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 모르는 문단

로쟈님 스크랩보고, 해당 기사에 대해 네이버에 썼던 글을 옮깁니다.

 

 

에...또, 참 <인순이와 리듬터치>도 아니고 자꾸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낸 메일이 그렇게 당혹스러웠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곡진한 표현을 썼는데, 마치 내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를 했네. 뭐 뜻은 대충 올바르게 이해한 건 사실이다.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그랬다. 그런데 그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거기에 '자격이 없다'라는 수사를 사용하는 건 대체 뭐냐? 마치 내가 대단한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잖아. 하여간 기분이 매우 언짢으셨는갑다. 이런 글까지 쓰시는 걸로 봐서는. 참 나도 못되긴 했다. 이런 반응, 참 꼬시거든.

 

'기사와 상관없는 제3자'의 반응이라. 메일을 잘 못읽었나보다. 대부분 나라는 사람 잘 모른다. 난 그렇게 이름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문단의 중심에 있는 사람도 아니며, 지인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책이 나온다고 해서 기사가 나오리라는 기대(?) 비슷한 것도 없다. 아니, 내가 쓴 글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너무 잘 안다. 몇 군데서 홍보해서 몇 권 더 팔아봤자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으니 굳이 홍보효과를 노릴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어떤 글이나 현상을 이해할 수 없을 때의 반응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다.

 

게다가 기자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기자들의 일반적인 프라이드를 생각해도 그렇고, 출판사에선 기자에게 굽신거리는데(홍보 잘 해달라고) 좆도 없는 문인들은 왜 고개를 빳빳이 쳐드나 이해할 수 없다고 설레설레 고개 젓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학기자는 자신도 말했듯이 "문단 안과 밖에 한 발씩 걸친 처지"다. 모든 집단이 다 그렇다.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의도하던 하지 않았던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괜히 억울해 할 일도 아니고,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타박 줄 일도 아니다. 문학의 위기라니? 손기자가 생각하는 문학의 위기란 너무 간단명료하지 않은가?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현실을 모르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현실을 잘 아는 공지영이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다. 뭐 그런 거 아닌가? 그건 출판의 위기지 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문학의 위기는 다른 데에 있다. 근대문학이 문화영역에서 이상하리만치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이 위기는, 오히려 자본시장으로 빠르게 휩쓸려들어가는 데 더 큰 위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지위가 하락한 것이 아니라 이제 제 자리로 돌아와 문화의 언저리에서 '노는 것'이 문학의 할 일이다. 죽은 자식 불알은 그만 만져도 된다(문학콘서트 같은 괴상한 짓도 그만하니까 좋네).

 

'현실을 너무 몰라'라고 말하는 기자님은 현실을 잘 아는가 보다. 기자님은 문학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문학에 '낭만'이 있기 때문이란다. 흠, 통키타 치던 70년대를 살고 계시는가? 용어 자체의 이해도 모자라신 분이 한유주 같은 소설을 읽고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다. 미래파 시인들은 더 하다. 이 100회 특집 기사에선 '문학터치에 출연'하신 젊은 문학인들의 면면을 보여주시면서, 나름 젊은 문학과 호흡을 같이 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그 분들의 개별 평을 한 번 보시라. 그저 문단 비평가들이 말하는 분위기를 통해서, 뭐 솔직하게 난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왠지 거론하지 않으면 낡았단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억지로 읽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문단 내부에서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지 않는 것 자체가 문학의 위기의 증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 점은 기자님도 지적하셨다. 문학동네 여름호 대담을 보면 참말 그렇다. 그렇다고 기자님처럼 출판의 위기와 문학의 위기를 혼동하시면 그만큼 난감하고 곤란한 일이 없다.

 

 

어쨌든 내가 보낸 메일이 무척 황당하셨을 거라는 건 나도 안다. '토론하자'란 부류나 '네가 잘 몰라서' 라는 부류는 그래도 일단 문학터치에서 다뤄져서 일단의 홍보가 이뤄진 뒤에 울리는 뒷북이다. 당연히 기자님이 당황스럽더라도 최소한 기자님의 프라이드를 해치지는 않는 범위였다. 기자님이 제일 당황스럽다고 한 부분은 내가 아무리 간곡한 표현을 썼더라도, 그 간곡한 표현이 기자님의 프라이드를 가차없이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부탁은 그거다. 내가 박형서나 한유주를 두둔해서, 자기와 상관없는 작가들에게 괜시리 감놔라 밤놔라 하는 게 아니라. 박형서와 한유주도 이 정도로 괴상하게 읽는다면 내 소설은 안 봐도 뻔한 거 아닌가? 내 메일 때문에 안 쓰신 게 아니라 사실 쓸 이유도 없고(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걸), 쓸 여력도 없고, 쓸 능력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메일 보냈을 때 심정은 '자꾸 뻘 소리 하는 거 보기 싫으니까 제발 닥쳐줄래?' 였다. 기자님 덕분에 8년간 보던 중앙일보 끊은 건 알고 계신가 모르겠다.

