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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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게는 국가의 법이 아니라 내면의 법이 중요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에게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복종하기보다 오히려 신에 복종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일원론적 세계관을 전개했음을 안다. 《베다》, 도가, 불교의 사상이 ‘세계와 자아의 통합‘ 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위대한 스승들이 지혜롭게 말해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최종 사유였다.
반면 서양은 플라톤 이후 이원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발전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분화가 이루어졌다. 세계와 세계의 분리, 자아와 자아의 분리,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분리. 우선 세계는 완벽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실 세계로 나뉘었다. 다음으로 자아는 영원 불멸의 영혼과 감각적인 나약한 육체로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와 자아는 각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칸트의 관념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한다. 이제 그에게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확실하고 참된 지식은 어떻게 얻을수 있습니까?" 칸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인식된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한계와 능력을 검토해야 한다. 그는 진리의 기준을 ‘외부의 대상 세계‘에서 ‘내면의 주관 형식‘으로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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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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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개인에게는 벅찬 복잡한 문제를 큰 집단이 풀어내는 건 예사로 있는 일이다. 다양성이 충분하고 반대의 자유가 있는 한, 집단은 어느 한 전문가의 생각보다 나은 생각을 낼 수 있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 설명이다. 이때 아버지가 말한 소수 집단이란 해당 질병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이다. 인플루엔자의 경우, 노인들이다. 백일해의 경우, 신생아들이다. 풍진의 경우, 임신부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 제 자식에게 백신을 맞히는 건, 독신인 어머니가 최근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미처 아이를 완전 접종시키지 못한 일부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동참하는 일일 수 있다.

백신 접종 후 면역을 생성하는 항체들은 공장이 아니라 인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작가 제인 스미스의 말을 빌리면, <약학의 세계에서 최대의 구분은 생물학적 제제와 화학적 제제다. 즉, 살아 있는 물질에서 만들어진 약과 화학적 화합물에서 만들어진 약이다〉.
백신은 한때 살아 있었거나 지금도 살아 있는 유기체로부터 얻은 재료를 써서 면역계로 하여금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만든다.

저널리스트 티나 로젠버그도 이 책보다 더 크게 세상을 바꾼 책은 별로 없다고 인정했으나,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DDT는 환경에 오래 잔류함으로써 흰머리독수리들을 죽였지만, 『침묵의 봄』은 대중의 뇌리에 오래 잔류함으로써 오늘날 아프리카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이 비난은 『침묵의 봄』 자체보다는 그 책의 상속인인 우리에게 가해져야 옳겠지만, 어쨌든 더 이상 DDT를 모기 퇴치제로 쓰지 않는 나라들 중 일부에서말라리아가 되살아났다는 건 사실이다. 요즘 아프리카 아동 20명 중 1명이 말라리아로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아이가 뇌 손상을 입는다.

HIN1 독감 범유행병이 절정이던 2009년 가을, 한 연구진은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느낄수록 편견으로부터도 보호받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시험해 보았다. ... 〈계절성 독감 백신은 사람들에게 계절성 독감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작업이다〉처럼 백신을 오염의 관점에서설명한 글을 읽혔을 때는 질병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더 강화되었지만, 〈계절성 독감 백신은 사람들을 계절성 독감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한다〉처럼 백신을 보호의 관점에서 설명한 글을 읽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 <독감 같은 육체적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편견 같은 사회적 병폐를 치료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미 우리가 언젠가는 바람직하지 않은 세균을 죽이기보다는 바람직한 세균을 육성함으로써 감염에 대응할 수있으리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질병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기사의 제목은 〈몸속 미생물 정원을 가꾸다>였다. 이 은유에서, 몸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는 전쟁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적절한 환경에서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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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 세계명작을 고쳐 읽고 다시 쓰는 즐거움
이현우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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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키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권유에 따라 새 외투를 장만하는 데 몰두한다. 곧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추위는 아무런 결핍도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해 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외투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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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국가에 빚진 게 있다는 생각의 기원은머나먼 과거,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민은 국가에복종해야 하며, 국가를 부모보다 더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 나갔을 때나, 재판소에서나, 그밖에 어느곳에서건 국민은 국가가 요구하는 것이면 그 명령이 부당하다고 설득하지 못하는 한 무엇이든해야 한다." 평등이라는 건 없습니다. 국민은 설득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강제력을 가지고요.
국가에 대한 복종이라는 관념은 전체주의의본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에서 확인했을뿐만 아니라, 미국과 같이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불리는 나라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쳤습니다. 1945년 8월 7일이었습니다. 신문1면에 대문짝만 하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도시 파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원자폭탄이 뭔지 몰랐습니다만, 그때 안도감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았고, 그러면 제가 태평양을 건널 일도 없을 테니까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히로시마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정의로운 전쟁‘을 치렀다는 제 믿음을 뒤흔든 중요한 계기가생겼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소지품을 챙기며, 비행 일지와 스냅 사진 등을 정리하며, 저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 "이번이 마지막이길"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훗날 의식적으로 할 일을 무의식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전쟁의 동기, 행위,
그리고 파시즘에 대항한 십자군의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말입니다. 파시즘에 대한 혐오는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공군에 입대해 열정적인 폭격수가 되게 했던 명백한도덕적 정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흐려져버렸습니다.

