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좀머 씨를 지켜본 세 번의 경험

4가지 의문

사람들한테 '이해받기'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좀머 씨를 지켜본 세 번의 경험


제목처럼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화자인 '나'가 직접 좀머 씨를 지켜본 경우는 딱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날씨가 몹시 좋지 않은 날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아저씨를 만난 때였다. 아버지는
"그러다가 죽겠어요!"
라고 외치며 차에 타라고 했다. 이에 아저씨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아저씨를 뺀 다른 사람에게는 모순적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타라는 뜻이었는데, 죽지 않기 위해 타지 않겠으니 놔두라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좀머씨를 자기들 마음대로 보기 시작했다. 폐쇄공포증이니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느니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다.

이 모순적인 대답의 진실은 두 번째 만남에서 밝혀진다. 화자인 '나'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던 순간 좀머 아저씨를 봤다. 좀머 아저씨는 나무 밑에서 쉬는 데 끊임없이 고통에 신음소리를 냈다. 누워서 쉴 수조차 없었다. 죽음을 피해서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걸어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였다.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처럼 그를 놔두어야만 그는 살 수 있었다.

5, 6년 쯤 지난 뒤에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좀머 씨를 봤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 '나'는 좀머 씨 말처럼 좀머 씨를 살리려고 하지 않고 그냥 놔둔 채 지켜만 봤다. 아저씨는 그렇게 몇 해 동안 피해오던 죽음을 스스로 맞이했다.

4가지 의문

이야기를 다 읽고나서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좀머 씨 이야기지만 좀머 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의문은 '좀머 씨, 왜 그는 죽기로 결심했을까?'였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애쓰던 그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나였다. 두 번째 의문은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짝사랑 이야기는 왜 한 걸까?'였다. 짝사랑 이야기를 빼도 전체 줄거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럼에도 짝사랑 이야기를 한 까닭은 무엇인지 속 시원히 알기 힘들었다.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를 기점으로 이야기가 급격히 전환된다는 점이다. 세 번째 의문은 "그러다가 죽겠어요"란 표현의 의미였다. 마지막 의문은 '왜 '나'가 자살을 포기했냐'였다.

좀머 씨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것일까. 끝까지 걸어가면서 삶을 마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기를 꺼렸던 것일까. 그렇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걸었던 사람의 자살을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죽음을 피하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다니.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을 사람들처럼 여러가지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난 정말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 자살한 이유를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화자인 나처럼 그저 좀머 씨의 선택을 인정하고 지켜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짝사랑 이야기는 좀머 씨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였다. 소외된 사람이 좀머 씨가 아니라 '나'라는 점만 차이가 있었을 뿐. '나'가 짝사랑하는 카롤리나에게 '나'는 어떤 이름 없는 단지 '얘'였다. 카롤리나에게 '나'는 만날 아랫마을에 혼자 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우연히 아랫마을에 갈 일이 생겨서 같이 가려고 했을 뿐 카롤리나에게 '나'란 존재는 크게 의미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는 카롤리나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단지 '얘'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좀머 씨의 전체 이름도 모른 채 그저 좀머 씨라고 부르는 것과 같았다. '나'는 카롤리나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다.

아버지가 틀에 박힌 빈말이라고 강조하던 말이 바로 "그러다가 죽겠어요."였다. 그 까닭은 사람들은 사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관심 있는 척하기 때문이었다.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36쪽)
정말 아버지 말처럼 아버지도 마을 사람들도 좀머 씨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가 있을 때는 그의 병명을 자기들 멋대로 지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저 "완전히 돌아버렸겠지."하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자신에게 매정한 세상에 복수하려고 자살을 결심하려던 순간 좀머 씨를 보고 자살을 포기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좀머 씨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진실을 모른 채 자기들 멋대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처럼 생각한다면 정작 일찌감치 자살해야할 사람은 좀머 씨였다. 하지만 그는 살려고 했다. 살려고 끊임없이 걸었다. 그런 그에 비해 '나'의 자살 동기는 표면적으로는 '꼬딱지' 때문이었다. 정말 자살은 '웃기는 짓'이란 데에 생각이 미친 나는 자살을 포기했다.

사람들한테 '이해받기'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도 어려움

'좀머 씨, 왜 그는 죽기로 결심했을까?'
'짝사랑 이야기는 왜 한 걸까?'
"그러다가 죽겠어요"의 뜻은 뭘까?
'왜 '나'가 자살을 포기했냐'

내가 가진 4가지 의문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한테 이해받을 수 있는가'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좀머 씨의 죽음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였고, 짝사랑 이야기는 '나'의 애정과 관심이 카롤리나에게 이해받지 못한 경우였고, '그러다가 죽겠어요'란 말은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상투성을 보여주며, '나'의 자살 포기는 자살로 다른 사람의 관심과 이해를 바랄 수 없음을 말해준다.

