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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시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남석 옮김 / 평사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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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군주론은 잘 모르는 유럽의 옛날 인물들이 등장하는 잘 이해 안 가는 재미없는 고전이었죠ㅜ 다시 이 책으로 군주론을 읽으니 새롭고 재미있네요. 당시 시대 배경, 인물들에 대한 설명, 취업준비생인 마키아벨리가 쓴 입사지원서란 관점에서 설명해주니 쉽고 잘 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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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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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http://nadle.tistory.com/71

광고

정말 어처구니 없는 광고를 하나 발견했어.

"스승이 제자를 찾습니다.
세계를 구하려는 진지한 열망을 가져야 함.
본인 지원 바람."(12p)

어떤 미치광이인가, 궁금했지. 그래서 그를 찾아갔어. 찾아갔더니 고릴라더라. 그 고릴라 뒤쪽 벽보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을까?"(20p)

어떤 뜻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너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그 고릴라 이름은 이스마엘이었어. 자신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있게 된지 이야기해주었지. 자신이 가르칠 주제는 '감금'이래. 나한테 이렇게 묻더라.


이야기의 포로

"너희 문화 사람들 중에 어떤이들이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 하니?"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잖아. 날마다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냐고 되묻더라.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 그리고 묻더라.

"왜 멈추지 않는 거지?"(42p)

왜 인간은 멈추지 않는 걸까. 인간은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너희는 이야기의 포로야!"(54p)

그리고는 히틀러 이야기를 하는 거야. 뜬금없이. 히틀러 통치 아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포로였대. 이야기의 포로. 히틀러가 말하는 아리안족 이야기에 사람들이 포로가 된 것이라고. 우습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텐데, 당시 독일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믿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니 그런 거 같더라고. (53p)

"너희 문화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받아들이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어."(65p)

우리한테 이야기가 있대. 그걸 '어머니 문화'라고 부르재.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데, 나 참 황당해서.


해파리의 출현

"우주는 아마 100억 년 내지 150억 년 전쯤에 태어났어. 우리 태양계는 20억 내지 30억 년 전에 생긴 것 같아. 그러다 약 10억 년 후 생명체가 출현했어. 수백만 세기 동안 세상의 생명체는 오직 화학 수프 위를 무력하게 떠다니는 미생물 뿐이었어. 하지만 조금씩 더 복잡한 형태가 출현했지. 단세포 생물, 조류(藻類), 기타 등등. 하지만 마침내 '해파리가 출현했어!'"(84p)

해파리가 출현했대. 해파리가. 어처구니 없어서. 해파리가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라고 해파리가 말했다는 거야. 말도 안 된다고 말했지.

"너희 인간이 그렇게 말하잖아. 인간이란 창조물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그건 신화야. 하나의 이야기지. 혹시 창조가 인간의 탄생과 함께 끝났다는 증거를 본 적 있어?"(85p)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그런 증거를 본적이 없는 거야.


이야기의 공연

"너희는 너희가 믿는 이야기대로 '공연'하면서 살아가지. 이야기대로 '공연'을 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과, 그 이야기대로 살아가지 않는 역할을 맡지 않은 자들로 나눠보자고. 만약 세계가 너희를 위해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는 우리 것이니까, 우리 마음대로 해도 좋지,라고 답했어. 맞혔대. 너희가 지난 만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다고. 인간은 정착을 위해서 환경을 조작해야만 했대. 그게 전환점이었대. 전환점. 인간이 가진 이야기가 바뀐. (99p)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지식도 갖고 있어?"(126p)

아니, 없을 걸, 이라고 밖에 답을 못하겠더라. 이상하지.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답이 없다니. 과학은 왜 그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인간 안에 있는 결함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인지도 몰라."(127p)

그 말에 동의가 되더라.


법칙과 생명공동체

"만유인력의 법칙이 뭐지?"

또 뜬금 없이 묻더라. 만유인력의 법칙.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설명했지.

"인간은 이 행성 위에 혼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인간은 공동체의 일부야. 인간이 구성원인 공동체의 이름이 뭐니?"

생명공동체지, 라고 답했어. 하지만 익히 들어온 '어머니 문화'에서는 인간은 예외적 존재라서 생명공동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했어.

