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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평점 :
-부제: 어장관리녀 크리스틴과 음악의 신 에릭, 그것이 알고 싶다!-

내가 처음 만난 ‘오페라의 유령’은 적당한 그림과 큼지막한 글씨가 함께 들어있는 얇은 학생용 책이었다. 화려하고 큰 무대 위에 서 있는 단역 배우에서 프리 마돈나로 거듭난 크리스틴의 운명은 얼마나 부럽기만 했는지. ‘유령’이라는 신비한 존재 덕분에 음악적으로 더 많이 성장했고 성공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멋진 운명을 가진 여인이라니! ‘유령’은 그녀에게 음악적 스승이고 헌신적인 사랑인데, 그가 선사한 성공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크리스틴을 시기하는 어린 소녀였다.
내 생애 최초로 만난 ‘어장관리녀’ 크리스틴이 왜 사람들에겐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지, 웨버의 뮤지컬 속에서 25년이 넘게 아름답게 기록되는 그녀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 <오페라의 유령>을 집어들었다. 가스통 르루의 원작을 완역한 2012년 영문 버전을 참고로 하였으니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녀의 진짜 매력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나는 기대했다.
크리스틴은 내가 알던 것 이상으로 맑고 순수한 여인이었다. 로테의 곁에 와주었다던 음악 천사에 대한 환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난했지만 발레리우스 부인의 호의 덕분에 어려움 없이 음악에 대한 꿈을 펼쳐보일 수 있었던 행복한 여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음악의 천사만을 기다리며 자랐다는 것은 행복인 동시에 불행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관객 중에서 한눈에 들어오던 어린 시절의 친구, 라울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애써 숨겨왔던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을 속일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한바탕의 소동으로 인해 정신을 잃었던 그 날, 불쑥 분장실에 나타난 라울이 “당신의 스카프를 건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던 그 어린 소년입니다.(p.55)”하고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키스를 바쳤을 때 그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오페라 하우스의 어디든 제집처럼 드나들며 그녀를 감시하는 ‘음악의 천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조약을 걸었던 것인지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 진실한 연인을 눈앞에 두고도 장난처럼 웃어 버릴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약혼 놀이’를 흉내낸 며칠만을 허락하던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녀를 지켜주는 존재라고 믿었던 그 ‘완벽한’ 음악의 신은 무엇이었지, 나는 그 시절에 무얼 보았던 걸까? 책 속에 빠져들수록 나는 크리스틴의 사랑에 흠뻑 빠졌고 에릭의 그림자는 커져만 갔다.
어릴 적에 내가 기억하는 ‘오페라의 유령’-에릭은 신성할 정도로 완벽한 음악의 천사였다. 크리스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순진한 남자였고 그녀를 위해 노래하고 사랑을 바치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난 그는 달랐다. 기예와 마술에 능하고, 건축에도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탁월한 성악가요 작곡가였다. 내가 아는 그의 모습 이상이었다. 더불어 ‘추악한 외모를 가진 자신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p.420~421)'는 페르시아인의 말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껏 허상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소설 속에서 찾아간 오페라 하우스는 샹들리에가 빛나는 무대만이 존재하는 건축물이 아니었다. 밝고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 또 다른 세계였다. 무대 아래로 펼쳐지는 지하는, 어둠으로 지어진 에릭만의 세상이자 그가 사랑하는 크리스틴 외의 존재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공간이다. 고문실에 존재하는 숲과 사막 그리고 오아시스의 환상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두려움’이었다. 크리스틴이 느끼는 ‘공포(p.266)' 그대로였다. 크리스틴을 구하기 위해 들어온 라울과 페르시아인이, 에릭에게 발각되었을 때 나는 지금껏 속아온 나를 원망하며 에릭을 저주하고 있었다. ’음악의 천사‘라 믿었던 에릭에게서 배신당한 -크리스틴이 아닌-또 한 명의 소녀는 그렇게 ’유령‘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령’에게 입맞추고 눈물흘릴 수 밖에 없다. 마치 크리스틴이 그했던 것처럼. ‘그녀는, 크리스틴은 공포에 떨지 않았어! 내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춘 후에도 그녀는 계속 내 곁에 있어주었어. 마치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말이야. 아! 다로가.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누군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는 것 말이야!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나는...... 나의 어머니는, 나의 불쌍한 어머니는 절대로...... 절대로 내가 입 맞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p.509)' 라고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에. 온갖 재주로 술탄의 사랑을 받아 멋진 궁전을 선사하였지만 그 왕으로부터 두 눈을 뺏기고 아무도 모르게 제거되어야 할 왕의 과오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의 과거가 내게 아픔으로 전해졌기에.
자신의 추악한 외모 때문에 모두에게서 외면당한 남자이면서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었노라고(p.421)' 말할 수 있던 남자, 사랑하는 연인을 아끼는 마음에 그로부터 도망쳐야 하고 ’유령‘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가엾어 할 수 밖에 없는 여자.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지 않게 흔들리는 이 두 주인공은, 에릭이 가진 신비로운 건축물 안에서 마치 빛과 그림자 같은 한 쌍이 되어 살아 움직인다. 소설이 이렇게 환상적인 인물과 배경을 만들어내는데 그 어떤 창작자가 다른 방식으로 재창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를 스물 다섯 해동안 키운 건 분명, 팔할이 소설이다.
쉴새 없이 크리스틴이 되었다가 라울이 되었다가 때로는 에릭, 페르시아인, 혹은 ‘나’라는 화자의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오페라의 유령을 만나고 나니 세상이 달라진 것 같다. 질투어린 꼬마가 저지른, 크리스틴과 에릭에 대한 어줍잖은 오해가 모두 풀려 다행이다. 모쪼록 더 자주 보고 더 깊이 알아갈수록 진심을 알 수 있다는 진실을 믿자. 우선, 나부터도 그러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