사실 '다른 사람들한테 이해받을 수 있는가'란 문제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란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문제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나한테는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전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분만. 일부분 밖에 모르면서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머 씨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렇게 많은 말들을 사람들은 왜 했을까. 따뜻한 관심도 아니었고 그저 자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한 사람을 비웃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따뜻하지 않은 관심보다는 그저 자신을 놔두기를 바란 좀머 씨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나'가 자살했다면 그 누가 '나'의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다른 원인이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자살의 결정적인 외적인 원인은 피아노 선생님의 '코딱지'때문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특히 피아노 선생님한테 자신의 상황을 이해받지 못했다는 억울함이었다. 죽음으로써 세상에 복수하려고 했지만 '나'가 죽었다면 이해받기 보다는 차가운 동정을 얻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나'의 죽음이 좀머 씨의 죽음처럼 그저 하루동안 안주거리 정도의 이야기거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며 살때 허무함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이해를 받으면 좋겠지만 모두 이해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이해받을 수 있을까란 문제는 관계의 진실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진실하지 않은 관심은 드러날 수밖에 없고 결국 상대방에게 상처만 준다. 좀머 씨가 있을 때도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의 반응과 관심은 진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따뜻할 수 없었다. '나'처럼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좀머 씨의 삶을 인정해주고 지켜준 느낌이 들었다. 좀머 씨가 '나'가 자살 뒤를 상상한 것처럼 자기가 죽은 뒤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아프지 않았을까. 카롤리나와 '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롤리나가 '나'와 맺는 관계의 일회성과 상투성은 '나'에게는 평생 상처로 남지 않았을까.

이야기 전체를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거 같다. '이해받기'에서 한 문장, '이해하기'에서 한 문장.

'이해받기' 다른 사람의 이해를 바라며 살기보다는 자기 삶을 살아가기
'이해하기' 다른 사람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해한만큼만 다가서기


읽은 책 :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유혜자, 1996년, 열린책들  

 
2007/02/18 19:06 http://blog.hani.co.kr/noriteo/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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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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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은 화자인 '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키가 겨우 1미터를 빠듯 넘겼던 시절 나는 나무타기를 좋아했다. 그 시절 마을에 좀머 씨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년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다녔다. 하지만 정작 왜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고,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2. 좀머 아저씨에게 들은 한 문장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는 좀머 아저씨가 분명하고 확실한 문장을 말하는 소리를 딱 한번 들었다. 7월 말 지독히 날씨가 나빴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내리더니 이내 우박으로 변했다. 우박은 처음에는 바늘귀만하다가 돌멩이만큼 커졌다. 얼마 후 우박도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때 지나가다 한 사람을 발견했다. 좀머 씨였다. 아버지가 태어준다고 불렀다. 그는 불러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러다가 죽겠어요!"
아버지가 틀에 박힌 빈말이라고 하던 그 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그 말을 처음으로 썼다. 좀머 씨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3. 좀머 아저씨 이야기 - 아저씨는 그냥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머니는 좀머 씨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심하다고 했다. 밀폐 공포증이란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누나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이 일어나서 온몸이 떨린다고 했다. 밖을 돌아다닐 때만 경련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난 좀머 씨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하라고 강요 받지도 않고 있으며,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았다.

4. 내 짝사랑, 카롤리나 퀵켈만

우리 반에 카롤리나 퀵켈만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다. 나는 카롤리나를 내 곁에 앉혀 놓고 목덜미나 다른 어느 곳에 입을 대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실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카롤리나가 내게 와서 말했다.
"너 아랫마을에 만날 혼자 가지?"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그 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맞을 준비를 했다. 적당한 산책로를 알아 두려고 종일 숲속을 해맸다.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했다.
월요일이 되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여학생들만 수업을 한 시간 더 받았다. 돌발 사태였지만 별로 언짢지 않았다. 반드시 극복해 낼 수 있는 보충 시험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카롤리나가 나왔다.
"얘! 너 나 기다렸니?"
"얘! 나 오늘 너랑 같이 안 가. 엄마 친구가 아프대. 그래서 엄마가 거기 안 간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
그 뒤로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5. 피아노 선생님의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 나,

좀머 아저씨를 만나 자살을 포기하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키가 벌써 1미터 35였고 몸무게는 32킬로그램이었다. 난 미스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웠다. 선생님은 꼬부랑 늙은이에 백발이었고, 허리는 굽었고, 피부는 쭈글쭈글했다. 내게는 너무 큰 어머니 자전거를 타고 선 자세로 페달을 굴려가며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생님 댁까지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었다.

문제는 오소리개가 나를 울타리에 붙잡아두고 자동차 두대와 행인 네 명을 만났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정확히 10분 늦었다. 선생님은 다짜고짜 화를 냈고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다. "개 때문에."하고 이야기하자 내 말을 끊고 개랑 놀고 얼음 과자를 사먹었다고 단정지었다.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고 눈물만 흘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중요한 일로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 선생님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내게 퍼부었다. 엉망진창이었다. 난 누나가 아무리 피아노를 못 치는 사람이라도 칠 수 있다던 디아벨리곡을 칠 때도 똑같은 실수를 두번이나 저질렀다. 선생님은 화를 내며 재채기를 했고 둘째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고는 내가 실수한 건반을 눌렀다. 이때 콧털에 붙었다가 둘째손가락으로 옮겨 붙었던 크기가 손톱만 하고 굵기는 연필만한 녹황색 영롱한 꼬딱지가 건반에 붙었다. 다시 같은 연주를 시작했고 난 꼬딱지가 붙은 그 검은 건반을 눌러야만 했다. 검은 건반을 칠 순간이 도래했고 난 무슨 일이 있을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것도 무섭지 않다는 듯 옆 건반을 쳤다. 선생님은 악마처럼 펄펄 날뛰었다. 사과를 집어 던졌고 사과는 벽에 흠집을 내며 터져 버렸다. 선생님은 소리쳤다.