"왜 안 되지? 소나 바퀴벌레는 만유인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 너희는? 공기역학의 법칙에서 제외돼? 유전현상은? 열역학은?"(139p)

난 모두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날기를 원할 때, 비행을 좌우하는 공기역학의 법칙이 관련이 되지. 너희가 멸종 위기에 놓여서 좀 더 살고 싶어질 때 비로소 생명을 좌우하는 법칙이 관련이 되겠지. 법칙에 순응해서 살지 않는 종은 멸종하게 돼 있어."(145p)

설마, 난 믿을 수 없었어. 인류가 멸종하게 될 수도 있다니. 말도 안 돼.

"자, 90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남자가 있어. 그 남자가 10층을 지날 때 자기자신한테 말할 거야. '지금까지는 너무 좋아!'"

우리가 그렇다는 거야. 추락 중이라고. 곧 추락할 것인데,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


끔찍한 이야기

"너한테 끔찍한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A, B, C가 한 마을에 살고 있어. A는 B에게 먹히고, B는 C에게 먹혀. 그리고 C는 다시 A에게 먹혀. 어때?"(160p)

서로 먹고 먹히는 세상이라니 끔찍했어.

"사실 이 세상은 끔찍하게 완벽하게 민주적이고 우호적이야. 너한테는 무시무시할지 몰라도. 그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아. 계급도 없어. C는 단지 B가 자신들의 먹이라고 B에게 주인 행세를 하지 않지. 결국 C 자신들이 A의 먹이니까. 이들은 법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그 법을 잘 따르지. 그래서 고도로 성공한 사회를 이룩했어."(161p)

그 법칙을 어기면 벌칙이 있어?, 라고 물었어.

"응, 죽음이지. 법칙을 어기면 사형집행이 벌어지게 될 거야."
"생명공동체는 질서정연한 사회였어. 초록식물은 초식동물의 먹이이고,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이고, 육식동물 중 어떤 건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지. 그러고도 남겨진 것은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의 먹이가 되고, 이 동물 또한 초록식물에게 필요한 흙 속 영양분으로 돌아가게 돼."(165p)

응, 당연한 이야기였어. 나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영양과 사자는 너희 '역할 맡은 자들'의 생각에서만 적일 뿐이야. 영양 떼와 마주 친 사자는 적에게 하듯이 영양 떼를 대량학살하지 않아. 한 마리만 죽이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사자가 사냥감을 죽이고 나면, 다른 영양은 무리 중앙에 사자가 있어도 한가롭게 풀을 뜯어. 공동체 내에 누구나 지키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165p)

법칙, 그래 그렇다고 우리가 법칙을 어기는 것은 아니잖아. 법칙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난 생각했어.


'역할 맡은 자들'이 하는 짓

"좋아, 다른 생물은 하지 않는데 너희 '역할 맡은 자들'이 하는 네 가지 짓이 있어.
먼저, 자신의 경쟁상대를 전멸시켜. 야생에 사는 동물들은 목장주나 농부들이 여우와 코요테를 잡는 것처럼 경쟁자가 죽을 때까지 사냥하지는 않아. 만약 예전부터 그랬다면 경쟁의 각 단계에는 하나의 종, 최강자만 남았겠지.
둘째, 너희는 자신들의 먹이를 위해 경쟁자의 먹이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자연의 법칙은 '네가 필요한 것만 가져라, 그리고 나머지는 내버려두어라'지.
셋째, 다른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 '모든 영양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야.
넷째, 너희는 내일 위해 저장해. 사슴은 바로 앞에 있는 풀을 먹지, 겨울에 먹으려고 풀을 저장해 두지는 않지."(176-178p)

일리가 있더라고.

"다른 종들이 지켜온 법칙들이 향상시키는 건 뭐지?"


다양성

다양성이더라고. 만약 인간처럼 법칙을 다른 종들도 지키지 않았다면 공동체가 몇십 종, 몇백 종밖에 안 될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문제가 되지.

"다양성이 부족한 공동체는 생태학적으로 취약하고 고도로 민감해. 존재하는 상태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전체가 붕괴되겠지. 다양성은 공동체 그 자체의 생존 요소야. 1억의 종 내에서는 지구 기온이 갑자기 20도 내려간다고 해도 수천 종은 살아남겠지. 하지만 수백, 수천 종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생존 가망성이 거의 없어."(181p)

"만약 하나의 종이 이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모든 종이 따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와. 단 한 종의 팽창을 지탱하기 위해 다양성이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공동체로 종말을 맞게 되지."(181p)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라는 거지.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걸까.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손재주 있는 사람이란 뜻)가 등장했을 때 동시에 뭔가와 경쟁에 돌입했다는 게 중요해. 한 가지가 아니라 수천 가지 종과 경쟁하게 되지. 만약 호모 하빌리스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모든 것은 조금씩 감소해야만 해. 이건 여태까지 이 행성 위에 존재하게 된 모든 종에게 해당된다고.
인간의 정착은 경쟁의 법칙에 꼭 상반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정착은 경쟁의 법칙에 종속되지."(188p)

정착은 경쟁의 법칙에 종속된다라.


