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에는 책의 목소리와 베니의 시선이 함께 존재한다.
독특한 구성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누구의 '목소리'인지 방향을 잃기 쉽다.
그와 동시에 이 책에 한번 빠지면 쉽게 놓지 못할 매력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못지 않게 서서히 변화를 겪고 있는 애너벨이 있다.
직업에서부터 시작된 쌓는 버릇은 남편이 떠난 후
물건에 감정과 추억을 담아 집착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마이클스는 그저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팔았다. 그녀는 쇼핑카트를 잡고(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일종의 의식이었다) 종이공예와 스크랩북 만들기 코너를 향해 끌고 갔다. p.80
물건은 효용가치를 가진 물체가 아닌 ‘좋은 기억’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매개로 등장한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작으니까', 하면서 기분 전환을 위해 사들인 자잘한 소품들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책-<정리의 마법>을 함께 만나면서
실제 유명한 일본저자가 쓴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과 방송들이 떠올랐다.
(여기 <정리의 마법>에는 선불교의 스님이 저자로 등장한다.^^)
쌓아놓은 물건을 치우는 일이 왜 애너벨에게 힘든 일인지 공감하면서도
왠지모르게 슬펐고 답답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독자들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우리의 협력자이자 공모자다. 그리고 모든 독자는 고유하기 때문에, 지면에 뭐라고 쓰여 있건 당신들은 각자 우리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똑 같은 책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읽힐 때 전혀 다른 책이 되고, 파도처럼 인간의 의식을 관통해 흐르는, 끊임없이 변하는 책들의 집합체가 된다. P.619~620
사물들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베니는 도서관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시들어 가는 상추의 하소연에서, 새가 부딪혀 죽어버리자 슬퍼하는 유리창에서,
때로는 선생님을 찌르라고 빈정거리며 놀려대는 교실의 가위에서
알고 싶지 않은 소리들을 듣지만 도서관에서만큼은 조용한 상태를 즐길 수 있으므로.
(물론 소아정신과 병동의 박사는 베니가 가는 어느 곳이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할 기세지만. )
그리고 거기서 책 속의 메모로 지령(?)을 만나고 B맨과 알레프와 친구가 된다.
책은 어디에선가 시작해야 한다. 용감한 한 글자가 자진해서 신념에 찬 행동으로 앞장서 모험을 감행해야만 하고, 거기서 하나의 단어가 탄생하여 문장을 이끌고 뒤따른다. 그것이 쌓여서 한 단락, 그리고 곧 한 페이지가 되고, 이제 곧 책이 목소리를 찾으며 스스로 탄생하게 된다.
책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고, 이 책은 여기서 시작한다. P.11
이 소설 속 책은 독자와 만나는 순간을 새롭고 달리 변하는 시간이라 표현했다.
공감한다.
내가 읽은 A란 책은 L이 만나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고,
K에게선 지긋지긋한 훈계가 되기도 하니까.
요즘 독서모임을 하면서 한 권의 책을
폭넓고 깊게 읽는 경험을 하고 있는 터라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뷰를 쓰면서 당신의 독서에 대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