"네 물건 싸 가지고 꺼져 버려."

난 세상을 원망했다. 나를 늦게 만든 개도 행인도, 힘든 곡을 써서 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도,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풍겔 선생님도, 딱 한번 도와줄 것을 간청했찌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느님도 원망했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잘 먹고 잘 해 보라지!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난 죽기로 결심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제일 큰 나무를 찾아갔다. 그 나무 위로 올라갔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모두들 가슴을 치며 울겠지. 장례식 중 가장 멋진 장례식이 될 거고 사람들은 슬픈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난 세상에 대한 복수와 세상 안에서의 영생, 복수를 택하기로 했다. 셋하면 뛰어내리기로 했다.

"하나! 둘!"
하는 순간 길에서
"탁! 탁! 탁!"
하는 소리가 났다. 나무 밑에 좀머 아저씨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서서 숨을 헐떡이며 사방을 살폈다. 아저씨는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미처 숨쉬기도 전에 바로 일어서더니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소리는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신음소리는 아저씨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일초라도 아저씨를 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저씨는 금방 몸을 추스리며 일어났다. 다시 사방을 살피며 빵을 먹고는 떠났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싹가셨다. 웃기는 짓거리 같았다.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6. 좀머 아저씨의 죽음

그 뒤로 5, 6년쯤이 지난 뒤였다. 그날 나는 아저씨를 다음 번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세월이 지난 만큼 난 키가 1미터 70에 육박했다. 그 무렵 고등학교 5학년에 올라갈 차례였던 내 생활은 갈등의 점철이었다. 언제나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도리상 해야 되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거나,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요를 받았고, 지시를 받았고,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미켈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 다음 집으로 향하던 가을 날의 일이었다. 호수 가장자리에 좀머 아저씨가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물이 아저씨의 장화 위까지 차있었다. 박아 놓은 말뚝 같이 서있던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깊이가 더해가더니 물이 엉덩이 위, 가슴까지 차올랐다. 나는 놀랐기보다는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당혹스러웠으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물이 아저씨의 목구멍까지 찾고 이어서 턱위까지.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았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지르지도 못했다. 아저씨를 구하기 위해서 뗏목이나 공기매트를 찾으려고 해 보지도 않은 채 멀리에서 가라앉고 있는 작은 점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7. 아저씨의 죽음 뒤 사람들의 반응

좀머 아저씨가 없어졌다는 것이 알려지기까지는 2주일이 걸렸다.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은 좀머 아저씨의 다락방의 월세를 받으려던 리들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아저씨는 2주일이 더 지난 뒤에야 실종 신고를 했고,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광고가 났다. 그때서야 아저씨의 온전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완전히 돌아 버렸을 거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했다. 나는 아저씨의 행방을 알았지만 침묵을 지켰다. 내가 왜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전체 줄거리를 써보았다. 이야기 별로 나누면 위에서 나눈 것처럼 일곱 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1. 화자인 '나' 소개와 좀머 아저씨 소개,
2. 그 뒤 좀머 아저씨가 말한 한 문장을 들었던 날의 추억,
3. 아저씨에 대한 가족들과의 대화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
갑자기 주제와 별 관계 없어 보이는
4. 짝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5. 그 뒤 코딱지 때문에 자살하려다가 아저씨를 보고 자살을 포기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6.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 죽음과
7. 그 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읽은 책 :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유혜자, 1996년, 열린책들

2007/02/18 17:45 http://blog.hani.co.kr/noriteo/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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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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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신화란?

연금술사를 읽는 내내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바로 이 '자아의 신화'였다. 자아의 신화란 '항상 자신이 이루기를 소망해오던 것'을 뜻했다. 책의 주제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라'
였다. 누구는 안 떠나고 싶어서 안 떠나나.

우리들 각자는 젊음의 초입에서 자신의 자아의 신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여.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 모두를 꿈꾸고 소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그 신화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해주지.”
(...)
“그것은 나쁘게 느껴지는 기운이지.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 기운이 자아의 신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 자네의 정신과 의지를 단련시켜주지.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47쪽)

팝곤 장수의 이야기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까. 자기가 바라는 '자아의 신화'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자아의 신화'임에도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팝콘 장수 이야기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러자 노인은 광장 한구석, 빨간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팝콘 장수를 가리켰다.
“저 사람도 어릴 때 떠돌아다니기를 소망했지. 하지만 팝콘 손수레를 하나 사서 몇 년 동안은 돈을 버는 게 좋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야. 좀더 나이가 들면 한 달 정도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겠지. 어리석게도 사람에게는 꿈꾸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한 거야.”
“저 사람은 차라리 양치기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했어요.”