식량 생산의 증가와 인구 조절

"너희는 무슨 목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려고, 라고 답했어.

"그럼, 너희는 그들을 먹여 살릴 때, 자손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자손 생산?, 생각하지도 않은 점이었지. 그런 계획은 없는 것 같은데.

"너희들이 식량생산을 늘려서 수백만 사람들을 먹여 살리면, 자손을 생산하고 인구가 늘겠군. 그리고 또 증가된 인구를 위해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한테 피임기구를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없겠지. 식량 생산의 증가는 연례행사지만, 범세계적 인구조절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행사야."(192p)

하지만 어떻게 식량 생산의 증가를 멈출 수 있냐고. 인구조절은 어떻게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어.

"오존층의 파괴를 멈추는 것, 열대우림의 벌목을 막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참.

지금껏 말한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역할 맡은 자들'이 아니라,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어. 아프리카의 부시맨, 오스트레일리아의 알라와족, 브라질의 아크로레족(브라질 아마존의 타파조스 강 유역에 사는 원시 부족으로 1973년 코웰Cowell의 책 '미지의 종족 The Tribe that hides from man'으로 알려짐), 미합중국의 나바호족 이야기를 하더라고.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이 갖고 있고 공연해오고 있는 이야기는 정복과 통치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 이야기를 공연하는 것은 그들에게 만족스럽고 의미 있는 삶을 가져다 줘. 그들 사이에 가면 금방 알게 돼. 그들은 불만과 반항으로 끓어오르지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에 대해 끝없이 언쟁하지도,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고 서로를 끊임없이 비난하지도, 서로를 무서워하며 살지도,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해서 미치게 되지도, 매달릴 뭔가를 줄 새로운 종교를 매주 발명하지도, 삶을 살 만하게 할 일을 찾아 영원히 해매지도 않아. 그들이 자연에 가까이 살아서도, 공식적인 정부가 없어서도, 그들이 타고난게 고상해서도 아니야. 단지 그들이 사람에게 유익한 이야기, 3백만 년 동안 유익하게 작동해 왔고, '역할 맡은 자들'이 짓밞아 없애버리지 않은 곳에서는 지금도 유익한 이야기를 공연하고 있기 때문이지."(207p)


신화 - 창세기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원시부족처럼 살아가야할까. 그렇게 살 수는 있을까. 모르겠더라. 이스마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어.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신들이 있었어. 신들이 토론을 하기 시작했지. 한 신이 말했어. 초원에 메뚜기 떼를 보내자고. 그러면 메뚜기 떼를 잡아먹는 새들과 도마뱀들 안에서 생명의 불이 타오를 거라고. 다른 신이 말했어. 그러면 초원에 사는 다른 생물들은 희생을 치를 것이라고. 어떤 일을 해도 그런 거야. 그때 한 신이 말했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어떤 생물들에게는 선이 되고 다른 생물들에게는 악이 된다고. 그러므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말자고. 실제 이런 토론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원을 살펴보니 공포의 도가니가 된 거야. 신들의 행동에 따라 하루는 선, 하루는 악을 주었기 때문이지. 그때 한 신이 뭔가를 떠올렸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열매 맺는 나무를 심어둔 것을 말야."(222-223p)

그리고는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지.

"신들은 아담을 만들었어. 아담이 '생명의 나무'를 찾아낼 수 있도록 탐구심을 베풀어주자고 했지. 하지만 아담은 '생명의 나무' 열매 대신 '선과 악에 대한 지식 나무' 열매를 따먹고 싶은 유혹에 빠질 거라고 했어. 한 신이 말했지. 자신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신처럼 세상을 다스릴 지식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두렵다고."(227p)

그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고, 자신이 신인 것처럼 세상을 통치하려고 했고.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은 농경인으로 사는 데 지치면 농경을 포기할 수 있었어. 지금의 애리조나 주 남동부에 해당하는 사막 지역을 경작하기 위해서 대규모 관개수로를 건설한 종족이 살았었지. 이 종족은 3천 년 동안 이 수로를 유지했으며 상당히 진보된 문명을 건설했어. 하지만 이들은 모든 것을 털고 떠나 버렸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이름은 피마 인디언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야. 호호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란 뜻이지.
'역할 맡은 자들'은 포기하지 못하겠지. 신인 체 하기를 그만두는 일을."(235p)

