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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의 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91
너새니얼 웨스트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평점 :
아무리 시시한 꿈이라는 아예 없는 것보다 나을까?
갑갑하고 답답한 고등학교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허황하고 시시한 꿈들 때문이었다. 좁은 교실 안에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자유로운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괴상망측하고 시시껄렁한 꿈들이었지만, 사소한 부분까지 시시콜콜 묘사하다보면 상상도 그럴싸해 보이고 진짜 같이 느껴졌다. “그 효과는 중세의 화가들이 나사로의 부활이나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그릴 때 세부적인 부분까지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얻는 효과와 비슷했다.”
나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언제부턴가 누군가 소설 속 페이처럼 자신은 언젠가 스타가 될 거라며,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에게만 사랑을 허락하겠다고 하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래, 한번 살아봐라. 인생이 만만치 않을 거다.’고 생각했다. 꿈꾸는 이가 열일곱에 활력과 생기가 넘치고 태양처럼 눈 부실지라도 말이다. 이루지 못한 내 꿈을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의 꿈도 뭉개버린 거다. 이제 꿈같은 거 꾸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난 다른 곳으로의 여행을, 좋아하고 일을,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시시한 꿈이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며 빌어먹는 주제에 찬밥 더운밥 가리겠느냐는 페이의 말이 아프게 파고든다.
“페이는 종종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고 털어놓았다. (…) 우선 라디오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는다. 창작 중인 이야기는 많으니까 마음대로 골라잡으면 된다. 이윽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마치 카드 한 벌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듯이 여러 이야기의 내용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되새겨 본다. 마음에 드는 카드를 찾을 때까지 차례차례 버리고 또 버리기를 되풀이한다. 어떤 날은 카드 한 벌을 다 넘겨 보아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그런 날은 바인 스트리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소다를 사 먹기도 하고, 돈이 없으면 다시 카드 전체를 뒤적거리다가 억지로 하나를 골라잡기도 한다.” (「13」장에서)
너새니얼 웨스트의《메뚜기의 날》은 암울했던 대공황(1929~1939),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암담했던 당시 배경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남루하고 소설 전반에는 우울함과 허무함이 배어있으며 블랙 유머가 흐른다. 시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당시 인물들의 삶과 지금 우리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씁쓸했고 한숨이 새어 나왔으며 공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때 그림을 포기해 버릴까 생각했지만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제안받고 캘리포니아로 온 토드. 스타를 꿈꾸고 잘생긴 남자만 사랑할 수 있고 돈 많은 남자에게만 사랑을 허락하겠다는 페이 그리너.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클로드. 한 호텔에서 20년 동안경리로 일했지만, 폐렴에 걸려 직장을 잃고 서부 해안으로 옮겨온 호머 심프슨. 무성 영화 시대에는 잘 나가던 여배우였지만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갈보 집을 차린 제닝 부인. 가끔 서부 영화에 출연하지만 대부분은 마구점 앞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멍청하지만 얄미울 정도로 잘생긴 카우보이 얼 슈프라. 자식을 배우로 만들기 위해 촬영장 주변을 쫒아다니는 메이벨 루미스와 어린 나이에 영화사를 전전하며 순수함을 잃어버린 어도어.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부산스러우며 격식을 따지는 존슨 부인.
이들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간다. 토드는 돈에 팔려가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거라는 친구들의 말을 뒤로하고 헐리우드를, 제닝 부인은 단역이나 엑스트라로 일하는 대신 갈보집을, 스타를 꿈꾼 페이는 아버지 장례비용을 갚기 위해 ‘누워서 돈 버는’ 창녀 일을 선택했다. 호머 또한 페이가 자신을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걸 알지만 ‘매를 반기는 꼴사나운 개처럼’ 굽실거리며 그녀 옆에 머무른다.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애정에 목말라하지만, 현실을 너무 냉혹하다. 이들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모르겠다. 식물처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스스로 불러들인 고통이라 그저 참고 견디는 걸지도.
“자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완벽한 탈출일까. 종교보다, 예술보다, 남태평양의 섬보다 훨씬 더 좋으리라. 그곳은 지극히 편안하고 포근할 뿐만 아니라 식사까지 전자동이다. 그 호텔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 모든 사람의 핏줄과 신경 속에 그 숙박 시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어둡기는 하지만 얼마나 따뜻하고 풍요로운 어둠인가. 그 속에 무덤 따위는 없다. 아홉 달의 임대 기간이 끝났을 때 누구나 쫓겨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25」장에서)
아, 정말이지 이 책은 숨 막힐 정도로 가슴을 죄어온다. 특히, 배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군중의 일부가 되는 순간부터 뻔뻔스럽고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장면에선 모든 걸 휩쓸어버리는 메뚜기 떼가 떠올라 섬뜩했다. 권태와 실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사기당하고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원한을 불태우며 광란에 빠져 메뚜기 떼처럼 모여든다면, 과연 이들에게 계속 희망을 품으라고, 꿈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타들이 도착하기 시작하면 경찰력을 두 배로 늘려야 할 터였다. 우상처럼 숭배하는 남녀 배우들을 발견한 군중은 곧 광란에 빠질 것이다. 유쾌한 쪽이든 불쾌한 쪽이든 아주 작은 몸짓 하나에도 우르르 움직일 텐데, 그때는 기관총을 들이대기 전에는 결코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 개개인은 단순히 기념품을 얻으려는 의도이겠지만 집단적으로는 닥치는 대로 낚아채고 찢어발길 것이다. 휴대용 마이크를 든 젊은이가 현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신도들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가는 부흥회 목사처럼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27」장에서)
책 전반에 짙게 베어 있는 세상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 때문인지, 책장을 덮은 뒤에도 리뷰를 쓰는 지금도 개운치 않다. 책을 읽은 뒤, 분명해진 거라곤 난 회의주의자도 낙관주의자도 아니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