산티아고가 소리 높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 사람도 그 생각을 했었다네. 하지만 팝콘 장수가 양치기보다 남보기 근사하다고 생각한 거지. 양치기들은 별을 보며 자야 하지만, 팝콘 장수는 자기 집 지붕 아래 잠들 수 있잖아. 또 사람들도 딸을 양치기보다는 팝콘 장수와 결혼시키려 하지.”
..
“결국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거지.”(48쪽)

행복의 비밀은 무엇일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좀더 나이가 들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돈이 생기면 그때"
그 사람들에게 그때는 언제쯤 올까. 평생이 지나도 오지 않을 거 같다.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정작 그들이 행복할까. 뭔가 빠진 듯하다. 행복의 비밀은 무엇일까.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배워오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다네. 그 젊은이는 사십 일 동안 사막을 걸어 산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이르렀지. 그곳 저택에는 젊은이가 찾는 현자가 살고 있었어. 그런데 현자의 저택, 큼직한 거실에서는 아주 정신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어. 장사꾼들이 들락거리고, 한쪽 구성에서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식탁에는 산해진미가 그득 차려져 있더란 말일세.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까지 있었지. 현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젊은이는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 마침내 젊은이의 차례가 되었어.

현자는 젊은이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행복의 비밀에 대해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했어. 우선 자신의 저택을 구경하고 두 사긴 후에 다시 오라고 했지. 그리고는 덧붙였어.
‘그런데 그 전에 지켜야 할 일이 있소.’
현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기름 두 방울이 담긴 찻숟가락을 건넸다네.
‘이곳에서 걸어다니는 동안 이 찻숟갈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오.’
젊은이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찻숟가락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두 시간 후에 그는 다시 현자 앞으로 돌아왔지.
‘자 어디.......’
현자는 젊은이에게 물었다네.
‘그대는 내 집 식당에 있는 정교한 페르시아 양탄자를 보았소? 정원사가 십 년 걸려 가꿔놓은 아름다운 정원은? 서재에 꽂혀 있는 양피지로 된 훌륭한 책들도 좀 살펴보았소?’
젊은이는 당황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노라고 고백했네. 당연한 일이었지. 그의 관심은 오로지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다시 가서 내 집의 아름다운 것들을 좀 살펴보고 오시오.’
그리고 현자는 이렇게 덧붙였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모르면서 사람을 신용할 수는 없는 법이라오.’
이제 젊은이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찻숟가락을 들고 다시 저택을 구경했지. 이번에는 저택의 천장과 벽에 걸린 모든 예술품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어. 정원과 주변의 산들, 화려한 꽃들, 저마다 제자리에 꼭 맞게 놓여 있는 예술품들의 고요한 조화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네. 다시 현자를 찾은 젊은이는 자기가 본 것들을 자세히 설명했지.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맡긴 기름 두 방울은 어디로 갔소?’
현자가 물었네. 그제서야 숟가락을 살핀 젊은이는 기름이 흘러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다네.
‘내가 그대에게 줄 가르침은 이것뿐이오.’
현자 중의 현자는 말했지.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두 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도다." (60쪽부터)

그들에게는 숟가락 속 두방울이 빠진 것이다. 두방울이 뜻하는 것은 자아의 신화가 아닐까. 자기가 삶 속에서 소중히 지켜가야할 것, 잊지말아야 할 것.

익숙한대로 그저 꿈만 꾸며 살아가는, 크리스털 가게 주인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게 쉬운가. 지금 익숙한대로 그저 꿈으로 간직하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주인공 산티아고가 만난 크리스털 가게 주인처럼.

“왜냐하면 내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메카이기 때문이지. 이 모든 똑같은 나날들, 진열대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저 크리스털 그릇들, 그리고 초라한 식당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바로 메카에서 나온다네. 난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 자네는 양이나 피라미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현하길 원하지. 그런 점에서 자넨 나와 달라. 나는 오직 메카만을 꿈으로 간직하고 싶어. 마음 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율법에 따라 그 바위를 만지기 전에 광장을 일곱 바퀴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보았어.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94쪽)

“다시 말하지만 난 내 삶에 무척 익숙해져 있네. 자네가 오기 전에 나는 내 친구들이 파산도 하고 가게를 키우기도 하며 변화하는 동안 그저 같은 장소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항상 우울했지. 그러나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지금의 이 가게가 내가 바라던 꼭 그만큼의 가게라는 걸 알게 된 거지. 난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또 달라지고 싶지도 않네. 난 지금 이대로의 내 상황이 만족스러워.”(98쪽)

주인은 정말 만족하는 것일까. 자기 자신에게 '만족해야만 한다'고 최면을 거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 때문에. 산티아고는 어느 정도 돈을 번 뒤에 떠났다. 가게 주인처럼 꿈을 그저 꿈으로 놔두지 않고.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좇는 사람한테는 표지가 보인다고 한다. 표지. 아무리 둘러봐도 내게 보이지 않는데. 표지를 두고도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산티아고가 여행 중 만난 영국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삶의 모든 것이 다 표지야."(119쪽)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첫 단계

연금술의 첫 번째 단계이자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첫 번째 단계. 그것은?

“이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야. 불순물이 섞인 유황을 분리해내야 하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말로 이제껏 ‘위대한 업’을 시도해보려던 내 의지를 꺾었던 주범이지.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166쪽)

“이방인이 낯선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아의 신화를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어떤 것을 찾아서.”
기사는 칼을 칼집에 꽂았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매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청년은 마음이 놓였다.
“그대의 용기를 시험해 본 것이네. 용기야말로 만물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183쪽)

"자아의 신화를 사는 자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세."(230쪽)

용기를 갖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과연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우리들에게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가.