이스마엘은 창세기 이야기를 새롭게 풀었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중앙에 코카서스인들이 살았고, 아라비아 반도 쪽에는 목축인인 셈족들이 살았어. 이 셈족들이 '역할 맡은 자들' 카인의 확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지. 이 셈족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담의 타락과 형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일을 말했고, 그 이야기만 남게 된 것이지. 이 이야기는 농경인들이 만든 게 아니야. 농경을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바람직한 결정이라고 묘사하지 않으니까. 아담이 신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묘사하지. 아담은 히브리어로 '인간'이란 뜻이야. 이브는 '생명'이란 뜻이고. 아담이 이브의 유혹에 굴복한 것은, '제한 없이 사는 유혹'에 굴복한 것이지. 타락은 본질적으로 불복종의 행위야. 법칙에 불복종하는 행위."(247-250p)

놀랍더라. 어떻게 성서를 그렇게 읽어내지. 그럼 지금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설마, 어머니 문화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걸까. '역할 맡은 자들'과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역할 맡은 자들'과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의 차이

"생산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보존했지. 너희 문화에서는. '역할 맡지 않은 자들' 역시 생산에 관한 정보를 보존하긴 해. 하지만 생산 그 자체를 위한 생산은 거의 없지. 그들에겐 매주 만들어야 하는 항아리 할당량과 화살촉의 할당량이란 게 없어. 생산량을 높이는 일로 골몰하지도 않고. '역할 맡은 자들'은 '사물'에게 유익한 것에 관한 지식을 축적해.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282p, 289p))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할 맡지 않은 자들처럼 살아가는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았어. 그 삶은 아주 고달픈 삶 같으니까.

"음식을 찾아 끝없이, 절박하게 찾아다니기는 커녕, 수렵채취인들은 지구 위에서 가장 잘 먹고 산 사람들에 속해, 소위 일이라는 걸 하루에 두세 시간만 해도 그들은 그렇게 살 수 있었지. 그래서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들에 속하게 되었어. 마셜 살린스(Marshall Sahlins(1930-). 하와이와 피지, 뉴기니아 등 남태평양 원주민 부족들의 삶과 문화를 연구해온 인류학자로 How Natives Think, Stone Age Economisc란 저작이 있다)는 석기시대 경제에 관한 저서에서, 그들의 사회를 '최초로 풍요 사회'라고 묘사했어. 그리고 우연히도 인간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육식동물의  식단에 오르지 않았던 최초의 생물이 인간이라고. 이렇게 생각해 봐. 네가 이 나라에 집 없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고. 일자리도 없고 기술도 없는데, 아내와 두 아이가 있어. 의지할 곳도, 희망도, 미래도 없지. 그런데 버튼이 달린 상자 하나를 너에게 주고 버튼을 눌러라고 말하지. 너는 그 버튼을 누르게 되고, 그러면 즉시 너와 네 가족은 혁명 전 시대로 가게 돼. 물론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게 되고, 그 시대 누구나 가지고 잇던 기술을 얻게 되고. 가족을 돌보는 일로 또다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지. 버튼을 누를 거니?"(307-308p)

선뜻, 대답을 못하겠더라. 회의적이었어. 이스마엘 말대로 여기 삶을 포기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삶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것인지도 몰라. 그리고는 '역할 맡은 자'와 '역할 맡지 않은 자'의 대화를 들려주더군.

"역할 맡은 자가, 자신들의 삶의 장점을 설명하기 시작했어.
 "만약 너희가 직접 심으면, 음식들을 통제할 수 있다."
 "조금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풍부하게 자라고 있는데, 왜 심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합니까?"
"고구마를 먹고 싶은데 야생에서 자라는 고구마가 없는 경우가 없었느냐?"
"있기는 하죠. 하지만 그것은 나리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없다. 우리는 가게에서 고구마 통조림을 사면 된다."
"그렇군요. 그 통조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했습니까?"
"수백명은 되겠지. 키우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트럭 운전사, 통조림 공장에서 씻는 사람, 기계를 돌리는 사람, 상자를 유통시키는 사람, 가게에서 상자를 푸는 사람 등등"
"고작 고구마 문제로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다니, 미친 짓처럼 들리는군요. 고구마가 하나도 없으면, 다른 걸 찾으면 됩니다. 고구마를 손에 넣기 위해서 수백 명이 노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역할 맡지 않은 자가 말했지."(312p)