 

문단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문인 개개인들이 대부분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이유도 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집에 가면 외로워서 죽을라고 하는 게 또 문인들이다. 괜히 껴들어서 좋은 꼴 못 본다. 그리고 문단 술 자리 자주 하는 사람들 몇 명 되지도 않는다. 문단과 상관없이 친한 사람들끼리 어울려 마시는 경우가 더 많다. 기자님네 회식자리가 매일 있는 게 아니듯이 문단 회식자리도 분기나 반기, 혹은 연말에 한 꺼번에 한다. 그 외 잡다한 술자리는 출판기념회를 가장한 술자리거나 친한 사람들끼리 마시는 술자리일 뿐이다. 차 끊겨서 택시 타고 집에 갈 정도로 돈 많은 사람들도 아니라, 그냥 누군가 계산하겠지하면서 죽치고 새벽까지 마신다. 그 뿐이다. 대개 낫살 드신분이나 출판 관계자들이 술값을 계산하니, 뭐 공짜술 마다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정작 현실을 모르는 것은 기자님이다.

"그래도 밥보다 글이 먼저"라고 말하시는 거에서 지금까지 기자님 논리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드러나지 않나? 그 가느다란 논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건 기자님식의 '낭만적 수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밥이 먼저다. 밥 먹고나서 글쓰지, 밥 굶고 글 쓰는 거 별로 환영할 일 못된다. 기자님 일주일에 댓건 취재하고 받는 월급으로는 과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배가 부르니까 문학터치 같은 것도 쓸 여력이 있는 거다. 문학도 일단 돈벌이는 되야 한다. 단 그건 최소한의 돈벌이여야 한다. 생활을 위해서는 다른 직장을 가져야 한다. 딱히 전업으로 돌아서는 거 환영할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루 한 두시간만 글 쓰는데 투자해도 된다. 나머지 시간에 놀 생각하니까 문인들이 굶는 거 아닌가? 말 길어진다.

 

 

이 포스트는 공개로 해놓겠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 통해서 이 글 읽으시면 너무 화내지 마시라. 다만, 우리나라 문학을 마치 혼자 걱정하는 듯한 제스처는 분명히 '오바'라는 건 알아주시기 바란다. 기자는 그냥 책의 정보만 객관적으로 다루면 된다. 자기가 못할 것 같으면 외부필진들 돌리면 된다. 기자님은 그냥 각종 행사나 뭐 그런 자리의 가십거리만 다뤄주시길 바란다.

 

 

내가 기자님한테 보낸 메일도 공개한다.

 

출처 내 메일
안녕하세요. 손민호 기자님.
기자님은 저를 잘 모르시리라 생각합니다. 첫 메일에서 무례한 부탁을 하려는데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2000년에 문예중앙으로 등단했고, 2004년에 열림원(문학.판)에서 [검은 소설이 보내다]라는 소설집을 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면 두 번째 소설집이 문예중앙에서 나오게 됩니다.

집에서 중앙일보를 보는 탓에 손기자님의 문학터치를 종종 보고 있습니다.
부탁드릴 말씀은,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제발 문학터치에서 제 소설집을 다루지 말아주십사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성격이 좀 지랄맞아서 혼자 별스럽지 않은 일에 흥분을 잘합니다.

손기자님의 문학관에 대해서도 저하고는 너무나 안맞고 너무 달라 저는 저대로 손기자님은 괜히 시간을 버리며 읽으시고 스트레스 받으실까봐 그러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한유주와 박형서인데, 기자님의 문학터치에서 한유주는 횡설수설하는 작가로, 박형서는 개그작가로 추락하고 말았더군요. 저로서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메일을 보냅니다.