정작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팝콘 장수가 양치기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양치기가 되었을 때 겪게 될 고통과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때때로 불평하는 건, 내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야.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인간의 마음은 정작 가장 큰 꿈들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해. 자기는 그걸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사라져버린 사랑이나 잘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던 순간들, 어쩌면 발견할 수도 있었는데 영원히 모래 속에 묻혀버린 보물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만으로도 두려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아주 고통받을 테니까.’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고통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연금술사에게 말했다.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나쁜 거라고 그대의 마음에게 일러주게. 어떠한 마음도 자신의 꿈을 찾아나설 때는 결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꿈을 찾아가는 매순간이란 신과 영겁의 세월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212쪽)

사랑 VS 자아의 신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용기를 갖고 한걸음씩 자아의 신화를 좇아가던 산티아고. 그에게도 가장 큰 고비가 찾아온다. 사랑을 좇을 것인가 자아의 신화를 좇을 것인가 고뇌할 때였다.

"사 년째 되는 해, 표지들은 그대를 떠날 것이네. 그대가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부족장들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대에게서 고문의 자리를 빼앗아갈 걸세. 그때쯤 그대는 아주 부유한 상인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대는 밤이면 사막의 야자나무 숲을 서성거리며 번민하게 될 걸세. 자아의 신화를 이루지 못했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으며 말이지.
명심하게.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197쪽)

사랑과 자아의 신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길을 가로막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족의 기대와 사랑이었다.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내 자아의 신화 때문에 가족들을 힘들게 할 수 없다고.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사람을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산티아고의 연인 파티마처럼. 믿고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산티아고가 파티마에게 미안해하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려고 할 때 파티마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뿐, 사랑에 이유는 없어요.” (200쪽)

결국 산티아고는 자아의 신화였던 보물을 찾고 파티마에게 돌아간다. 얼마나 행복할까. 피라미트 밑에 가서 땅을 파다가 도적을 만나 돈을 빼앗기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도적이 비웃으며 자기도 보물 찾는 꿈을 자주 꾸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게 바로 표지였고 도적이 말한 그곳에 보물이 있었다는 결말. 반전이 산뜻했다.

진정한 연금술사란 누구일까?

왜 이야기의 제목은 연금술사였을까. 연금술사는 납, 구리 따위의 비금속으로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진정한 연금술사란 누구일까.

“연금술사에는 세 부류가 있네.”
스승의 대답이었다.
“연금술의 언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해는 하지만 연금술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 또한 알기에 마침내 좌절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
“그럼 세 번째 부류는요?”
“연금술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연금술의 비밀을 얻고,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해낸 사람들일세.”(271쪽)

진정한 '삶의' 연금술사란 연금술의 비밀인 용기를 갖고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자아의 신화'를 발견하고 이루어낸 사람들이 아닐까.

이제 나도 다 알았다. 삶의 연금술의 모든 것을. 연금술사가 되는 길만 남았는데 아직도 두렵다. 스승이 했던 연금술사의 두 번째 부류가 되지는 말아야할텐데.

"이해는 하지만 연금술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 또한 알기에 마침내 좌절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  


2007/01/16 18:22 http://blog.hani.co.kr/noriteo/3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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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향연 밀레니엄 북스 84
플라톤 지음, 왕학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고발장 내용

<고발장>

"소크라테스는 범죄인이다. 청년들에게 유해하고 파멸적인 영향을 주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으며 다른 새 귀신에 제사 지내고 있다."(47쪽)

소크라테스의 2가지 범죄

소크라테스가 저지른 범죄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청년들에게 유해하고 파멸적인 영향을 준다.
2.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정말 청년들에게 유해하고 파멸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하나씩 변명하기 시작한다.

먼저 첫번째 변명

'소크라테스는 정말 청년들에게 유해하고 파멸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가?" 직접 들어보자.

