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좋은 사람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이현 지음, 백두리 그림 / 마음산책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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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좋은 사람》(마음산책, 2014)에는, 단편보다 짧은 열한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편안하거나 평온한 모습은 아니지만, 한 번쯤 경험한 순간들. 하지만 구태여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정이현은 "수십만 개의, 좁고 더더 좁은 골목들로 이루어진 곳"에서 "그 골목을 혼자 걷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살짝 웅크린 어깨와 보풀이 일어난 카디건과 주머니 속에 정물처럼 가만히 들어 있는 한쪽 손"과 "그들이 잠시 혼자였던 바로 그 순간"을 담담히 담아냈다.


뾰족한 모서리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열여덟 살의 이야기<아일랜드>를 비롯해, 단지 태어난 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스물두 살의 기억 <그 여름 끝>, 가정방문 교사로 취직하지만 먼저 백오십만 원짜리 교재를 사야 한다는 말에 고민하는 취업 준비생의 <견디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아내의 비밀이 담긴 <비밀의 화원>, “오줌 참고 밥 굶고" 서울 시민의 발로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 택시기사의 이야기 <별>, 그리고 왕따를 당하던 이미자를 통해 오랜 시간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동창들의 모습을 그린 <이미자를 만나러 가다>, 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헤매는 <모두 다 집이 있다>, 매일 가는 식당에서 먹는 점심 메뉴도 결정 못 해 절절매는, 미지의 세계는 두려워하는 남자의 이야기 <안녕이란 말 대신> 등 그렇게 글로 그려낸 풍경은 낯설지 않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급성 감기처럼 찾아오곤 하는 순간"이고, "귀와 목구멍이 먹먹하고 걸음을 뗄 적마다 운동화 밑창이 땅 밑으로 푹푹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기억의 조각들이다. 그렇게 마음 한편을 서늘하게 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속수무책의 순간들과 마주했다. 그 속엔 어떤 희망이나 기쁨도 없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라고. 그리고 소설은 "행복해라, 꼭."이라며 끝이 난다. 어쩌면 작가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나도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라며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는지도. "행복해라, 꼭."


"그날 밤 결국 작은 차 한 대 편히 뉘일 공간을 찾아주지 못했다. 차를 대로변에 정차하곤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억울했다.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차들이 다 어딘가 무사히 주차되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H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내일 저녁에는 반드시 일찍 귀가사장  하리라. 누구보다도 빨리, 가장 좋은 명당자리를 확보하리라.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이사를 가버리리라. 지하 주차장이 널찍한 아파트에 어떻게든 입주하리라. 당장 은행에다 전세 대출을 알아보리라.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렇다면 승자 아니면 패자가 남을 뿐이었다. 여기 발을 들인 이상 지지 않으리라. 결단코 그러리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맨 먼저 H의 눈에 들어온 건 앞 유리창에 붙은 주차 위반 경고 스티커였다. 귀하의 차량은 주정차 위반으로 도로교통법 제160조 제3항, 제161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과태료 부과 대상 차량입니다. H는 눈을 끔뻑이지도 않고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그의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거렸다.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차 밖으로 나갔다. 힘껏 주차 위반 딱지를 떼어냈다. 그는 지금 이 시대의 용맹한 전사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 <모두 다 집이 있다>, 136~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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