정말 이스마엘 이야기를 들으니, 미친 짓 같이 느껴지는 거야.
이스마엘이 이렇게 묻더라.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을까?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지?"(327p)

글쎄, 이런 일반적인 질문만 들으면 말문이 막히는 거야.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가 되었지. 진화해서. 만약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누가 살고 누가 죽을 지 우리가 결정한다'라고 말했다면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없을 거야. 왜냐하면 진화가 일어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 때문이야."(328-329p)

이스마엘 말처럼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손안에서 살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인간이 경쟁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자연선택이 진행되는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전-인간(유인원과 인간의 중간형태인 원인Pre-man)이 초기 인간(사람에 더 가까운 원인Early man)으로 진화한 거야."(330p)

진화. 지금의 인간도 진화할 수 있을까.

"너희가 지금처럼 산다면, 인간의 후계자도, 침팬지의 후계자도, 오랑우탄의 후계자도 지금 살아있는 어떤 것의 후계자도 없어질 거야. 전부 너희와 함께 끝나는 거지. 너희가 공연하는 이야기가 실현되게 되지."(331-332p)

인간은 자신의 믿음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전제를 푸는 거야. '역할 맡은 자들'의 이야기 전제는 세계가 인간에게 속한다는 거야. '역할 맡지 않은 자들'의 이야기 전제는 인간이 세계에 속한다는 거지."(332p)

세계를 소유한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지금의 인간이 맞지.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인간은 어떤 운명을 갖고 있는 것이냐고.


인간의 운명

"인간은 선구자, 개척자야. 인간의 운명은 인간과 같은 창조물들이 선택권-신들을 반대하다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옆으로 비켜서서 나머지 생물들에게 자리를 내어 줄 것인가란 선택권-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최초의 생물이라는 거야. 인간의 운명은 모든 창조물들의 아버지가 되는 거야. 직계 후손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나머지 모든 생물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조상이 되는 거지."(336p)

그들의 조상. 좋은 말이지. 하지만 지금 우리보고 다시 수렵채취인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거냐고.

"그건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지. '역할 맡지 않은 자'의 생활양식은 수렵과 채집이 아니야. 나머지 공동체가 살아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지. 수렵채취인뿐만 아니라 농경인도 그건 할 수 있어."(347p)

이렇게 여러 날에 걸쳐서 이스마엘과 이야기를 나누었어. 다시 이스마엘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이스마엘은 죽었지. 이스마엘의 벽보를 표구점에 맡기러 갔을 때 양면에 모두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


벽보의 다른 메시지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을까?"

그리고 다른 면에는 이렇게 써있었지.

"고릴라가 사라지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3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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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고릴라 이스마엘(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2004, 평사리.)>의 이야기를 발췌해서 엮은 것입니다.

이스마엘 홈페이지
www.ishma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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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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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를 읽다

오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하루 만에. 엄마가 읽어보라는 말에 손에 잡았는데. 스스로 놀랄만한 집중력이었다. 내가 집중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힘, 나를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이야기 속에 있었다.

누가 나에게 소설의 주제를 묻는다면

소설의 주제를 누가 물었다면 난 뭐라고 할까. 아마 짧게는 한 줄로, 길게는 한 쪽에서 수 쪽으로 압축해서 소설의 주제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잊고 지냈던 '어머니로서의 삶', 그 희생과 고통.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해온 나를 비롯한 사람들. '어머니'란 사람도 한 개인으로서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남편과 아이들. 그 아이들 중에 한 사람인 나. 왜 나는 어머니란 존재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반성했다.그리고  빨리 독립해야지, 그리고 어머니 생일 때는 꼭 내가 손수 미역국을 끓여 드려야지, 다짐도 했다.

만약 논문을 읽었다면

만약 같은 주제의 논문을 읽었다면 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 참 옳은 말이네. 그래야겠다'고 생각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난 비슷한 주제로 쓴 논문을 읽었지만 생각만 했으니까. 우리 엄마는 어제 소설을 읽다가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우리집에 계시다가 대전으로 내려가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소설이 엄마를 움직였을 것 같다. 전화기 앞에 가서 전화를 하도록. 나도 오늘 소설을 읽고 외할머니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 나까지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힘주어 말할수록