멜레토스! 이리 나와서 대답해 다오. 젊은이들을 가능한 잘 되게 선도하는 것을 당신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분들에게 말해 다오. 누가 그 사람들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상 물론 알고 있을 테니까. 말하자면 당신은 청년들에게 해를 끼치고 나쁘게 만들고 있는 자를 발견했다고 해서 나를 고발하여 이 재판관들 앞에 끌어냈다. 그렇다면 선도하는 자가 누구인가? 자, 이분들에게 똑똑히 말해 다오. 그것 보라. 멜레토스! 당신은 대답을 못하고 잠자코 있지 않은가!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바로 내가 말한, 당신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지 않는가? 아무튼 자네! 누가 그 사람들을 선도하고 있는가?
“그것은 법률이다.”
아니, 자네! 내가 묻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법률을 직접 처음 알게 되는 것은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여기 있는 재판관들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멜레토스! 이분들이 청년들을 교육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을 선도하고 있단 말인가?
“바로 그렇다.”
이분들이 다 그렇단 말인가, 아니면 이분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그렇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모두가 다 그렇다.”
정말이지, 헤라에 맹세코, 훌륭한 이야기다. 좋은 일을 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여기 있는 방청인들은 청년들을 선도하는가, 선도하지 않는가?
“이 사람들도 선도한다.”
그러면, 평의원들은 어떤가?
“평의원들도 그렇다.”
그렇다면 멜레토스! 국민의회에 나오는 의원들이 설마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치지야 않겠지. 그 사람들도 젊은이들을 선도하는가?
“그 사람들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를 제외한 아테네 시민 모두가 훌륭하고 착한 인간을 만들고 있지만, 나만 나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불행을 당신에게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해 다오. 당신은 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데, 누구 한사람만이 그것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뿐이거나 혹은 극히 소수가 있을 뿐이고, 대부분 인간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다루거나 하며 그것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떤가, 멜레토스! 말에 대해서나 다른 모든 동물에 대해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당신이나 아니토스가 반대하건 찬성하건 이것은 아주 뚜렷한 일인데, 그런데 청년들에게 만일 단 한 사람이 해를 끼치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준다면,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네.
그것은 그렇고, 멜레토스! 당신은 여태까지 청년들에 관한 걱정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었다. 말하자면 나를 이 자리에 끌어내게 된 그 문제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그 무관심함을 지금 당신은 똑똑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50-53쪽)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멜레토스는 청년들에 관한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청년들을 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답을 못하는 멜레토스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난다. 소크라테스의 어떤 점이 유해한 영향을 준 것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은 쉽게 찾을 있는 것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이에 멜레토스는 법률이 청년들을 선도한다고 하고 질의응답 끝에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청년들을 선도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아주 다행한 일이라고 한다. 말 같은 동물을 제대로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사람을 제대로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결국 처음 멜레토스는 청년들을 선도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기도 청년들을 선도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니까 주장의 진실성이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해한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증명하다

이렇게 말했다고 물론 소크라테스가 유해한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선인과 악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가 유해한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밝힌다.

사람이 사는 데는 좋은 시민들 속에서 사는 것과, 나쁜 시민들 속에서 사는 것과 어느 쪽이 좋은가? 친구여! 대답해 다오. 결코 어려운 것을 묻지는 않았으니까. 나쁜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무언가 나쁜 짓을 하지만, 좋은 사람은 무언가 좋은 일을 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한테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오히려 해를 입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대답해 다오. 친구여! 법도 대답할 것을 명령하고 있으니까. 해를 입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물론 없다.”
자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이 자리에 끌어낸 것은 내가 젊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서 더 나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고의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인가?
“적어도 나는 고의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멜레토스! 나쁜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을 당신은 말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일찍부터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만큼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함께 사는 사람을 타락시키면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손해를 입기 쉽다는 것을 알지 못할만큼 무지몽매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결과 엄청난 악을 나 스스로가 자진하여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신의 주장인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멜레토스! 또 이 세상의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실제로 남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거나, 혹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고의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만약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내 고의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해서는 이런 자리에 끌어낼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서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 법이다. 왜냐하면 고의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을 가르쳐 준다면 그만둘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만나서 가르쳐 주기를 피했다. 말하자면 그럴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나를 끌어냈다. 이곳은 징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불려 나올 곳이지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54-56쪽)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있고 선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악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악한 일을 한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멜레토스는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고의로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 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기 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따라서 그런 일을 고의로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A)남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B)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더라도 고의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멜레토스의 주장 "소크라테스는 고의로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주장은 A와 B 어떤 경우가 참이더라도 그릇된 주장이 된다. 만약 B의 경우라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울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서 가르치고 타일러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법정에 세웠다. 이는 멜레토스가 주위 사람들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에게 좋은 일을 할 시도를 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멜레토스 자신도 전제를 참이라고 인정했으니까 멜레토스 자신은 '선인은 아니다'란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소크라테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는가?

두번째 변명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직접 들어보자.

