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온한 죽음 -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는 품격이 있는 죽음을 위하여!
나가오 카즈히로 지음, 유은정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작년 8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망진단서가 말해주었다. 심장및호흡정지(의 원인:뇌출혈, 의 원인:혈관성치매, 의 원인:연하곤란)에 의한 사망이라고. 그러나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아침이면 맨손체조도 하셨고 운동 삼아 산책도 즐기셨던 건강한 89세의 어르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치매였다.
어느 날이었던가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모셔가라고. 새집으로 이사를 간 후 계절이 두 번 정도 바뀌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우리 집이 기억이 나지 않으셨단다. 그때는 쉽게 흘려버렸던 것 같다, 건망증 같은 것이려니 하고. 수개월이 지난 후 친척의 결혼식장에서 할아버지는 졸고 계셨다. 손녀인 내가 아무리 불러도 깨지 않던 상태, 뻐끔뻐끔 하품은 하면서도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도 깨지 않던 상태로 줄곧 의식이 없으셨다. 처음 접하는 할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에 나는 크게 놀랐다. 섬뜻한 느낌에 주변 친지분께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렸는데 잔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날부터 할아버지는 병원 생활을 시작하셨다.
‘평온한’ 죽음이란 제목에 어울리게 이 책은 굉장히 침착한 어조로 쓰여져 있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나 가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환자들의 마지막이 존엄할 수 있도록 ‘평온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면서 ‘재택의료’ 문화를 실천해온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잘 풀어써놓았다. 하지만 내가 지나치게 고지식한 탓일까. 책을 접하자마자 ‘평온하게’ 마지막을 보낸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안락사’를 떠올렸다, 고통을 몰아내고 평온하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첫 인상에서부터 이 책이 나를 옥죄는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노쇠와 치매 등 여러 복합증상을 보이면서 급속히 상태가 나빠지셨다. 병원에서는 머리 쪽의 큰 수술을 제외하고 할아버지를 위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일반 종합 병원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집에서 할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할아버지는 요양 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할아버지께 무얼 해드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의사는 할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할아버지 본인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둔 환자들에게 ‘연명’치료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치료라는 것은 병의 원인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치료’라는 말인가. 저자는 나의 의문점을 풀어주듯 설명한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에게 연명은 무엇보다 가장 우선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죽음을 패배라고 배운다. 가능한 한 모든 연명치료를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뼛속까지 배어 있다.(p.42)’
할아버지께선 일반 병원에 계시면서 큰 문제없이 일상의 생활을 계속 하려 애쓰셨다. 간간히 사람을 못 알아보셨을 뿐 스스로 양치도 하셨고 매일 드시던 건강제를 찾기도 하셨고 좋아하시던 사과도 꼬박꼬박 챙겨 드셨다. 단지 치료를 위해 팔과 몸통, 코에 꼽혀 있는 호스를 늦은 밤마다 주무시다 깨셔서 난리를 치며 떼어버리시곤 하셨을 뿐이다. 간밤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호스 따위를 꼽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드셨을까. 새벽의 소란으로 엄마와 주변 환자와 간호사들은 할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에 놀라고 분노에 가까운 몸부림을 보면서 괄괄한 그 기운에 다시 한번 놀랐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벗어나려 하셨을까, 아니면 이 어줍지 않은 치료로 생을 연명하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을까.
“병원과 재택요양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 재택요양에서는 비상식이기도 하니까요.” “삼킴 장애와 인공영양에 대해서는 의사에 따라 생각에 차이가 있는 게 현실입니다.”
환자가 얼마나 입으로 먹고 싶어 하는지 병원 의사들은 그 마음을 알고 있는 걸까? 입을 통해 먹는 행위에 대한 환자나 가족의 간절한 소망을 제대로 모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의사들은 ‘입으로 먹으면 오연성 폐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위루나 고칼로리 수액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문에 묶여 있어서 헤어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환자가 이렇게 원하는데 어떻게 해서든 뭔가 먹게 해주고 싶다. 먹는 기쯤을 빼앗고 싶지 않다’는 발상의 전환이 없는 한, 그런 시도를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p.99)
실제로 할아버지의 담당 의사는 식사를 계속하시거나 침을 삼키다 보면 폐렴의 위험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는데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오연성 폐렴’을 뜻하는 것 같다. 책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른 많은 환자들에게 병원에서는 ‘위루’와 같은 방법으로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몸에 연결된 그 많던 호스들도 아마도 ‘위루’를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평온사라는 말을 쓸 때, 나는 노쇠나 치매 종말기, 혹은 암 말기와 장기부전(폐, 간, 심장, 신장 등 주요 장기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으로 인한 죽음을 떠올린다. '자연사‘는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 끝에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존엄사‘는 교통사고 등으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혼수상태(천연성 의식장애)의 연명 중지까지 포함해서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p.43)
할아버지의 몸뚱아리를 우리와 맞닿게 해준 작은 고무 호스,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롱 한켠에 미리부터 마련해서 어떤 순서로 입혀야 하는지까지 하나하나 메모까지 남겨 놓은 수의(壽衣)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요양병원에 할아버지를 모시기 문제를 의논하기에 우선하여, 우리는 할아버지의 정신이 모든 것을 기억하실 수 있으실 때 ‘평온사’를 택할 수 있는 기회를 따로 드렸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어떤 선택이건 할아버지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은 평소의 뜻을 충분히 아셨으니까 좋은 선택을 하셨던 것이겠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오로지 책만 읽었던 말기암환자도 있었다. 곧 죽을 텐데 이제 와서 독서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진정한 존엄이 아닐까?(p.84)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아빠께 부탁하신 것이 있다 하셨다. 입원하시던 날에 쓰고 계셨던 모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응급실에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수술 때문에 대충 깎인 짧은 머리카락과 생기 없어 보이는 환자복이 얼마나 싫으셨을까. 늘 깔끔한 차림새의 멋쟁이셨던 할아버지는 친척 손주의 결혼식날을 쓰고 가셨던 모자를 기억해내셨던 것이다. 그런 당신께서, 자신의 손을 거친 것이면 무엇이건 따로 정리해두시고 이름표를 달아두시던 꼼꼼한 당신께서. 간혹 새벽에 정신을 차려 자신을 보았을 땐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여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의 얼굴을 떠올리느라, 알 수 없는 호스들의 정체를 밝히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새벽의 그 모든 몸부림은 어쩌면 덤덤하고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셨던 할아버지의 역정이 아니셨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평온사는 죽는 순간의 일이 아니라,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가르킨다. 제대로 된 평온사를 거두기 위해서는 환자 자신도 가족도 사후 준비까지 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준비를 해보면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보인다. (p.119)
그 언젠가 대학생 시절에 교육학의 어떤 과목 시간에 유언장을 작성해 오라는 과제를 받은 일이 있었다. 내가 죽으면 힘들 사람들을 위한 안부와 위로의 말을 잔뜩 썼었다. 20대에게 갑자기 찾아온 죽음은 얼마나 아련하면서도 감성적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럽다.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죽음은 냉정한 현실이었는 것을.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의 곁을 지키면서 죽음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진짜 뜻을 알 것 같다. 때문에 책의 부록으로 실린 ‘사전의료의향서’는 사뭇 중요해보이기까지 하다.
어려운 책이었다, 죽음을 거론하는 책이었기에. 그리고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고독한 싸움을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었기에. 하지만 어쩌면 이 책 덕분에 나는 나의 부모님과 나의 죽음을, 차분히 침착하게 준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지만, 그때의 내 마지막은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는 순간으로 남겨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