힘주어서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말하는 것만큼 힘없는 말도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의, 선생님의 말씀들이 잔소리밖에 안 되는 것들도 힘주어서 말하니까 그런 것은 아닐까. 힘을 주면 줄수록 읽는 이를 움직이는 힘은 사라진다. 지은이의 주장을 담아 힘주어 말하는 논문을 읽는 사람도 드물고, 그런 논문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은 더 드물다. 생각은 바뀌어도 몸까지는 잘 움직이지 않으니 삶이 바뀌기가 어려운 거겠지.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리를 바꾸는 게 아니라 가슴을 바꾸어놓는다. 사람은 머리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가슴으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조용히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 그 안에서 읽는 이는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고 깨닫는다.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말해주고 보는 사람들은 알아서 이해한다. 글쓴이가 말하려고 했는지 의심스러운 것조차. 글 속 어디에서도 '엄마한테 전화를 자주 하세요!'란 문장이 없어도 사람들은 전화를 한다. 더 많은 것들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각자의 방법대로 다양하게.


덧붙임 - 당연한 전제가 있으니

물론 잘 쓴, 오랜시간 공들인 이야기만 그렇다. 힘 있는 이야기에서만 이야기가 가진 힘이 나오는 거니까. 이야기꾼이 꿈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을까. 내 이야기에 힘이 없다면 왜일까, 생각해본다. 대충 쓰고, 노력도 하지 않고, 조사도 하지 않고, 힘만 잔뜩 주고 쓰면서 내 이야기에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감동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정말 사람들이 들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다면 잘 공들여서 다듬어서 써야겠다. 혼잣말을 하고, 혼자만 볼 이야기가 아니라면.

2009/04/0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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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영희 옮김 / 좋은생각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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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벌레 같은 삶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난 엉뚱뚱이는 자신이 무시무시한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벌레로 변한 그를 처음에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가족들은 대했다. 때되면 밥 먹으라고 말도 해주고. 시간이 지나자 그가 무엇을 먹든 신경쓰지 않았다. 다른 이웃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렸고, 그는 집 안에 없는 사람 같았다. 손님들이 왔을 때 그가 방에서 기어나오자 가족들은 그를 망신스러워했다.

그는 결국 멸시 속에 삶을 마감했다. 가족들은 그가 없는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카프카의 '변신'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위 이야기와 같을 것이다. 변신의 처음과 끝을 보자.

카프카의 '변신'

어느 날 아침, 어수선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무시무시한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9쪽.)

자세히 살펴보니, 앞날의 전망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서로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상당히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으며, 특히 앞으로의 전망이 좋았다. 또 이사를 하면 상황을 당장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골랐던 지금의 집보다 작고 값싸지만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집을 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잠자 부부는 점점 활기를 띠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딸이 최근 얼굴빛이 창백해지도록 고생을 했지만 어느새 토실토실 예쁜 처녀로 피어났음을 거의 동시에 느꼈다. 잠자 부부는 점점 조용해지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서로 눈길을 나누며 이제는 딸을 위해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전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런 딸의 모습을 통해 잠자 부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이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97~98쪽.)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뒤 가족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방에서 뒹굴뒹굴 놀다가 아버지의 폭력으로 다치고, 그의 방마저 창고로 쓰이다가 끝에 가서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은 뒤 가족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냉혹한 가족들. 자신의 아들과 오빠가 죽고 난 뒤 도리어 기뻐하는 가족들. 끔찍하다.

당신도 변신하고 싶다면

벌레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백수가 되는 것이다. 백수가 되어 한 해, 두 해만 놀면 온갖 억압과 강요, 천대 속에서 그레고르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변신의 방법치고는 너무 간단하다고? 믿지 못하겠으면 해봐라. 가족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버러지보다 못한 놈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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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을 읽는 다른 두 눈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 난 이런 생각을 갖지 못했다. 변신을 읽고 나서 해답지(?)를 엿보는 마음으로 책의 끄트머리에 있는 해설을 읽었다.

작품해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변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어느 ‘평범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부터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일만 했던 그가 왜 벌레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그가 결국은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방에 갇힌 채 쓸쓸히 죽어갈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가족은 잠깐 슬픔에 잠길 뿐 곧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밝은 미래를 꿈꾼다는 이야기의 결말이다. 카프카의 세계에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대략의 줄거리 진행만 보자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너무도 부당한 일을 겪은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읽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우선 잠자는 가족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희생이 정말 반드시 필요했던 것일까? 그 희생의 대가로 그가 권력을 누리지 않았던가? 그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자신과 다른 가족들의 삶까지 망치지는 않았던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잠자에게 부정적으로 내려진다면 잠자가 벌레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은 것은 끔찍하긴 하지만 ‘정의로운’ 결말일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부터 찾아보자. 잠자가 죽은 뒤 남은 가족은 오랜만에 전차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간다. 세 사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앞날의 전망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서로 상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상당히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으며, 특히 앞으로의 전망이 좋았다. 또 이사를 하면 상황을 당장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골랐던 지금의 집보다 작고 값싸지만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집을 원했다. (...) 잠자 부부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들이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닌가? 잠자는 자신만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로, 남은 가족을 ‘무능력자’로 믿고 행동함으로써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잠자가 죽고 난 뒤 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은 잠자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말해 준다. 가족은 잠자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훌륭한 직장에 취직했고 또 무엇보다도 갑자기 닥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실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간 잠자의 희생을 불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오히려 무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272~274쪽.)