아테네 시민 여러분! 아무튼, 멜레토스가 크든 작든 간에 아직 이런 일에 한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말한 대로 이미 뚜렷해졌소. 그러니 이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소. 그렇더라도 멜레토스! 우리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청년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당신은 주장하는가? 물론 당신이 제출한 소장에 의하면,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말라면서 다른 새로운 귀신 따위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그런 것을 가르침으로써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당신의 주장인가?
“그렇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것이다.”
그렇다면 멜레토스! 지금 언급되고 있는 그 신에 맹세코 나와 그리고 여기에 있는 분들에게 더 똑똑히 말해 다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어느 쪽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종류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치는데 - 그러나 나 자신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고 있으므로, 즉 나는 순전한 무신론자가 아니니까 이 점에서는 죄를 저지로 있지 않다 - 국가가 믿는 신이 아니라 다른 신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다고 당신은 말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 즉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이 당신이 나를 고발하는 점인가? 아니면, 내가 전혀 신을 믿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혀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전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 참 놀랍군, 멜레토스! 어째서 당신은 그런 말을 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서 믿지 않는단 말인가?
“제우스 신에 맹세코 그렇다. 재판관 여러분! 이 사람은 태양을 돌, 달을 흙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당신은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세기의 자연철학자. 그는 신으로 여겨지던 해와 달이 단지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태양 빛이 지구, 달, 기타의 천체를 밝게 만든다고 주장했다.)를 고발할 생각인가, 친애하는 멜레토스! 그리고 당신은 그와 같이 여기 있는 분들을 멸시하여 클라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의 책이 그런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이분들이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청년들이 그런 것을 나한테서 배우고 있는 줄 아는구나. 그 책은 기회가 있으면 시장에 나가서 기껏 비싸봐야 1드라크마만 주면 살 수 있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나의 주장인 양 내세우면 금방 비웃어 줄 수 있는 일이다. 워낙 기묘한 주장이니까. 아무튼 제우스 신을 두고 묻지만, 당신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신의 존재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제우스 신에 맹세코, 당신은 도무지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니, 멜레토스! 당신의 말은 믿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내가 보건대 당신도 믿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보건대,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 사람은 아주 무도하고 무례한 사람인 것 같소. 별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고발을 한 것도 그 무도와 무례와 젊은 혈기 탓인 것 같소. 왜냐하면 이 사람은 수수께끼를 만들어서 시험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지혜 있는 자라고 하지만, 내가 장난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는 줄 알까. 아니면, 나는 이 사람과 다른 청중들을 함께 끝내 속일 수 있을까’하고 말이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소장에서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오. 마치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다. 그래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런 말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소. 그러나 이런 것은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면 할 수 없는 말이오.
멜레토스!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지만, 인간의 존재는 믿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이 사람이 대답하게 해주시오. 여러분! 이러쿵저러쿵 자꾸만 떠들지 말기를 바라오. 어떤가. 말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 하는 일은 인정하는 자가 있겠는가? 또 피리 부는 사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지만 피리 부는 일은 인정하는 자가 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아! 그런 자는 없다. 만일 당신이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여러분을 위해서 ‘없다’ 이렇게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기 바란다. 귀신이 하는 일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귀신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체면을 보아 부득이한 대답이기는 하겠지만 대답해 주어서 매우 고맙다. 자, 그런데 당신의 주장에 의하면, 나는 귀신 따위를 믿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새삼스러운 것인지, 오래된 것인지는 다음으로 미루고, 아무튼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내가 귀신 따위를 믿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으며, 당신의 소장에도 그것을 선서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귀신 따위를, 귀신이 하는 일을 믿는다면, 틀림없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필연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확실히 그렇다. 당신이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동의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귀신을 우리는 신 또는 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가 당신은 이 주장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확실히 나는 찬성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듯 내가 귀신을 믿고 있다면, 그리고 그 귀신이 무슨 신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내가 주장하듯이 당신은 수수께끼를 내걸고 장난을 치고 있는 셈이 된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귀신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만일 귀신이 신의 방계의 자식들로서 님프나 그밖의 전설에 나오는 어떤 여성들한테 태어난 사생아라면, 신의 자식은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노새가 말과 나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할 것이다.
아무튼 멜레토스! 당신이 이런 고발을 한 것은 이런 점에 관해 우리를 시험해 보고 있거나 아니면 나를 고발하기 위한 진짜 죄상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이며 그 이외의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성을 가진 사람을 붙잡고, 어떤 사람이 귀신이 하는 일은 믿고, 신이 하는 일은 믿지 않거나, 다시 또 이러한 일들은 믿는 사람이 귀신도 신도 반신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해봐야 소용 없는 것이다.(57-65쪽)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 귀신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해간다. 귀신도 신 또는 신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멜레토스에게 묻고 이에 멜레토스도 동의한다. 신의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노새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노새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말과 나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노새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말과 나귀의 존재도 인정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를 비방한 신을 믿지 않으며 귀신을 믿고 있다는 주장은 모순된 주장이다.
이렇게 해도 의문은 남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다른 문제이니까. 국가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귀신이 더 뛰어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지않나. 마치 자신만의 신이 최고신이고 다른 종교의 신들은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종교집단처럼.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이 국가의 신의 뜻에 따른 삶이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델포이의 신 아폴론의 뜻에 따른 삶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는데 그 내용이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는 아무도 없다'였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혜 있는자를 찾아가며 신탁의 내용을 세상에 드러내려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한 내용을 옮겨본다.

나는 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도 사실상 아름다움이나 선을 모르고 있지만 이 사람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모르니까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깨달은,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모양이다.(32쪽)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지혜는 사실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지혜가 있는 자니라."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탁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는 신을 도와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나랏일이건 집안일이건 이렇다 할 가치가 있는 무엇을 할 여가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는 있소만, 이것도 다만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43쪽)

