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수많은 판본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리는 그 판본들을 참조할 수는 없다. 사랑의 파국이 우리에겐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우리 개개인들에겐 그것 자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거리두기라는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 사랑의 파국을 지연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거리두기’는 엄밀히 말해서 사랑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의 상연’을 관람하면서 그 연극의 일부가 되는 관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이자 동시에 관객이 된다.

 
   우리는 거리를 두기 이전에 ‘거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사랑을 상연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배우와 관객의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약속이 필요하다. 관객은 어떤 실험극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고 해도, 그 무대 위에선 관객이 아니라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배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무대 위에는 오직 배우만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배우와 관객은 결코 만날 수 없으며, 그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배우와 관객과의 거리를 이 극장 안에서 실제로 체험한다. 존재하지 않는 거리를 체험할 때 우리는 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배우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관객이 배우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랑의 상연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상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배우와 관객간의 거리는 끊임없이 좁혀짐에도, 같은 자리에 서는 것, 즉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체득했다면, 그것은 거리두기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조금 더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거리두기는 사랑의 원인이지,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기술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 배우를 사랑의 다른 이름인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놓으면 한결 이해하기가 쉽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그의 책 <실재의 윤리>에서 이러한 주체를 ‘사드적 주체’라고 말한다. 이 주체들은 결코 욕망의 대상과의 합일, 즉 ‘쾌락 획득’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쾌락 획득의 지연이 그들에게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주판치치는 <위험한 관계>의 발몽을 사드적 주체로 제시하고 분석한다. 그런데 굳이 여기에서 어떻게 발몽이 사드적 주체인가를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드와 발몽의 도착적이고 위험한 사랑이, 실제 우리가 겪는 ‘일반적인 사랑’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실제로 사랑은 질투와 의심, 폭력, 충동, 특히 그/그녀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기 위한 은밀하고 음란한 계획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하룻밤의 사랑과 길고 긴 질투의 시간이 있다면, 이 긴 질투의 시간에 대응하는 행동방식이 있다. 사랑의 전반부에 우리는 연인과 다정하게 살을 부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고, 이제 연인과 살을 부비는 다른 사람의 존재로부터 질투가 내 손바닥에서 싹을 틔운다. 내 손바닥에 아직 연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 그 온기는 여린 질투가 시들지 않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질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고 긴 ‘사랑의 고통’에게 꽃과 열매를 맺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투는 사랑이며, 질투 없이 다정하게 연인을 어루만지던 시간은, 사랑의 전조에 불과할 뿐이다. 끝나지 않을 영원한 사랑은 순간의 다정함과 영원의 질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질투의 시간’을 감싸고 드러나지 않게 만든다. 시작되지도 않은 사랑을 사랑의 전조로 가득 채워, 질투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로 가정한다. 그러나 질투가 사라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황홀했던 재현된 과거의 시간을 향해 있을 뿐, 여기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연인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고 있는 자에게서 시선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회피하지 말고 엿봐야 한다. 낮은 백열촉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틈에 눈을 붙이고, 저 방에 갇힌 연인의 비음에 귀를 열고, 벌어진 입으로 음란한 침을 흘리면서 엿봐야 한다.
   사랑의 후반부는 오직 ‘질투’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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