이해하시리라 믿고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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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부 문화의 씨앗, 해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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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6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브리티 2007-11-16 17:26   좋아요 0 | URL
어헐.. 여기까지 찾아오셨군영..-_-
 

    사랑, 거리, 질투, 엿보기에 대해
 

 

 


     1.

    흔히 연애에 능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집착만큼이나 나쁜 게 무관심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거리’에 대한 얘기다. 우리는 그/녀에게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워 거리를 두지만, 그러한 거리두기는 종종 무관심과 혼동되기 일쑤다. 사랑의 대상이 그 거리두기를 무관심과 혼동하는 것에 대해 타박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단순한 ‘믿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렵고도 어렵다.

    집착과 무관심 사이에서 그 거리두기는 마치 현악기의 현처럼 적당한 긴장을 필요로 한다. 적당한? 정말 적절하지 않은 단어다. 사랑에서의 거리가 적당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연결된 끈은 뚝 끊어져버리고 만다. 거리두기는 차라리 집착과 무관심 사이에 새로운, 그러나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와는 다른 거리를 요구한다(거리는 ‘이중분절’ 되어 있다). 집착과 무관심 사이의 거리는 현이 떨릴 때의 거리와 흡사하다. 집착에 좀 더 다가갈 때 우리는 질투하고, 무관심으로 밀려날 때 우리는 엿본다.


    2.

    소설 『카자르 사전』에는 ‘에블리스의 운지법’이 나온다. 에블리스는 이슬람교의 악마로, 그가 류트라는 악기(기타와 비슷한)를 연주 할 때는 “열 개의 손가락과 한 개의 꼬리”로 연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동네에 육손이 할머니가 있었다. 새끼손가락 옆에 손가락이 하나 더 붙어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악마처럼 손가락이 열 한 개였던 셈이다. 정상적인 연주는 열 개의 손가락으로 연주되고, 악기들도 그에 맞춰 제작된다. 내 열 개의 손가락이 그/녀를 쓰다듬을 때 우리는 사랑의 악기가 연주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녀가 악기인 것이 아니라, 나도 그/녀도 아닌 ‘우리’가 악기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 손가락이 하나 더, 혹은 꼬리가 하나 더 덧붙여진다. 거기에서 다르거나 불가능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나는 열한 번째 손가락이나 꼬리를 질투라고 부른다.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우리의 몸이 류트의 현이 되어 울릴 때, 질투는 어떤 불가능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화음을 넘어서지만 불협화음은 아닌 음악. 그리고 거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3.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중 「질투」항목을 참조해 보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할 때 나는 아주 배타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이 경우를 정상적이고 관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질투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법을 위반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전도된 관례주의자들은 자신이 질투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더 이상 질투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투는 추하며, 부르주아적이며, 아무 가치 없는 분망함, 열중이며,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열중이다.”

    어떤 행위에 대응하는 가치를 유일한 의미 있는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판명 되었을 때 그 행위를 거부한다. 왜냐면 그것이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는 일하는 자에게만 먹을 것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논리). 가치 없는 일에 대한 열중으로서의 질투(프루스트의 ‘카틀레야 하기’)와 보들레르의 권태는 사실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부르주아와 21세기의 자본가는 더 이상 동일한 계층이 아니다. 마치 19세기의 삼각형 구조(상부/하부구조)가 20세기를 거쳐 역삼각형 구조로 변형 된 것처럼,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는 21세기의 <중산층이기를 소망하는 소시민/무의식적인 인텔리로서의 (지식)자본가>로 역할을 바꾼 것이다.
    행위와 사유의 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행위와 사유의 ‘의미’가 바로 행위와 사유의 ‘가치’로 일관되게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공동체, 혹은 미래의 이상향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은 무엇일까? 그들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전도된 관례주의에 의해, 더 이상 사람들이 질투하지도 배타적이지도 않고―배타적인 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배당한다―함께 모여 사는 것만을 유일한 가치로 여긴다. 완벽함이라는 이상이 실현되려면 무언가를, 심지어 연인까지 ‘공유’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숭고한 희생제의’.

    자본주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인간들을 양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주의는 우리가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기를 그치도록 강요한다. 그 강요의 방식이 바로 윤리이며, 윤리의 자본주의적 전통은 질투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인류애와 공동체 의식의 보존을 위해 연인을 내줘야하는 형국에 직면해 있다.
 