그의 지혜는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아는 지혜였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지적 정직성이 지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택한 까닭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모두 들었고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독자에게는 의문이 생길 것 같다. 죄없는 소크라테스가 왜 악법대로 죽음을 선택하느냐고.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그대는 부끄럽지 않은가. 평소에 그런 일을 하다가 그 때문에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
하고 말이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마땅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오.
“당신의 말은 옳지 않소. 여보시오!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협을 헤아려서는 안 되오.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오직 올바른 행위를 하느냐 나쁜 행위를 하느냐, 곧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약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하는 것만 고려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그와 같은 주장을 따른다면, 저 트로이아에서 생애를 마친 반신들은 하찮은 것들이 되는 셈이니까. 그 중에서도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같은 이는 수치를 참는 데 비하면 그런 위험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헥토르를 죽이려고 서두르는 그에게 여신인 어머니가,
“내 아들아! 만일 네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으려고 헥토르를 죽인다면, 너 자신도 죽게 될 것이다. 헥토르의 바로 뒤에서 사신(死神)이 너를 붙들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나는 아오만, 아킬레우스는 이 말을 듣고도 죽음이나 위험은 아랑곳 없이, 오히려 친구를 위해 원수를 갚지 않고 비겁한 자로서 살아남게 되는 것을 훨씬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 나쁜 자에게 벌만 준다면, 저는 당장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남아 이 땅 위의 웃음거리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적에게 원수를 갚고 곧 죽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대답한 것이오. 설마 당신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위험을 걱정했다고는 생각지 않겠지요. 다시 말해서, 아테네 시민 여러분! 진실은 다음과 같소. 사람이 어느 자리를 최선으로 믿고 자기를 앉히거나, 혹은 윗사람에 의해서 그 자리에 배치될 때는 그 자리를 지키려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죽음도 그 밖의 그 무엇도 결코 수치보다 먼저 고려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했을 때 - 나는 그렇게 믿고, 또 풀이했소만 - 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오. 그때야말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나를 법정에 끌어내야 마땅할 것이오.

그것은 신탁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며, 지혜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러분! 바로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는 데 지나지 않소.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그러나 여러분! 나는 이러한 점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 어떤 점에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사후(死後)세계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오. 그러나 옳지 않은 짓을 한다는 것, 신이거나 사람이거나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는데 이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이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래서 나는 악인 줄 알고 있는 이들, 나쁜 것들보다 어쩌면 좋은 것인지도 모르는 쪽을 결코 무서워하거나 피하지는 않을 것이오.(66-71쪽)

그 까닭은 신탁에 따르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애지자(愛智者)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신으로부터 명령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확실하지도 않은 죽음이 악이란 생각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신탁의 명령인 애지자의 사명을 저버리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국외로 탈출한다고 애지자의 사명을 더 잘 해낼 수도 없는 환경 아닌가. 자신의 고향에서도 버림받은 자가 국외에서 애지자로서 인정을 받겠는가. 그곳에서도 같은 취급을 받고 고발을 당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사실을 앎에도 국외로 탈출을 선택하는 것은 죽음이 무서워 피하는 것과 다름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신탁의 명령에 따르고 자신의 삶의 진실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피한다는 것은 신탁을 저버린다는 뜻이고 이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는 멜레토스의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주장이 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써 신을 믿고 있음을 증명하고 멜레토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살아갔기에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끝으로 작품해설 중에 나온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본다. 지적 정직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살폈던 위대한 철학자를 생각하며.

로고스를 싫어하지 말아라. 너무도 로고스를 쉽게 믿어 버리면 나중에 다른 로고스가 있음을 발견했을 때 충격을 받고, 로고스는 모두 불확실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리하여 로고스를 싫어하게 됨은 로고스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나쁜 것이다.

라고 경고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우리는 그리스 사상의 가장 건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144쪽)

읽은 책 :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지음, 왕학수 옮김, 2002년, (주) 신원문화사 펴냄 
 

2007/01/07 13:21 http://blog.hani.co.kr/noriteo/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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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향연 밀레니엄 북스 84
플라톤 지음, 왕학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악법도 법이다'란 표현은 역시 책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말인지. 소크라테스가 억울할 것 같다. 하지도 않은 말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악법도 법이니 따르라고?

악법도 법이긴 하다. 이 명제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명제가 숨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전제 1: (모든 법대로 따라야 한다.)
전제 2: 악법도 법이다.(법 중에는 악법도 있다.)
결론: 악법대로 따라야 한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드는데 문제가 있다. 만약 숨어있는 명제 '모든 법은 따라야 한다'가 틀린 명제라면 결론도 그릇된 것이다.

'모든 법대로 따라야 한다.'가 참이라면 기존에 만든 법과 맞지 않는 법을 만들 수가 없다. 기존 법과 맞지 않는 법을 만드는 순간 '모든 법을 따라야 한다'는 명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도 법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여야만 한다. 지금도 기원전 1600년경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 내용처럼 '귀에는 귀, 이에는 이'라고 하며 내 팔이 부러졌다고 상대편 팔도 부러뜨리지는 않는다. 실제 역사를 살펴볼 때 법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든 법대로 따라야 한다."란 명제를 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결론인 '악법대로 따라야 한다'는 물론 그릇된 명제이다.

악법도 바꿀 수 있다

법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사회적 필요에 따라 합의하에 변해왔다.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산물이므로 가치보다 우선될 수 없다. '악법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전제 1 : 좋지 않은 법은 바꿀 수 있다.
전제 2 : 법에는 선법도 있고 악법도 있다.
결론 : 악법은 바꿀 수 있다.


'악법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악법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바꿔야한다'는 실천의지를 담는 명제가 널리퍼져야 하지 않을까. 실제 소크라테스의 삶도 악법을 소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악법이 악법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믿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었던 것이니까.

읽은 책 :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지음, 왕학수 옮김, 2002년, (주) 신원문화사 펴냄

2007/01/07 12:11 http://blog.hani.co.kr/noriteo/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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