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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르게 살아야 한다 - 이시형 박사의 산에서 배운 지혜
이시형 지음, 김양수 그림 / 이지북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결코 요란하지 않은 책, 『이젠, 다르게 살아야 한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나는 늘 이 말이 참 무섭다. 진부한 속담에 지나지 않은 말이지만, 어느 하나 생활에서 어긋나는 법이 없는 말이다. 머릿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설명하다가 혹은 의미를 되짚다가도 나를 돌아보곤 할 수 있는, 일종의 제어장치다.
대학 재학시절에도 나는 저 말을 간혹 떠올리곤 했다. 그 교과목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배경과 실력에 대해 한참을 자랑을 늘어놓던 어떤 교수가 있었다. 그분은 첫 수업 시간에 영어로 수업을 하겠노라는 파격제안을 했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전공과목이 과목이니만큼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한 한문투의 기술용어들보다야 낫겠지, 생각하면서 잔뜩 긴장했지만 정말 간단한 영어, 외국용어, 그 사이 사이 짧은 질문들은 얕은 영어였으니 우리는 모두 쇼를 보는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의 내용 역시 알찼다기 보다는 교재를 사라, 그 그림이 이거다, 부분을 그려서 보여주고는 알겠는지를 확인하는 영어 몇 마디로 이어지는 수업이었다. 한편 전공과목 중에서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일었던 과목도 있다. 담당 교수님은 첫 수업에 들어오셔서 그 과목이 현실에서 쓰이는 가장 단적인 예를 영상으로 보여주셨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인지를 차분하게 설명해주시고 나가셨다. 본격적인 수업에선 어려운 기술용어들에 쉬운 비유를 들어주시기도 하셨고, 친절하고도 깔끔한 설명, 적절한 학습동기를 부여해주셨던 과제가 있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교수님이 많으셨다면 나는 전공에 더 열중했을 지도 모른다. 전자에서 예를 든 ‘날로 먹는 수업을 하는 교육자’를 보면서 전공이 싫어졌던 속도엔 가속도가 붙었고 나는 참교육자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커졌다는, 운명적 뒷이야기도 숨어 있다.)
이시형 박사의 『이젠, 다르게 살아야 한다』의 첫인상은 심심했다. 너무 심심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나 혼자 간직하기엔 아까운 체험들이라 함께 나누고자 쓴 책입니다. 『윌든 호수』를 쓴 소로에 비하긴 외람스럽지만 그런 뜻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겸손한 첫 마디로 나를 감화시키셨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도시와 일상, 바쁜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장닭이 울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을과, 그 어디에선가 쪼그리고 앉아 풀들을 살피는 사람들, 자신이 머금을 수 있을 만큼의 물을 머금었다가 금세 털어버리는 연꽃잎이 떠있는 연못, 석양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억새가 있는 곳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여유를 갖고 자기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하며 빙긋 웃는 박사님을 만난 것 같았다.
산은 바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삐 달리듯 다녀오면 한이 주는 그윽한 맛이며 계절의 아취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p.144)
어릴 때부터 인왕산, 북한산, 설악산 온갖 산을 다니면서 산깨나 탄다고 으쓱거렸던 내게, 산을 좋아한 것인지 산에 오르는 행위 자체만을 좋아한 것인지를 묻고 마는 박사님. 나는 순간 선문답을 처음 접한 어린 동자승마냥 멍하니 눈을 굴리고 있어야 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땅-하고 달리기 시합을 하듯이, 산행이 시작되면 으쌰쌰-하면서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오르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어느 순간 잊혀졌던 ‘산 냄새’와 ‘산의 경치’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심신 수련은 이와는 다릅니다. 힐링이 목적이기 때문에 싫은 걸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하다 싫거나 힘들면 그만두는 게 수련입니다. 전 과정이 대체로 차분합니다. 물론 걸을 때는 놀아드레날린, 의욕적인 도파민 분비가 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세로토닌 우위의 활동입니다. 단련에서처럼 격정적인 환희나 감동 대신 수련은 잔잔한 감동입니다. (p.158)
그러고보면 우리는 늘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다. 자연이 마치 ‘단련’이나 ’훈련’ 같은 이름을 붙이고 마음과 몸을 바짝 조여야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공간이라도 되는 듯이. ‘저절로 그러한 듯(自然)’ 가만히 있으면 꼬옥 안아주는 곳이 바로 자연인데, 우리가 자연을 해쳤건 보호했던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 자연인데.
보호는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겁니다. 한낱 미물인 인간이 어찌 이 위대한 대자연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가당치도 않은 망상입니다. 자연은 보호대상이 아닙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사는 겁니다. (p.262)
이 책은 사실, 아쉬운 부분이 많다. 분명 에세이 한편마다 등장한 것들을 담은 그림 좋은 사진들을 몇장씩 끼워놓고, 간간히 여백의 공간도 그럴싸하게 꾸미면 지금보다 더 비싸고 멋지면서 소장가치가 높은-일명 선물용- 책으로 팔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사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닌 듯 하다. 너무 허울좋고 그럴싸한 책이 아니라, 그래서 요란하기만 한 책이 아니라 진짜 마음을 담은 책을, 저절로 깨달은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내놓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덤덤하고 편안한 기분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 차분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책을 채우셨으리라. 좀 심심한 듯 보여도, 읽는 이에게 깨달을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것이 이 책을 쓰신 의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요란하지 않은 이 책은, 빈수레는 아니다. 보이는 만큼 많은 자연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고마운 책. 조만간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산을 있는 그대로 즐기러 가봐야겠다.
p.s. 박사님에게서 진짜 삶의 지혜를 엿본 듯 해서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