미술은 이 시대 '지식'의 최첨단을 개척하는 분야가 되었으며, 산로렌초 성당은 원근법의 교과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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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가톨릭 귀족과 시민들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파리에서 위그노(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한 사건(1572. 8. 24/25).

이 사건은 16세기말 프랑스 전역을 시끄럽게 했던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가운데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뒤에는 프랑스 궁정 내의 정치적·종교적 알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장군은 스페인에 대항해 저지대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지원했다. 이는 내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9세가 1572년 여름에 승인하려 했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샤를 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국왕에 대한 콜리니 장군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당시 가톨릭교도인 기즈 가문 사람들이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고 짜놓은 계획을 승인해주었다. 기즈가 사람들은 콜리니 장군이 프랑수아 드 기즈의 살해사건(1563)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572년 8월 18일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위그노였던 나바라의 엔리케(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하게 되어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로부터 4일 후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콜리니 장군은 상처만 입는 데 그쳤다. 흥분한 위그노들을 달래기 위해 정부측은 암살음모를 조사하기로 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신이 연루된 사실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튈르리 궁에서 일단의 귀족들과 은밀히 만나, 당시 결혼식 축하행사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샤를 9세를 설득해 이 계획의 승인을 얻어냈다. 8월 23일 밤 파리 자치지역 요원들이 루브르에 소집되고 각자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24일 동트기 직전 생제르맹로세루아의 종이 울리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콜리니 장군이었는데 그는 앙리 드 기즈가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나바라에서 온 참석자들도 살해되었으며 나바라의 엔리케와 콩데 공 2세인 부르봉의 앙리 1세는 간신히 살아 남았다. 위그노들의 집과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참히 살해당했으며 수많은 시체들이 센 강에 내던져졌다. 25일 살육행위를 중단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파리에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으며 지방까지 확산되어 루앙·리옹·부르주·오를레앙·보르도에서도 위그노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해 10월까지 지속된 소요사태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가톨릭 측에 따르면 2,000명에 이르고,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위그노 쉴리 공작은 7만 명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희생자 수를 파리에서만 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사건에 관한 소식을 듣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환영하는 입장을 나타냈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사건을 기념해 메달을 주조하도록 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국가의 수장으로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있던 샤를 9세는 왕권에 대항한 위그노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기대했던 대로 위그노는 무기력해지지 않고 오히려 학살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교도와 위그노 사이에 증오가 되살아났으며 새로이 적대감정이 싹텄다. 그때 이후로 위그노는 왕권에 복종하라는 장 칼뱅의 원칙을 버렸으며 특정한 상황에서는 반란세력과 폭군을 살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92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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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san)이 그녀의 시를 프랑스의 여왕이자 샤를 7세의 부인인 바바리아의 이자벨에게 헌정하고 있다. 국왕 침실의 벽에 걸려 있는 휘장은 바바리아의 다이아몬드 무늬를 따라 장식된, 프랑스 왕조를 나타내는 백합 문장을 한껏 과시한다. 안락하고 천장이 탁 트인 개인 공간, 여닫이 창문, 양탄자가 깔린 바닥, 등받이 의자들, 이 모든 것들은 물질적인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중세 때 왕의 총애를 받는 귀족 집안의 딸이었으나 미망인이 된 크리스틴 드 피장(1365~1430)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바뀜으로서 비로소 소외된 여성들의 아픔에 눈을 뜨게 된다. 이를 계기로 여자, 더구나 남편이 없는 여자로 자신의 존재조차 지워질 위기에 처해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저작인 《여성들의 도시》를 썼다.

크리스틴 드 피장(1365~1430)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태생의 여성 점성술사이자 의사다. 당시의 점성술사는 오늘날처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천체, 수학, 지리학,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성이 남성의 종속물로 여겨졌던 중세에 여성의 소외에 관심을 둔 저작물을 발표했다.

<열정의 철학>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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