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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ㅣ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새해 첫 책으로는 코니 윌리스의 단편집 『화재 감시원』을 읽었다. 코니 윌리스의 작품 중 이런저런 상을 수상한 단편 열 편을 묶은 『The Best of Connie Willis』를 번역한 책으로, 여기에는 다섯 편만 수록돼 있고 나머지 다섯 편은 최근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여왕마저도』에 수록돼 있다.
코니 윌리스는 영미권 SF의 거장 중 하나고, 여기 실린 작품들이 수상한 상은 모두 SF계에서 명망 높은 상이며, 뒤표지에는 "가장 유쾌하고 수다스러우며 그러면서도 놀랍도록 매혹적인 SF"라는 문구가 실려 있지만, 사실 딱히 SF 단편집이라고 강조하여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이건 SF의 외연과 내포를 엄격히 규정하며 '진정한 SF'를 고집하는 순수주의자의 시비는 아니다. 그저 『반지의 제왕』을 SF라고 부르려 애쓰지 않듯, 이 단편집에는 굳이 SF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작품들도 있다는 얘기일뿐이다.
「리알토에서」는 과거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으나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아 읽지 않았던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리알토 호텔에서 열린 양자 물리학회에 참석한 물리학자가 진지한 학구열을 품고 어떻게든 열성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려 하지만 온(미시?)우주의 기운이 이를 방해하는 요절복통 코미디이니 처음 읽을 때 쉬이 집중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무렇게나 말이 안 되는 난장판을 벌인 다음 그게 양자역학의 상태라고 끼워 맞추는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는데, 책을 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며 좀 더 집중해서 들여다보았더니 보기보다는 한결 짜임새 있는 작품이었다. 훈훈하기 그지없는 작가 사진과 더불어 이 작품을 맨앞에 배치한 건 코니 윌리스의 성정을 안내하기 위함이었을까. 사람들의 고집, 눈멂, 무책임함, 무신경함, 자포자기, 과민, 염려가 빚어내는 불통의 현장을 한숨 쉬거나 비웃지 않고 그래도/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인간의 조건처럼 바라보는 넉넉함이 있다. 문득 홍상수 영화가 생각난다. 하하하.
그래도 이런저런 SF에서 접한 정도 외에는 양자역학에 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자역학을 다룬 책을 읽고 싶었는데, 누군가 『빛의 물리학』을 추천하기에 바로 주문했다.
「나일강의 죽음」은 코니 윌리스가 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포 소설이다. 하지만 공포 소설로 분류한다고 해도 그 공포는 역시 코니 윌리스 스타일의 수다와 불통을 통해 전달된다. 평범하고 시끌벅적했던 주변 풍경이 평범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 조금씩 낯설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면서 불안이 쌓여가는 공포. 다만 공포를 끌어내는 데에 몰두한다기보다는 공포로 갈까 유머로 갈까 이상함 속에서 심상함을 볼까 심상함 속에서 이상함을 볼까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작중 상황을 한두 가지 감정이나 상황으로 규정하고 해석하지 않으려는 이 무정형의 상태 자체를 공포로 볼 수도 있겠지. 그런 방식도 나쁘지는 않다. 꼭 두려움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꼭 공포 소설로 분류할 필요도 없고. 다만 후기에서 코니 윌리스가 공포물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하고 있는 터라, 공포물의 여러 양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으스스함보다는 엉뚱함이나 당혹감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리알토에서」에 이어 「나일강의 죽음」을 읽은 뒤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이나 그 영화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중 언급되는 〈두 세계 사이Between Two Worlds, 1944〉도 검색해 보았으나 미국에서 영어 자막 없는 워너아카이브콜렉션 DVD로만 나와 있어서 근시일 내에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짧고 단편다운 단편이다. 작가는 세계의 한 장면을 도려내어 느닷없이 내민다. 독자는 거꾸로 그 한 장면을 더듬어 가면서 서서히 세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상황처럼 보이던 풍경은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벌어진 비일상적인 상황이었음이 드러난다. 책장을 넘기면서 무심하게 혹은 석연찮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마음에만 담아놓고 지나쳤던 부분들의 의미가 뒤늦게 쏟아져 들어온다. 소란스러움은 덜하지만, 다 읽은 다음 「리알토에서」나 「나일강의 죽음」을 돌아보면 크게 보아서는 같은 방식이구나 싶다. 코니 윌리스도 후기에서 언급하듯 〈환상특급〉 등의 TV 단막극이 자연히 떠오르는데, 다만 막상 영상으로 옮긴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법한 작품이다.
