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거리, 질투, 엿보기에 대해
1.
흔히 연애에 능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집착만큼이나 나쁜 게 무관심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거리’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그/녀에게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워 거리를 두지만, 그러한 거리두기는 종종 무관심과 혼동되기 일쑤다. 사랑의 대상이 그 거리두기를 무관심과 혼동하는 것에 대해 타박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단순한 ‘믿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렵고도 어렵다.
집착과 무관심 사이에서 그 거리두기는 마치 현악기의 현처럼 적당한 긴장을 필요로 한다. 적당한? 정말 적절하지 않은 단어다. 사랑에서의 거리가 적당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연결된 끈은 뚝 끊어져버리고 만다. 거리두기는 차라리 집착과 무관심 사이에 새로운, 그러나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와는 다른 거리를 요구한다(거리는 ‘이중분절’ 되어 있다). 집착과 무관심 사이의 거리는 현이 떨릴 때의 거리와 흡사하다. 집착에 좀 더 다가갈 때 우리는 질투하고, 무관심으로 밀려날 때 우리는 엿본다.
2.
소설 『카자르 사전』에는 ‘에블리스의 운지법’이 나온다. 에블리스는 이슬람교의 악마로, 그가 류트라는 악기(기타와 비슷한)를 연주 할 때는 “열 개의 손가락과 한 개의 꼬리”로 연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동네에 육손이 할머니가 있었다. 새끼손가락 옆에 손가락이 하나 더 붙어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악마처럼 손가락이 열 한 개였던 셈이다. 정상적인 연주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연주되고, 악기들도 그에 맞춰 제작된다. 내 열 개의 손가락이 그/녀를 쓰다듬을 때 우리는 사랑의 악기가 연주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녀가 악기인 것이 아니라, 나도 그/녀도 아닌 ‘우리’가 악기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 손가락이 하나 더, 혹은 꼬리가 하나 더 덧붙여진다. 거기에서 다르거나 불가능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나는 열한 번째 손가락이나 꼬리를 질투라고 부른다.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우리의 몸이 류트의 현이 되어 울릴 때, 질투는 어떤 불가능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화음을 넘어서지만 불협화음은 아닌 음악. 그리고 거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3.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중 「질투」항목을 참조해 보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할 때 나는 아주 배타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이 경우를 정상적이고 관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질투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법을 위반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전도된 관례주의자들은 자신이 질투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더 이상 질투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투는 추하며, 부르주아적이며, 아무 가치 없는 분망함, 열중이며,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열중이다.”
어떤 행위에 대응하는 가치를 유일한 의미 있는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판명 되었을 때 그 행위를 거부한다. 왜냐면 그것이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는 일하는 자에게만 먹을 것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논리). 가치 없는 일에 대한 열중으로서의 질투(프루스트의 ‘카틀레야 하기’)와 보들레르의 권태는 사실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부르주아와 21세기의 자본가는 더 이상 동일한 계층이 아니다. 마치 19세기의 삼각형 구조(상부/하부구조)가 20세기를 거쳐 역삼각형 구조로 변형 된 것처럼,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는 21세기의 <중산층이기를 소망하는 소시민/무의식적인 인텔리로서의 (지식)자본가>로 역할을 바꾼 것이다.
행위와 사유의 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위와 사유의 ‘의미’가 바로 행위와 사유의 ‘가치’로 일관되게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공동체, 혹은 미래의 이상향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은 무엇일까? 그들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전도된 관례주의에 의해, 더 이상 사람들이 질투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고―배타적인 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배당한다―함께 모여 사는 것만을 유일한 가치로 여긴다. 완벽함이라는 이상이 실현되려면 무언가를, 심지어 연인까지 ‘공유’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숭고한 희생제의’.
자본주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인간들을 양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주의는 우리가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기를 그치도록 강요한다. 그 강요의 방식이 바로 윤리이며, 윤리의 자본주의적 전통은 질투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인류애와 공동체 의식의 보존을 위해 연인을 내줘야하는 형국에 직면해 있다.
4.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질투하는 자들이 억압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엿보는 자들 역시 억압 받는다. 질투하는 자와 엿보는 자들, 모두는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비록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엿보는 것이 허락되는 장소는 '유사 성행위 업소'밖에 없다(단속되지 않는 불법). 류트의 현이 끊어지지 않는 만큼의 집착과 무관심이 사랑하는 자의 것이라면, 에블리스의 운지법은커녕 로망스의 단순한 음률조차도 불가능하도록 현을 완전히 끊어버린 뒤의 무관심은 더 이상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장소에서 돈을 집어넣고 엿보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음침한 구석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질투하는 사람이 네 번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엿보는 자 역시 네 번 괴로워한다.
“엿보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엿본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가 그 사람을 엿본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일뿐만 아니라 변태로 오인 받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덧붙임 : 괴로워한다, 를 <즐긴다/즐거워한다>로 바꿔도 된다.
“엿보기 때문에 즐거우며, 엿본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며(존재/자아가 삭제된 상태에서의 마조히즘과 자학은 동일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그 사람을 엿본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즐기며(즐김/향유는 고통 속의 쾌락이라는 맥락 아래서), 통속적일뿐만 아니라 변태로 오인 받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즐거워한다(도착증(perversion)자로서의 즐김/사랑과 증오의 도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