잠자는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가족을 무능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유능한 자의 권력을 맛보기는 하지만 오직 돈만을 위해 일하는 일벌레의 삶을 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벌레로 변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며 죽음을 통해 가족들의 삶에서 사라진 것은 - 물론 대단히 엄격하긴 하지만 - 부당한 판결로만 볼 수는 없다.(변신, 카프카, 좋은생각, 2004, 275쪽.)

문화정치론 선생님의 이야기

변신은 1912년 카프카가 쓴 작품(간행 1916년)이다. 시대적 배경이 된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소외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열심히 일했다해도 일하지 않는 순간부터 벌레처럼 취급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상을 풍자한다는 뜻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인간만이 존엄한 사회를 보여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두 이야기 모두 설득력 있다. 선택은 자유. 난 뒤엣것을 택했다.

그가 돈만을 위해 일벌레로 살았다는 판결은 너무 가혹하다. 그레고르 자신은 계속 일해서 음악에 재능이 있는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여동생은 아직 어린 나이였고, 잠자가 벌레로 변함으로써 여동생은 일을 해야만 했다. 피곤한 창백한 여동생의 얼굴은 고단한 그의 삶을 보여준다. 일벌레로 살았다해도 그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던 가족들이 그렇게 냉혹하게 그를 저버리는 것은 정당한가 의문이 남는다. 
 

2008/09/09 09:00 http://blog.hani.co.kr/noriteo/1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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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희곡선 범우고전선 25
아리스토파네스 / 범우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줄거리

빚을 걱정하던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소피스트(궤변론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한테 배우면 아무리 불리한 소송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학원으로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이 거절하기에 자기가 배우기 위해 학원으로 간다. 학원에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궤변론자로 오해했던 거 같다.)가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던 스트레프시아데스는 머리가 아파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 아들을 다시 학원으로 보낸다. 아들은 훌륭히(?) 배워와서 빚소송을 이긴다. 하지만 궤변을 배워온 아들 페이딥피데스는 아버지에게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아버지 스트레프시아데스를 때린다. 이에 화가 난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있는 학원에 불을 지른다.

희곡을 읽었을 때 극의 절정이자 해학이 넘치는 곳은 아버지를 때리는 아들의 궤변이었다. 그곳을 옮겨 적어본다.

아버지를 때리는 아들의 궤변

코러스 : 이게 바로 악덕에 대한 사랑,
이 노인은 채권자를 쫓아내고
빚을 떼어먹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오늘 반드시
그 흉게가 먹혀 들지 않을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했었지.
그의 아들은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워 상대방을 설복하고
법을 어기는 데 능하지만
그의 아들이 차라리 벙어리가 되기를 바랄 때가 오리라.(77쪽)

페이딥피데스 : 제우스에게 맹세코 아버지는 맞아도 싸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77쪽)

스트레프시아데스 : 먼저 왜 말다툼이 시작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술을 마시다가 제금을 들고 저애에게 <털을 깎이는 양>이라는 시모니데스의 노래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저애가 대뜸, 제금을 켜고 술좌석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방앗간 처녀와 같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페이딥피데스 : 마치 매미라도 식객으로 청한 양 제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얻어맞을 만도 하지요.(78쪽)

아버지의 변1 - 널 사랑하니까 때렸다

페이딥피데스 : 제 말을 가로채기 전에 묻겠는데 제가 어린애였을 때 아버지는 저를 때렸습니까, 안 때렸습니까?
스트레프시아데스 : 그야 때렸지, 그렇지만 그건 널 위해, 널 사랑하기 때문이었어.
페이딥피데스 : 그렇다면 저도 아버지를 위해 때린 것이니 정당한 겁니다. 어째서 아버지는 맞아선 안 되고 저만 맞아야 합니까? 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노예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린애는 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어린애가 얻어맞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늙으면 마음이 어린애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노인은 오히려 어린애보다 더 맞아야 합니다. 노인의 잘못은 어린애의 잘못보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80-81쪽)