    4.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질투하는 자들이 억압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엿보는 자들 역시 억압 받는다. 질투하는 자와 엿보는 자들, 모두는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비록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엿보는 것이 허락되는 장소는 '유사 성행위 업소'밖에 없다(단속되지 않는 불법). 류트의 현이 끊어지지 않는 만큼의 집착과 무관심이 사랑하는 자의 것이라면, 에블리스의 운지법은커녕 로망스의 단순한 음률조차도 불가능하도록 현을 완전히 끊어버린 뒤의 무관심은 더 이상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장소에서 돈을 집어넣고 엿보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음침한 구석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질투하는 사람이 네 번 괴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엿보는 자 역시 네 번 괴로워한다.
   “엿보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엿본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가 그 사람을 엿본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일뿐만 아니라 변태로 오인 받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덧붙임 : 괴로워한다, 를 <즐긴다/즐거워한다>로 바꿔도 된다.

  “엿보기 때문에 즐거우며, 엿본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며(존재/자아가 삭제된 상태에서의 마조히즘과 자학은 동일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그 사람을 엿본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즐기며(즐김/향유는 고통 속의 쾌락이라는 맥락 아래서), 통속적일뿐만 아니라 변태로 오인 받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즐거워한다(도착증(perversion)자로서의 즐김/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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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수많은 판본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는 그 판본들을 참조할 수는 없다. 사랑의 파국이 우리에겐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우리 개개인들에겐 그것 자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거리두기라는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 사랑의 파국을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거리두기’는 엄밀히 말해서 사랑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의 상연’을 관람하면서 그 연극의 일부가 되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이자 동시에 관객이 된다.

 
   우리는 거리를 두기 이전에 ‘거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사랑을 상연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배우와 관객의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약속이 필요하다. 관객은 어떤 실험극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고 해도, 그 무대 위에선 관객이 아니라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배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무대 위에는 오직 배우만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배우와 관객은 결코 만날 수 없으며, 그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우와 관객과의 거리를 이 극장 안에서 실제로 체험한다. 존재하지 않는 거리를 체험할 때 우리는 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배우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관객이 배우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랑의 상연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상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배우와 관객간의 거리는 끊임없이 좁혀짐에도, 같은 자리에 서는 것, 즉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체득했다면, 그것은 거리두기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조금 더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거리두기는 사랑의 원인이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기술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 배우를 사랑의 다른 이름인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놓으면 한결 이해하기가 쉽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그의 책 <실재의 윤리>에서 이러한 주체를 ‘사드적 주체’라고 말한다. 이 주체들은 결코 욕망의 대상과의 합일, 즉 ‘쾌락 획득’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쾌락 획득의 지연이 그들에게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주판치치는 <위험한 관계>의 발몽을 사드적 주체로 제시하고 분석한다. 그런데 굳이 여기에서 어떻게 발몽이 사드적 주체인가를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드와 발몽의 도착적이고 위험한 사랑이, 실제 우리가 겪는 ‘일반적인 사랑’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실제로 사랑은 질투와 의심, 폭력, 충동, 특히 그/그녀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기 위한 은밀하고 음란한 계획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하룻밤의 사랑과 길고 긴 질투의 시간이 있다면, 이 긴 질투의 시간에 대응하는 행동방식이 있다. 사랑의 전반부에 우리는 연인과 다정하게 살을 부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고, 이제 연인과 살을 부비는 다른 사람의 존재로부터 질투가 내 손바닥에서 싹을 틔운다. 내 손바닥에 아직 연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 그 온기는 여린 질투가 시들지 않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질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고 긴 ‘사랑의 고통’에게 꽃과 열매를 맺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투는 사랑이며, 질투 없이 다정하게 연인을 어루만지던 시간은, 사랑의 전조에 불과할 뿐이다. 끝나지 않을 영원한 사랑은 순간의 다정함과 영원의 질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질투의 시간’을 감싸고 드러나지 않게 만든다. 시작되지도 않은 사랑을 사랑의 전조로 가득 채워, 질투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가정한다. 그러나 질투가 사라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황홀했던 재현된 과거의 시간을 향해 있을 뿐, 여기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연인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고 있는 자에게서 시선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회피하지 말고 엿봐야 한다. 낮은 백열촉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틈에 눈을 붙이고, 저 방에 갇힌 연인의 비음에 귀를 열고, 벌어진 입으로 음란한 침을 흘리면서 엿봐야 한다.
   사랑의 후반부는 오직 ‘질투’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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