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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
김성태 지음 / 은행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의 역사란 유행사 비슷하게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탄생부터 시대순으로 그때그때 유명했던 사조를 설명하고 대표적인 작품을 나열하며 역사를 정리하는 태도가 보편적이라는 소리다. 가령 세계 영화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담아내려 하는 '교과서'적인 저서인 크리스틴 톰슨/데이빗 보드웰의 『영화사』나 제프리 노웰 스미스가 엮은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도 그런 식이다. 세계영화사뿐만 아니라 지역 영화의 역사도 비슷한 처지로, 김미현의 『한국 영화사』나 사토 다다오의 『일본 영화 이야기』도 유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접근 방식 자체가 나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 기록'에서 벗어나 특정한 관점을 중심으로 흐름을 파악하고 정리하며 의의를 부여하고 발견해내고자 하는 역사 기술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문제다.
요 몇 주 동안 즐겁게 읽은 김성태의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영화사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개별 영화의 의의를 따지거나 구체적인 산업/사조의 양태를 정리하며 대표적인 작품의 목록을 나열하거나 연도를 기록하려 애쓰지 않는다. 저자가 다루는 대상은 개별 영화들(film)이 아니라 개별 영화들이 지시하고 있는 '영화'(cinema)라는 개념 자체다. 우리가 막연하게 '영화'라고 부르고 있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인류 문화 가운데 그것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거기에는 어떤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은 어떻게 무시되거나 발전했는가? 영화는 왜 중대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러한 변화가 가리키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막연하게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라고 나누어 부르는 영화의 큰 두 덩어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다른가?
말하자면 이것은 개념의 역사다. 저자는 '영화'의 존재와 변천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작품이나 사조를 예로 들지 않는다. 그가 다루는 '영화'는 개별 작품들의 어떤 부분이 가리키는 것,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개념이지 특정한 영화 몇 편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을 이해할 때 비로소 한 편의 영화가 좋네 나쁘네 어느 것이 더 낫네 별점이 몇 개네 하는 식의 심사위원 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더 큰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신 다른 예술과 다른 영화 이미지의 속성에 관해서, 그것이 현상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현상과 본질에 관한 합리주의/비합리주의의 다른 태도에 관해서, 예술의 고전성과 현대성에 관해서 말한다. 모든 논의가 특히 영화와 현상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만큼 베르그송을 기반으로 하여 들뢰즈의 『시네마』를 훑고 있다.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이름을 듣는 순간 넌덜머리를 낼 법도 하지만,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쓸데없이 철학을 끌어와 자신을 심오한 척 드높이려는 얼치기 영화-철학 서적이 아니다. 영화의 고유함을 말하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다루어야만 하기에 철학의 흐름이 개입할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그렇게 끌고 들어온 철학적 사유를 가능한 한 명쾌하게 풀어쓰고 있다. 논문을 쓰거나 연구를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를 테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따로 철학서를 읽으며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철학적 개념들을 독자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지도 않으며, '영화'의 특질을 중심으로 논의를 펴고 있기에 이해도 한결 쉽다.
더불어 논문을 기반으로 삼은 학술적 글쓰기가 아니라 강의록을 정리하여 풀어낸 글이기에 한결 친근한 맛이 있다. 독자/학생들이 논의를 따라오지 못할까봐 거듭해서 앞에 전개했던 논의를 정리하고 다시 한 발을 더 내딛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은 독자라면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한다며 되레 싫어할지도 모르겠으나,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소개하며 파고드는 책인 만큼 그 정도의 노파심이랄까 배려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단, 영화라는 것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청각 매체' 이상의 것이며 아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역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면, 그런 생각에 이르도록 해주는 영화적 체험을 해본 적이 없다면, 고전영화/현대영화의 막연한 구분조차 금시초문이라면, 저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낯설어 다가서기 어렵다 느낄 수도 있을 듯하다. 저자는 철학에 관해서는 문외한들의 배려를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도리어 영화 문외한에 대한 배려는 덜한 편이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서는 '데쿠파주나 몽타주, 플랑-세캉스 같은 개념이 흔히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전제를 토대로 논의를 펴면서 그 의의를 되짚고 있는데, 그러한 개념 자체를 처음 듣는 독자라면 소화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아울러 저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 탓인지 프랑스어 발음에 근접한 표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둔다.)
그럼에도 개별 영화 비평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고 싶은 영화 애호가라면 일독, 재독, 삼독을 권한다. 관성에 가깝게 이어져 온 기존의 막연한 이해를 반박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원론에서부터 다시 대상을 생각하도록 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역사를 다시 쓴다. 한국어 영화 서적 중 이만한 집중력과 독창성을 갖추고 지도를 그려주는 안내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좋은 책이 그러하듯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저자도 책도 유명하지 않아서 복간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몇몇 지인들에게는 선물해 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도서관을 이용해주시기를 바라며 추천으로 만족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