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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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나는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며 긴장했다. <이 인간이 정말>이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위풍당당>을 읽은 후에 내 머릿 속에 각인된 건 ‘생명력’, 이 세 글자였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꿈틀거리면서 내 주변의 공기를 바꿔놓을까, 장광설을 늘어놓는 넉살좋은 주인공이 있는 걸까. 기대하면서 소설을 펼쳤다. 그리고 난 실패했다.


대뜸 ‘나’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한강을 산책하고 있단다, 투명인간이란다. 무슨 말이지-하고 따라갔더니 불쑥 ‘김만수’를 발견하고는 말을 멈추어 버렸다. 그리곤 책의 빈 공간이 나오더니 ‘만수가 태어날 때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가 눈에 들어왔다. 긴장감은 허탈감으로 변해버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투명인간인 ‘나’는 제 자식도 못 알아보게 되나? 며칠은 이 고민(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때문에 책을 펼칠 수 없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몇 날 며칠 책을 멀리 밀어냈던 것이다.






장편소설 『투명인간』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는 소설이다. (부분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등장해서 ‘나’로 등장한다. 나와 같은 실수로 소설에 몰입하지 못할 것 같다면 부분마다 ‘나’는 누구인가를 메모해두는 것도 도움이 될 법하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을 이야기하는데 그 안에는 한결같이 ‘만수’가 들어있다. 마치 <월리를 찾아라>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배경들 속에서 만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하지만 끈덕지게, 화자가 보는 이야기 안에 그 몸 한구석을 들이밀고 있다.


처음에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려지던 ‘만수’는 좀 이상했다. ‘대가리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인 아이였고 온갖 피부병을 앓았고 온몸에 상처 투성이여서 몸이 단풍이 든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늦되고 자라면서도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걸 두고 동네 사람들은 ‘어비’라고 했는데 만수가 바로 그 짝이 났다. 아이가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으며 경쟁에 뒤처지는 것을 두고 ‘지실이 든다’고 하는데 만수가 바로 지실이 든 아이였다.(p.33) -만수 아버지의 말 중에서.

만수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만수가 병약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투명인간이 되는 건가 싶었다. 한편으론 이 어수룩한 소년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고 싶지 않기도 했다. 투명인간이면 남다르잖아, 뭔가 특별한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어서 특별한 일-장난이라도- 뭔가 해주면 신나잖아.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덜컹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금희 누나의 말이었던가, ‘소쿠리가 보이면 만수가 있었고 만수가 있으면 소쿠리를 메고 있어서 만수를 “소쿨아, 소쿨아”하고 불렀다(p.46)하고 시작하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멍청하고 모자라게만 보이던 얼빵이같던 만수가 예뻐보였다. 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산나물이나 열매, 가족에게 필요한 약초를 구하러 종종 걸음 질쳐 사라질 때, 나는 만수의 어미라도 된 양 그 걸음을 따라 한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김만수, 이 사람은 뭔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 박식하게 많은 책을 섭렵하는 선비도 아니고 힘 깨나 쓰는 장사도 아니고 수재도 아니고 미인도 아니고 근데 자꾸 마음이 간다. 먼 할아버지가 겪어온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부터 새마을운동, 서울 공장에 청년들이 몰려들던 때, 베트남전 파병,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세상 따라 목소리를 바꾸고 몸을 낮추어 아득바득 살아갈 때, 누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이토록 넓고 바른(옳거나 그름이 아니다, 바름이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단 말인가.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p.351)-만수의 말 중에서


소설을 다시 한번 잡은 후, 끝까지 쭈욱 읽어내려갔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입을 옮겨가면서 세월도 보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소설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나를 둘러싼 환경이 휙휙 들어섰다 사라지고를 반복한 것 같다. ‘문장으로만 꿈틀거린다고 생각했냐?’하고 반문하며 성석제 표(?) ‘생명력’이 나를 꾸욱 밀치고 사라졌다. 아, 이 선생님의 힘은 얼마나 오래 가실런지. 하아.(감탄^^)


소설을 덮고 나서 며칠을 또 고민했다. 왜 작가는 ‘김만수’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그들(‘김만수’만이 아니다)은 투명인간이 될 수 있을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다고,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우악스러운 욕심은 마침내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마는 것이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을, 자신의 멋대로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지금의 세상 아닌가. 타인에 의해서 갑자기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스스로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숭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p.28)-만수 할아버지의 말 중에서.

염치 있는 인간, 김만수 씨는 사람도리를 하기 위해 긴 세월 열심히 살아왔다. 함부로 욕심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도록 굳건하게 용기 내며 살아온 것이다. 이제 더 지치지 않도록, 옆에 있는 사람들의 책임까지 짊어지느라 ‘염치’란 단어에 깔리지 않도록.... 원하는 때가 되면 마음껏 가벼워지라고 작가는 ‘투명인간’을 선물했다. 아마도 그건 작가 선생님만이 건넬 수 있는 ‘달콤한 위로(p.350)'이 아닐까.





p.s.

1) 누가, 인간 김만수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이 당당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아서도?! 

(이런 류의 농담을 던지는 것 같은 작가님의 센스?!)


2) 지난 2014년 국제도서전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성석제 작가님을 뵈었다. 

작가님의 지난 인터뷰와 작품 들을 통해 끊임없이 관찰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정리해서 다음 번에 블로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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