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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동유럽 신화 - 뱀파이어부터 늑대인간까지, 서양 신화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다 ㅣ 드디어 시리즈 11
노아 차니.스베틀라나 슬랍샤크 지음, 송민경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5월
평점 :
📚드디어 만나는 동유럽 신화 / 노아 차니, 스베틀라나 슬랍샤크 / 현대지성(@hdjsbooks)
1️⃣기괴하고 섬뜩하지만, 결국 나약한 인간의 맨얼굴을 비추는 낯선 신화🌘

📖청년 스트라히냐는 90년 동안 멈춰 있던 낡은 물레방앗간을 발견하고 다시 돌리려 한다. 그곳이 멈춘 사연은 90년 전 사바 사바노비치라는 괴짜가 한 여인에게 구애하다 사망했던 서늘한 전설과 맞닿아 있다.
💬첫 챕터의 중요 무대가 하필 '물레방앗간'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인연 같았다. 슬라브 산골의 멈춰 있던 방앗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니무네 방앗간도 열심히 돌려봐야지.

📖산적을 잡으러 떠났던 한 가장은 정확히 열흘 만에 저주받은 늑대인간(부코들라크)이 되어 돌아온다. 여정을 떠나기 전 두 아들에게 남긴 당부가 무색하도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말이야. 너희는 산사나무 말뚝으로 내 심장을 찔러야 한다. 나는 너희 모두를 죽이기 위해 돌아온 저주받은 부코들라크일 테니까.' (p114)
💬가족이라는 가장 가깝고도 안전한 자리에서 가장 짙은 어둠의 의심이 자라나던 이야기.

📖"저희는 가끔 밤피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늑대 가죽을 쓴 자'라는 뜻이죠. 저주 때문에 생긴 것들이에요." (p116)
💬시대와 장소가 바뀔 뿐,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결국 같은 공포의 뿌리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유령 이야기 시합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뱀파이어』가 같은 밤에 태어났다는 사실까지, 읽을수록 고딕 소설이 당기는 챕터였다.
3️⃣크로크의 세 딸 중 막내 리부셰는 농부 프르제미슬과 혼인하고, 그 결합에서 체코의 시작이 가지를 뻗는다.
💬서늘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체코 건국 신화의 근간을 이루는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가 등장했다. 프라하의 탄생을 다루는 신화 속 여성이 누군가의 보조가 아닌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4️⃣새 가족에게 구박받던 바실리사는 숲속 바바 야가의 오두막으로 쫓겨난다. 어머니가 남긴 작은 나무 인형에 의지해 시련을 극복하고, 녹색 불꽃이 타오르는 해골을 얻어낸다.
📖"어린 아가씨야, 내가 너한테 불을 준다면 너는 그 값을 충분히 치를 만큼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p198)
💬나무 인형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음식을, 바바 야가에게 불을 받으려면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기괴한 존재의 차가운 교훈이 유독 묵직하게 다가온다.

5️⃣병약했던 일리야 무로메츠가 기적을 경험하고 거인의 힘을 얻게 되는, 슬라브 최고신 페룬을 배경으로 한 영웅 서사.
💬그리스·로마 영웅의 찬란한 승리와는 결이 다르다. 투박하고 짙은 흙냄새가 나는 서사극이랄까. 너무 짧게 지나가서 파악할 이야기가 부족했던 건 못내 아쉽다.
6️⃣류블랴나의 아름다운 처녀 우르슈카를 홀린 물의 괴물 워터맨의 이야기.
💬전형적인 물귀신 이야기와 비슷했다. 오히려 이야기 뒤에 나온 물의 정령 바냐, 반니크, 빌라의 이야기가 더 눈길을 끌었는데, 그중 '빌라'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서 남학생들을 홀리던 존재라 단번에 떠올랐다. 이런 게 신화의 뿌리를 알아가는 맛 아닐까.
7️⃣불멸의 코셰이를 꺾기 위한 이반 왕자의 모험. 늑대의 모습을 한 양누나 차레브나와 조우하고, 물의 정령 보댜노이를 처치하며 이어지는 환상 서사.
💬마법과 괴물이 뒤섞인 세계. 우리에게 익숙한 서유럽의 신화와는 또 다른 낯선 상상력의 원류를 마주한 기분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된 목판화들은 투박하지만 기괴한 이야기의 결을 아주 잘 살려준다. 반면 책 말미에는 알폰스 무하의 화려한 슬라브 서사시 삽화가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아름답긴 하지만 책이 내내 품고 있던 서늘한 원초적 공포와는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어쩐지 책의 진짜 매력을 가리는 느낌이랄까. 내게는 듬성듬성 놓인 거친 목판화들이 훨씬 더 이 신화들에 어울리는 옷처럼 다가왔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영웅의 찬란한 승리를 노래한다면, 동유럽 신화는 끝없이 펼쳐진 숲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인간들의 원초적 두려움을 품고 있다. 비록 3장 이후로는 분량과 전개가 짧아져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천 년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이 매혹적인 존재들을 훑으며 우리가 즐기는 현대 고딕 호러의 뼈대를 감각하기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