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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은 한강의 장편소설로 이혼에 양육권을 뺏기고 실어증에 걸린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희랍어 강사의 이야기다.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어가는 남자, 이들이 만나게 된 건 '희랍어'를 통해서다. 소재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지만 소멸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내 이야기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자신이 낸 점자로 된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는 주인공의 고백은 내 마음을 읽어달라는 외로움 외침처럼 들린다. 고요하게 빨려 들어가는 읽는 내내 한 문장 한 문장 숨을 고르며 읽었다. 수천 개의 단어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고른 언어를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소리 내 발음하며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것 같아서.
어쩌면 한강은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하여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희랍어를 통해 우리 안에 침묵과 어둠을 읽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하기 전에 그냥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 속에서...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우리가 그토록 연하고 부서지기 쉬웠을 때, 지구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옮겨다닐 때,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달걀, 같은 흙반죽에서 나온 두 개의 도자기 공 같았지. 네 찌푸린 얼굴, 우는 얼굴, 깔깔 웃는 얼굴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부서지며, 가까스러 무사히 모아 붙여지며 흘러갔지." (80쪽)
"사춘기 때, 저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게 미소였어요. 쾌활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언제든
웃고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저에게는 힘들었어요. 때로는 웃고 인사하는 일이 무슨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의 형식적인 미소를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었어요. 그럴 땐 무술에 능한 동양의 불량배로 보일 것을 감수하며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호주머니에 두 주먹을 찔러넣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뚝뚝한 표정으로 걷곤 했어요.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