그 폭격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반드시필요한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항복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 폭격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에 대처하는 첫 번째 조치로 무고한 일본인 수십만 명을 기니피그처럼 죽여버린 겁니다. 1945년 봄,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 어느 날에도 도쿄를 불길에 휩싸이게 한 야간 폭격이 있었습니다. 그 아무 이유도 없는 정밀 폭격으로 남녀노소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점차 전쟁에 대한, 파시즘을 격퇴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 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포함해모든 전쟁에 대한 확고한 결론에 다가섰습니다.
전쟁은 양 진영 모두의 마음과 영혼을 해치고,거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세상에서 어떤 불의가 행해질 때 그것이 어떤 것이건간에 전쟁을 치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폭군이다스리는 나라와 전쟁을 치를 때 우리가 죽이는사람들은 그 폭군의 희생자라는 사실입니다.

테러와의 전쟁보다 더 정당한 전쟁이 있을까요? 9·11의 참상은 미국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정부와 언론이 그 분위기를 극대화해히스테리에 가깝게 몰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전쟁 자체가 테러이므로 자기모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죠. 사실 전쟁은 테러의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지구상 어떤 테러 단체도 국가가 보유한 대량살상 능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공식보고서입니다.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리 해밀턴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조차 9·11 사태와 그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9·11 테러를 유발한 중대한 요인은 중동에 주둔하는 미군에 대한 반감"
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무력 사용의 요소를 말하자면, 아주 작은 규모로, 제한적으로, 그리고 저지하고자 하는악에만 직접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과는 정반대되는 특징입니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수의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죽입니다.

우리는 또 민간인을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전쟁에 죽은 군인들은 죄인이기라도 하다는 듯이요. 하지만 군인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도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위협과 유혹에 못 이겨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역사의 이 시점에서, 저는 전쟁을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몽상가입니다. 우리는 전부를 원합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원합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사회를 원합니다.

1950년 미국이 한국을 침략해 한국전쟁을 시작했을 때도 명분은 남한의 민주주의를 지켜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은 독재정권이었는데요. 그러나 그렇게 사소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필요는 없었습니다. 일단 언론이, 정부가 계속반복해서 우리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하기위해 그곳에 갔다고 말하면 진실이 무엇인지는문제되지 않습니다.

권좌에 앉은 사람들의 힘, 군사력, 부, 기업 엘리트. 독재국가라 불리는 나라에서건 민주주의 국가라불리는 나라에서건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은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들의 힘은 국민의 복종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복종하기를 그만두면 그들의 힘도 사라집니다.

예, 민중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조직하기 시작하면요. 저항하면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형성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건 좋은 일인가요? 예, 독립은 언제나 좋은 일이죠. 그러나 무엇을 대가로 말입니까? 그 독립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요? 캐나다는 어떻습니까? 캐나다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 사회는 나쁘지 않습니다. 캐나다에는 대단히 매력적인 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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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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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책 제목 그대로 "밤이 선생"이라면, 그는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깊고 아득한 밤이다.

출생과 죽음이겠지만, 더 나아가 기쁨과 슬픔, 소유와 상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만남과 이별 등등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는데 정작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모른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극도로 천천히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잘못을수정할 수 있으며 오해를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있는 세계에 글도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서 나는 육체적으로는 말하기가, 정신적으로는 글쓰기가 더 편하다.

나는 절실한 상처의 기록을 읽기 좋아한다. 인간의마음을 찍는 사진이 있다면 그 사진에는 선인장처럼온통 가시가 박혀 있는 마음의 형상이 찍혀 있을 것이다. (…) 작가는 누구에게서나 상처를 찾아낼 수 있는사람이다. 그는 원효나 퇴계,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영혼의본질이라 하더라도 문학이 상처의 기록에 그칠 수는없는 노릇이다. (…) 작품에는 상처를 달래는 지혜의소중함과 어려움이 암시되어 있어야 한다. (…)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 《의미의 위기》, 문학동네, 2007, 82~84쪽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창작이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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