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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과 마음의 평화 사이, 무기력한 기다림
"이제 분명한 것은 하나 뿐이었다. 만약 사랑과 마음의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그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평화로운 집이 더 좋았다.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고 좋은 음식을 먹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집보다 좋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진의 소설 《기다림》(김연수 옮김, 시공사 펴냄)의 주인공 쿵린의 말이다. 시골 출신 군의관인 그는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 수위와 결혼하지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만나와 사랑에 빠진다, 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집으로 내려간다. 이혼하러 갔다가 그냥 돌아오기를 17년. 그 긴 세월 동안 쿵린은 한결같이 우유부단하다. 그에게는 변화의 조건을 만들 용기나 변화를 위해 행동할 용기가 없다. 오히려 만나와 수위 사이에서 만나를 알지 못했던 혼란스럽지 않고 사소한 일에 만족하며 살던 시절로 돌아 가기만을 바라며 무기력하게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갈팡지팡하다가는 스스로 비참해질 뿐이오. 여러 해 동안 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다뤄왔소. 당신 같은 사람도 많이 봤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양심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쓰는 부류.(...) 당신 성격이 문제를 만드는 거니까 먼저 당신부터 바뀌어야 하오.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죠? 진정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변화의 조건을 만들 줄 알아야죠."
이런 주변의 충고도 소용없다. 쿵린은 17년 동안 자신이 누굴 원하는지 모른 채, 별거 생활을 한 지 18년이 되면 배우자 동의 없이도 이혼할 수 있다는 법에 따라, 수위와 이혼하고 만나와 결혼해 쌍둥이를 낳는다. 하지만 쿵린도 만나도 행복하지 않다. 오랜 기다림으로 고통받고 좌절한 만나는 쾌활한 젊은 여성에서 절망적인 심술쟁이로 변했고, 쿵린은 이런 만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다. “여생을 함께 보낼 여자라고 확신했어?” “만나보다 내게 더 어울리는 여자가 한 명도 없었나?” 라면서. 그리고 쿵린은 그 긴 세월 자신이 몽유병 환자처럼 무기력하게 기다리기만 했다는 걸 깨닫는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가면서 말이야. 외부의 압력에, 너만의 환상에, 스스로 내면화한 규정에 끌려가면서. 좌절과 수동적인 태도 때문에 너는 잘못된 길로 간 거야. 자기한테 허용되지 않은 일들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자신이 한 번도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었음을. 다만 사랑을 받기만 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기에 쿵린에 절규가 안타깝다.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멍한 혼란 속에서 지내며 눈물범벅으로 절망 속에 빠져들게 될지라도 다시 한번 이 생에서 혼심의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아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고, 함께하는 것들이 행복하다. 그래서 함께 있고 싶다. 쿵린이 바라는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고 좋은 음식을 먹고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집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쿵린은 여전히 사랑과 마음의 평화를 분리한 채 후자를 택하겠다며, 수위에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길 바라면서 쿵린은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수위와 만나 두 여자에게 사랑을 받지만 불행한 남자 쿵린은 결국 “성격이 운명이다.”는 베토벤의 말처럼 계속 사는 것이다. 수위와 만나 두 여자 사이에서. 좌절과 수동적인 태도로 말이다. 사랑 앞에 수동적인 태도로 갈팡질팡하고 있다면 이 구절을 다시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다가는 스스로 비참해질 뿐이오. 여러 해 동안 나는 수백 명의 사람을 다뤄왔소. 당신 같은 사람도 많이 봤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양심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쓰는 부류. 하지만 양심이라는 게 뭐요? 개한테는 줘버릴 심장 같은 거 아니오? 당신 성격이 문제를 만드는 거니까 먼저 당신부터 바뀌어야 하오.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죠?"
"베토벤."
"진정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변화의 조건을 만들 줄 알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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