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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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의 열정에 관하여 :: 열정과 타인

<적과 흑>[1]에 관한 생각

 


 

진정한 열정이란 열정 그 자체만을 생각하는 법이다.

파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열정들이 가소로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열정을 드러내는 데 골몰하기 때문에,

옆 사람을 늘 착각에 빠뜨리고 만다.”[2]

 

열정에 자신을 바치는 건 좋다.

그렇지만 열정도 없으면서 열정에 자신을 바치다니!

, 슬픈 19세기여! – 지로데.”[3]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악은 옳지 못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열심히 살아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부모들은 의사가 되어라, 판사가 되어라 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세련된 인간들의 요구는 무엇을 하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열정적으로 해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세기 전 니체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lieber will noch der Mensch das Nichts wollen, als nicht wollen).”[4] 한 세기 전에도 우리의 열정이나 의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자 하는 문제는 꽤 심각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의욕하는 것, 즉 자신이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의 보편적인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이 무엇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대상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열정, 나의 의욕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탕달은 『적과 흑』을 통해 열정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열정에 관한 몇 가지 유형들을 보여주는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주로 열정과 타인에 관계에 관한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 열정의 근저에 타인이 있다는 것, 나의 열정은 곧 타인의 열정 혹은 타인을 위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스탕달 1830년대 연대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적과 흑>은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래도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는 쥘리앵 소렐, 레날 부인 그리고 마틸드 간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그 중 열정과 타인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마틸드일 것이다.

 

마틸드는 라 몰 후작의 딸이다. 브장송 신학교 교장의 천거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된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라 몰 후작의 딸인 마틸드를 유혹한다. 마틸드는 당대의 가장 상류층만 모이는 살롱과 라 몰 후작의 집안을 한 손에 휘어잡고 흔들 수 있는”(424)사람이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빼어난 외모, 자신에게 구애하는 지체 높은 귀족 자제들, 아버지의 권력과 막대한 부, 뛰어난 지성, 마틸드는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살롱의 대화들에서 늘 권태를 느끼고 하층민 출신의 명민한 청년 쥘리앵 소렐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녀는 개성 없이 밋밋한 성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멋진 청년들에게 느끼는 유일한 불만이기도 했다. 그 청년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나 유행을 좇지 않는 것을 은근히 비웃곤 했는데, 그들이 그럴수록 그녀의 눈에는 평범하고 시시한 위인들로 비쳤다.”(451) 하지만 쥘리앵은 다르다. 마틸드가 보기에 쥘리앵은 혼자 행동하기만을 좋아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으며, 그래서 남들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의사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남들을 경멸하기에마틸드는 쥘리앵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틸드는 자신의 열정을 바칠 대상으로 쥘리앵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쥘리앵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권태롭지 않았다. 위대한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자신이 대견해서 매일 스스로를 축복했다. 이 기쁨에는 많은 위험이 뒤따를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럴수록 좋지 뭐! 훨씬 더 좋고말고!”(436)

 

그녀에게 열정이란 반복적이고 평균화된 일상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선조인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추도하기 위해 상복을 입었을 때, 그것은 평균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주변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표시이자 자신은 영웅의 시대를 희구하며 영웅적인 삶을 살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시였다. 그래서 마틸드가 쥘리앵에게 표현하는 호기심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사랑은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서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은 보다 근원적인 열정의 변형태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쥘리앵과 나 사이에서라면 결혼 계약서도 필요 없고, 부르주아식의 의례를 위한 공증인도 필요 없어. 우리 둘 사이에서라면 모든 게 영웅적인 것이 돼. 모든 것이 정해진 틀을 떨치고서 이루어지는 거야. 쥘리앵이 귀족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이것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사랑과 같은 모습이지. 당시의 가장 탁월한 남자였던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사랑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다름없단 말이야. 쥘리앵을 사랑하는 게 내 잘못이겠어? 궁정 귀족 청년들이란 하나같이 <진부한 예법>만 추종하는 데다, 상궤를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험이라면 그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사람들인걸.”(430)

 

마틸드가 쥘리앵에 대한 상념에 젖을 때면, 그녀는 일상적인 안락함의 감옥에 안주하는 귀족 자제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얼마나 영웅적인 것인지를 생각한다. 마틸드에게 쥘리앵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열정을 쏟을 대상이다. 영웅적인 방식으로 이 안온한 상류사회에 파문을 일으킬 자기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사랑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다. 쥘리앵이라는 하층민 출신의 비범한 청년은 파문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대상이다. 마틸드가 보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라 몰 후작의 딸이 목수의 아들에게 헌신한다 라는 사랑 이야기야 말로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영웅적인 모습인 것이다.

마틸드에게 자신을 완전히 쥘리앵에게 바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대한 완전한 파괴이다. 자신이 목수 아들에게 헌실할수록 그 영웅적인 면모는 더욱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다는 만족감”(579)이 마틸드에게 느껴질 때, 그것은 이미 사랑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에 대한 완전한 소유나 그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이라는 사랑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만족감’, 즉 내가 하층민을 사랑하고 있고 그런 자기 자신이 상류 사회의 일상적인 관례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음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틸드의 사랑, 아니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일상의 관례들을 파괴하고 싶다는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맹목적 열정은 귀족적이기 보다는 노예적인 것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노예란 수동적인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치 기준에 대한 반동을 통해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좋음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늘 타인이 필요하다. 마틸드의 열정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주인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열정, 타인에 의한 열정, 타인들에 비친 자기 자신을 위한 노예적 열정이다. 이런 마틸드의 열정은 쥘리앵이 감옥에 갇히자 더욱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마틸드는 자랑스러운 어떤 감정에 도취해 있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자존심마저 압도할 정도였다. 그녀는 삶의 매 순간을 평범치 않은 어떤 행동으로 채우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쥘리앵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긴 대화 내용은 극히 별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계획들로 채워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쥘리앵)는 영웅주의에 지쳐있었다[…] 반면에 마틸드의 오만한 영혼은 자신을 지켜볼 군중과 자신에게 찬탄해 줄 <타인들>을 필요로 했다.”(642)

 

마틸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일탈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일 때, 이를 찬탄해 줄 타인들이었다. 그녀가 영웅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싶어했던 것, 상류층의 살롱에서 권태를 느낀 것은 그들의 그녀에 대한 예찬은 이미 식상한 것이었거나 입에 발린 관례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경탄이나 찬탄의 대상으로서 자신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열정은 <타인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경외의 대상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열정은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봐 줄 타인들이 없다면 그녀의 열정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틸드의 열정은 불행한 것이라고, 또 마틸드는 불행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그녀의 열정에는 늘 <타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녀만의 고유한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타인들>에게 찬탄받을 자기 자신에 도취되거나 그런 상념에 젖어 어떤 일/대상에 열정적인 수많은 마틸드들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열정은 불행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런 열정은 치료되어야 할 이기 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문제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1] 스탕달, 『적과 흑』, 임미경 옮김, 열린책들, 2009. (이하 본문에 페이지수만 표기하거나 각주에 페이지 수만 표기)

[2] pp. 319-320

[3] p. 570.

[4] F.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KSA5, 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Hg.), Walter de Gruyter, Berlin/New York, 2007, p. 412.;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6, p.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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