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 애인, 아내, 엄마딸 그리고 나의 이야기
김진희 지음 / 이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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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플롯을 이야기할 때 ‘성숙’을 꼽기도 한다.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담을 수 있으면 어떤 형태의 이야기이건 괜찮은 플롯이라고 한다. 예를 들자면 도로시에게 집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 속의 집과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오즈를 다녀 돌아온 집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로시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한뼘 더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연애를 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이 서로에게 끌렸듯이 꿈같은 시간들이 펼쳐진다. 곧 결혼을 한다. 두근거리는 시작과 달리 현실 속에서 여자는 직업을 잊고 아내의 자리에 앉아  '엄마'란 옷을 입고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친정 엄마를 떠올린다. 집에 있는 남자가 고릴라처럼 보이다가 거울 속에서 악어를 마주하고 여자는 당황하기도 한다. 어느 샌가 늘어가는 찻잔을 보며 그 얼마나 많은 감정이 어떻게 고였고 끓었고 내려졌으며 삼켜졌는지를 기억한다. 여자가 변하는 과정을 나는 바라본다. 소설을 읽듯 다른 사람의 일상을 보듯 무심하게 흘러가면 좋으련만, 자주 멈칫멈칫한다.


책은 무척이나 편안하다. ‘결혼한 여자에게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와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작가가 골라둔 그림들은 한결같이 마음으로 감상하기 쉽다. 인용해놓은 소설 속의 주인공 혹은 영화 속의 주인공도 낯설지 않아 이해하기 쉽다. 다만 이 책을 마냥 흐르듯이 읽을 수 없는 건 그녀의 이야기가 내 어머니가 걸었을 길이며 내가 걸을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언제나 치열한 연애 감정을 찾아 헤매는 친구가 있다. 남자들은 많아도 어느 누군가에게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는 불안해 보인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이 다 사라지고 나면 다음의 물길을 찾아 연못도 시내도 개천도 기웃거리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지를 왜 모를까. 편안하게 항상 함께 흘러오는 것도 괜찮은데, 폭포수가 되어 짧고 굵게 흐를 필요는 없을 텐데. 핑크빛 세상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친구는 깜깜한 밤의 어둠을 외면하려 하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 편할 건데, 모든 걸 갖춘 다른 이를 찾아야만 할까, 난 가끔 그녀가 안쓰럽다.

그날 오후 나는 늘 뭔가 석연치 않았던 남편과 함께 흠뻑 비를 맞았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워 신이 났다. 영혼 깊숙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면 어떠랴. 부부란 어차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물줄기 같은 감정의 반복 속에서 인연의 겹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남편은 깨끗하게 빨아놓은 빨래나 정돈된 부엌을 보며 나를 기억할 것 같다. 현관에 벗어둔 검은색 구두를 보면서 내가 남편을 생각하듯 말이다. (p.51)

그 언제가 되면 그녀는 알게 될까. 내가 만나고 있는 이 남자, 혹은 작가가 살고 있는 남편이 눈부신 환상 속에 사랑을 고백하는 왕자님에 가깝다기 보다는 하얀 빨래를 개키는 여자와 두런두런 살아가는 ‘검은 구두’로 기억되는 좋은 친구라는 것을.

‘삶이란 공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쌓이는 생활의 무한한 층’이라는 작가의 글을 읽는 순간, 나와 내 연인 사이에 쌓여온 삶의 자락은 얼마나 많은 층을 쌓았을지를 떠올려 본다. 몇 십 억만년 동안 만들어졌을 지구의 지층을 잠시 상상하며 ‘아직 멀었네’하고 피식 웃고 말았지만, 우리는 꽤나 많은 시간을 행복했다.


 

이십대의 나는 엄마가 되면 ‘얼마나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곤 했다, 길가에서 바락바락 신경전을 벌이는 엄마와 아기를 보면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발견한 듯 자신만만했다. 삼십대가 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나는 이제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해보곤 한다. 아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도 다치지 않으면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변해버린 자신과 연애때와는 다른 남편 그 틈 바구니 안에서 아이에게 나는 ‘온전하게’ 내 사랑을 전할 수 있기는 할까 두렵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생명에 대한 강박증은 가셨지만 엄마로서 행복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이를 보살피는 것에 먼저 지쳤고, 개인으로서만 살던 삶의 부피를 키우는 것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때까지 보고 들었던 엄마로서의 기쁨은 남의 이야기이거나 거짓말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엄마를 보며 옹알옹알 웃다가 잠든 아이를 다독이며 언제 키워서 나 없이도 걷고 먹고 말하게 할 수 있을까 푸념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아기 띠를 두르고 장바구니에 열두 롤짜리 욕실용 휴지를 든 헝클어진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을 때는 심지어 ‘이제 내 인생에는 종말이 고해졌구나’하고 스스로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좌절이라니, 그것은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서도 안 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왜 엄마들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현실의 맛과 모양은 겉모습만 화려한 케이크 같다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p.122)

현실의 진짜 실상을, 작가는 자신이 겪은 일화들을 보여주면서 알려주었다. 어느 페이지에서 읽었던 작가의 표현-‘말을 할 줄 아는 생명체라면 동화 속에 나오는 토끼나 곰일지언정 붙잡고 대화를 하고 싶은’ 감정을 보며 어떤 기분인지 처음으로 그 막막함을 마주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육아 블로거들이 사랑스런 아이의 사진과 그 일상을 기록하는 자체가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찬란한 빛 그 이면에는 깜깜한 어둠이 분명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걸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것처럼 이제 나는 삶의 어느 지점을 한 바퀴 빼곡하게 돌아 다시 내 자리에 섰다. 믿었던 자신이 날카로운 좌절의 칼날로 삶과 생활을 재단했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시간 앞에 다시 섰다. 그런 의미에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견고한 집을 짓듯 차곡차곡 거르지 않고 쌓아온 나의 삶 앞에서 나는 기꺼이 그것의 뮤즈가 되려 한다. 있는 힘을 다해 끌어온, 무엇 하나 내 것이 아닌 것 없는 내 삶의 온전한 뮤즈가 되려 한다. 비록 초라한 차림으로 마주했어도 화가들의 그림에 나오는 아름다운 그들처럼 뮤즈이고 싶다. (p.238~239)

작가가 보여주는 일상은 힘겨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답답함, 어두움, 시련, 결혼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새로운 시간 앞에서 기꺼이 웃어 보일 수 있는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자신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뮤즈의 자리를 만들어보이겠노라 결심하는 작가의 모습이 비장해보이면서도 희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 나도 결혼한 후, 뮤즈가 되어 보이는 여자가 되어야지’하는 자신감을 찾았다고 할까. 해피엔딩의 소설을 읽은 것 마냥 뿌듯했다.



 

작가 김진희의 그림과 이야기를 읽는 동안 호수가 되어, 바람이 일어 수면이 일렁이고 때론 쏟아지는 폭우에 들썩이는 걸 겪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시간동안 호수는 더 깊어지고 맑아졌다는 걸 알아챘다면, 이상한 감상평이 될까.


뒷표지 날개 작가 소개 중에 쓰인 몇 마디가 이 책의 성격을 대신할 것 같다.

‘이 책은 런던 유학 시절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아트숍에서 언젠가는 꼭 기쁜 마음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내리라 하며 사모은 엽서들의 이야기이다. 그때 그리워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는 다 그럴 수 있다고 친절하게 또박또박 적어 엽서를 띄운다.’

이 책은 분명, ‘결혼’의 여정에 먼저 오른 사람이 곱게 써내려간 여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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