아버지의 변2- 아들에게 당해야 하는 법은 없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그렇지만 아비가 이처럼 아들에게 당해야 한다는 법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페이딥피데스 : 그런 법을 맨 처음에 정한 사람은 아버지나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제가 이번에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이 법을 만들기 전에 아들이 당한 구타의 몫을 아버지에게 되돌려 준 것뿐입니다. 우리 어린이는 잠자코 그저 맞기만 했습니다. 새나 그 밖의 동물을 보세요. 부리로 어미를 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그것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겁니까? 그것들이 법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곤 말입니다.(81쪽)

아버지의 변3-그러다가 너도 아이에게 맞는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어쨌든 앞으로는 이 아비를 때려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후회하게 될 테니까.
페이딥피데스 : 왜요?
스트레프시아데스 : 내가 네게 얻어맞는 게 당연하다면, 너도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에게 얻어맞게 될 테니까.
페이딥피데스 : 그렇지만 만일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저는 아버지께 얻어맞은 것만으로 손해를 볼 테고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저를 비웃을 게 아닙니까?
스트레프시아데스 : (관객에게) 나와 동연배의 분들, 아무래도 이 녀석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군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좀 양보를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자식한테 얻어맞는 것은 옳은 일 같습니다.(81-82쪽)

아버지 자신의 책임을 깨닫다

페이딥피데스 : 하지만 저에게 이렇게 당하셔도 아버지는 화내실 수 없을 겁니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어째서? 이런 처사에 대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페이딥피데스 :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때려 줄 겁니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그건 더욱 나쁜 짓이다.
페이딥피데스 : 이 사론으로 아버지를 설복한 후 어머니를 때리겠다는데 아버지께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스트레프시아데스 : 뭐라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소크라테스와 함께 너도, 너의 사론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고 말 테다. 오, 구름의 여신이여,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코러스장 : 책임은 악덕에 몸을 맡긴 당신에게 있다.
스트레프시아데스 : 그럼 어째서 처음부터 그 말을 내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시골 영감을 부추겨 놓고 이제와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
코러스장 : 악덕에 몸을 맡기는 자를 보면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하지. 혼쭐을 내서 신을 두려워할 줄 알도록 말이야.
스트레프시아데스 : 오, 구름이여, 매정한 말이지만 당연하다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빚을 갚지 않으려고 한 내가 잘못입니다. (82쪽)

불을 지르는 아버지

소크라테스 : (집에서 나온다) 야, 뭘 하고 있는 거야, 지붕 위에서?
스트레프시아데스 : 공간을 재면서 태양을 관찰하고 있소.
소크라테스 : 에, 야단났다, 질식할 것 같아.
카이레폰 : (집에서 뛰어나오면서) 사람 살려, 타죽는다, 타죽어.
스트레프시아데스 : 뭘 바라고 너희들은 신을 멸시하고 달의 위치를 관찰하는 거지? (노예 쿠산티아스에게) 계속 때려 부숴라, 신을 모독했으니 그런 변을 당하는 건 마땅하지.
코러스 : 자, 밖으로 나가자. 우리는 오늘의 임무를 마쳤으니까.(84쪽)

위 내용처럼 궤변론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희곡이다. 합리적인 논리를 넘어서서 마땅히 지켜야할 가치조차 전복시키는 궤변론자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덧글]
선생님들이 지정할 학생들의 금서,
부모들이 지정할 아이들의 금서.

부모들이나 선생님들 보고 금서를 정하라고 하면 이 책을 뽑을 거 같다. 별다른 논리적 근거도 없이 '사랑의 매'를 남용하는 공간이 가정과 학교 아닌가. 아들의 말이 지나친 궤변 같기도 하지만 일면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하면 무리일까.

한 학생이 습관적으로 폭력을 일삼는 선생님한테 아들처럼
"선생님도 좀 맞아야겠어요. 왜 맞아야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드리죠."
이야기한다면 선생님은 뭐라고 말할까. 내가 좀 더 어릴적에 이 희곡을 봤다면 습관적으로 학생들을 때렸던 선생님에게 한 말씀 해드렸을텐데 아쉽다.

단순한 궤변 같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치밀한 논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도 아들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지 않을까.

읽은 책 : 그리스, 로마 희곡선, 아리스토파네스 외 2인 지음, 최현 옮김, 1989년, 범우사.
이 중에서 희곡 '구름',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2007/04/08 03:05 http://blog.hani.co.kr/noriteo/4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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