「화재 감시원」은 『시간여행 SF 걸작선』을 통해 읽은 뒤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눈물 줄줄 흘리면서 청소년다운 극단주의에 사로잡혀 '이걸 읽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라고 생각한 끝에 마침 당시 명절을 맞아 집에 와 있던 사촌 동생에게 권했으나 다 읽고도 별로 감동한 얼굴이 아니라서 내심 실망했던 부끄럽고 우스운 기억도 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위력이 막강해서, 기차 안에서 눈물을 줄줄 쏟았다. 게다가 작품마다 딸려 있는 작가 후기 중에서도 「화재 감시원」의 후기가 가장 아름답고 강렬해서 감동 두 배. 시간여행을 다룬 SF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 테고, 그 이전에 역사학도들이 꼭 읽어줬으면 한다. 역사학의 연구 대상인 과거가 데이터 이전에 타인의 삶이라는, 매우 당연하지만 실감하기는 어려운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내부 소행」은 과거 《판타스틱》에 「디벙커는 유령을 믿지 않아」로 소개됐던 작품이다. 원제가 "Inside Job"이었구나. 굳이 다른 제목을 붙였던 잡지 편집부의 고충도 이해하지만, 책으로 내면서 원래 제목을 찾아주어 고맙다. 명랑한 맛은 사라졌으나 다 읽고 나면 「내부 소행」이야말로 적절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최면, 초능력, 심령술, 지적 설계론, 기타 의사과학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을 폭로하는 회의주의 잡지의 편집장과 조수가 과학적 사고의 근간을 뒤흔드는 막강한 적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인데, 마음씨 좋은 코니 윌리스도 어떤 종류의 멍청이들에게는 가차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혈액형과 사상의학의 나라에 사는 독자로서 소재 자체에서 청량감을 느낀 데다 작심하고 만든 듯한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고 할리우드 이야기도 잔뜩 쏟아져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을 바탕으로 한 다른 작품도 있으면 좋을 텐데. 다만 영화 애호가로서는 배우 셜리 맥클레인의 오랜 팬이었던터라 맥클레인이 점성술을 신봉하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그런 헛소리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얼굴로 연기하시는 분이 어쩌다가.
그나저나 지금 《판타스틱》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는데, 《판타스틱》에 실렸을 때도 킬디가 롭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편집장님"으로 불렀는지 모르겠다. 반말 아니었나? 워낙 근사하고 당당한 캐릭터라서 반말이었다고 잘못 기억하는 건가? 롭과 킬디는 발행인/편집장/고용주과 직원/고용인의 관계고, 또 존칭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둘의 관계가 사실상 동등하다는 게 전해져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편집장님"이라는 호칭이 나올 때마다 살짝 생각이 옆으로 새어 나갔다.
이번에 처음 읽은 작품인 「리알토에서」, 「나일강의 죽음」,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는 모두 두 번씩 읽었다. 책을 읽자마자 다시 읽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셋 모두 두 번째 읽을 때 더 좋았다. 처음 읽을 때는 인물과 사건과 서술이 수다스럽고 혼란스러워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힘을 쏟았던 모양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자잘한 표현이나 문장의 배치가 세심하고 교묘함을 알 수 있어 작품이 한결 탄탄하게 느껴졌다. 이번이 두 번째 감상이었던 「내부 소행」도 마찬가지.
아작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출간한 세 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고 가장 자주 다시 읽게 될 듯하다. 코니 윌리스는 이전에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장편 『둠즈데이 북』과 『개는 말할 것도 없고』도 좋아했지만, 분량도 분량이고 시간여행 SF에 익숙하지 않다면 수다에 묻혀 길을 잃기 쉬워 보여 주변에 권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 절판의 길을 걸었고. 이제 좀 더 권하기 쉬운 책이 나와 기쁘다(이미 한 권 선물로 써먹었다). 모쪼록 코니 윌리스 팬이 늘어서 장차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자, 인제 『여왕마저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