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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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트루디에 관해 윌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점이다. 그녀 자신의 인생에 의문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윌의 삶에 대해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은 것이다.-50쪽

윌은 오랜 집안 친구에게 건넬 소개편지 한 통만 들고 홍콩으로 왔다. 그런데 함께 있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게 없는 여자를 우연히 만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규정짓기도 전에 그녀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것이다. -53쪽

그녀의 날씬한 몸매는 바다와 하늘 사이 수평선이 단조로움에 대한 수직적 힐난처럼 보인다.-89쪽

윌은 이 시절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모든 일이 그토록 어리석기만 했던 시절, 매일 전쟁을 얘기하면서도 여전히 전쟁은 먼 나라 얘기였던 시절, 그리고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 시절을.-95쪽

몸의 내부가 외부에 비해 너무 커진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모든 느낌을 몸 안에 담아둘 수 없는 것 같았다. -104쪽

그는 군중 사이에 있을 때조차 자신에게 완전히 몰입해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결코 주위를 둘러보는 법이 없었고, 발을 구르지도 않았고, 시계를 보지도 않았다. -106~107쪽

도미닉과 트루디는 서로에게 속해 있지만,(그들이 친척이라는 우연만 없다면) 윌은 그들이 사귄다면 서로 상쇄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창백한 전류가 서로의 빛을 앗아가는 관계 말이다. -128쪽

가끔 그녀는 남편이 그녀와 결혼한 뒤 '아내'라는 라벨이 붙은 곳에 그녀를 떨어뜨려놓고는 자신만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33쪽

"북부전선에 있는 교량은 일본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폭파했습니다......" 나중에, 그 현장에 있던 누군가가 비현실적이었던 그 광경에 대해 윌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이 빤히 보이는 곳에서 부지런히 교량에 폭발물을 설치한다. 일본군도 그만큼 열심히 작업을 하는데, 영국군이 다리를 폭파하면 그 대용으로 사용할 다리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군과 일본군은 애써 서로를 무시한다. 상대편이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불가피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서로를 막으려 하지도 않는다. -148쪽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불량하고 경솔하고 천박할 거라고 예상해왔어. 그리고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최선을 다했지. 그들의 기대치에 맞게 나 자신을 하향조정했다고 말 할 수도 있겠고. 궁극적으로, 우리 대부분은 그처럼 암시에 감응하게 되는 것 같아.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그대로 되려고 하는 거야. 그게 나한테 불리하다고 해도."-303쪽

손가락이 열한 개인 남자가 있었다. 이제는 열 개. 다시 열한 개. 손가락은 정확히 일 년마다 다시 자라났다. 세월을 측정하는 데는 유요한 도구였다. -378쪽

"그래. 모든 게 그렇게 끝났어. 나는 트루디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 오후의 일을 자주 생각하곤 해. 그녀가 얼마나 고독해 보였는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보였는지. 트루디는 살든 죽든 관심이 없었던 거야. 윌이 그녀를 버린 이후로는. 윌 트루스데일이 트루디의 심장을 부숴버린 거지.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토록 비범했던 트루디 리앙에게 부서질 심장이 있었다는 걸 그 누가 알았겠어?"-442쪽

"인셍에는 좀더 많은 것이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었어요."-467쪽

마틴은 한 번도 사랑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니, 결국에는 잘살아갈 것이다. 마틴에게 클레어가 인생 최고의 실망도 아닐 것이며, 비극도 아닐 것이다. 마틴의 실망과 비극은 다른 곳에서 올 것이고, 클레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책임이 없다. 그녀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인 작품이었다. -469쪽

이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은 단순한 깨달음이었다. 일단 저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그녀는 거리 풍경 안으로 녹아들고, 거리의 리듬에 흡수되어 어렵지 않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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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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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읽지 않는 편이구나. 근래에는 거의 소설책과 정신분석 관련 서적만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책상 앞에 쌓여 있는 읽어치워야 할 책들도 대부분 소설들이다. 분명 이런 류의 책들도 재미있다고 느끼지만 재미의 농도가 소설과 좀 다르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역시 이런 책도 가끔 읽어줘야 한다. 나처럼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드문 경우 일상적인 느낌과 소소한 지식, 재미있는 일화 등을 접하는 것 역시 아무래도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소설을 읽는 일이 진중한 대화 나누기라면, 이런 류의 책은 일종의 수다를 가능케 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은 처음이다. 친구가 가볍게 추천한 책이었다. 가벼운 에세이집인 줄 알았는데 비교문학 서적으로 분류해도 좋을 듯 하다. 책을 읽고 찾아보니 번역서가 몇 권 나와 있다. 천천히 한 권씩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녀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일화들과 러시아 문학이나 유머 등을 인용한 부분이 흥미롭다. 앞 부분에 나와 있는 <악마와 마녀에 관한 사전>을 잠시 들여다보자.

 
사랑 : 상대로부터 공짜로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가 대가 이상의 것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하여, 덕 봤다고 생각하게 하는 주문의 일종. 단 주문을 외는 당사자 쪽에서 착각하여 자기 쪽에서 손해봤다고 여길 때가 많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등 일부러 토를 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본래는 대가가 있는 거라고 여겨지고 있다.

희망 : 절망을 맛보기 위한 필수품.

배려 : 약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강자에게만 보이는 친절의 표시.

겸손 : 자만하고 싶은 것을 남이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

 
이렇듯 웃고 넘길 만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통찰력이 엿보이는 일화와 해석, 인용문들도 적지 않다. 위의 이야기도 결국 마녀에게 있어 한 다스는 13개라는, 13이라는 숫자를 터부시하는 서구 지배 문화에 반하는 이단 문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꺼내든 에피타이저다. 이후 본식으로 들어가면 저자의 다양한 경험, 날카로운 비판, 사고의 유연함으로 보다 풍성해진다. 아름다운 나의 마녀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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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문지 푸른 문학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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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버스가 한 두대 정도 들어오는 첩첩산중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에는 비슷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이 어린 소녀일 경우, 그녀를 할머니나 친척집에 맡기고 도시로 간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가 무능력하거나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의 주범인 경우가 많으며 그게 아니면 어머니가 바람이 나 집을 나가거나 일찍 죽는 식이다. 어쨌든 한 쪽의 부재가 또 한 명의 부재를 불러오는 식이다. 그리고 소녀는 낯선 공간과 캐릭터가 뚜렷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둡고 외롭게 성장한다. 김숨의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은 그런 이야기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래서 참신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는 그녀 특유의 내면화된 문체와 인물들의 삶을 때론 잔인하다 싶을 만큼 정공법으로 보여주는 묘사, 소녀의 어둡지만 매혹적인 상상력 등에 빚진 작품의 매력을 이야기해야 겠지. 그녀의 초창기 작품이 읽기에 괴로운, 독자로 하여금 뭔가 결심을 하지 않고는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부드럽다(청소년을 독자로 염두에 둔 이유일까). 그렇지만 여전히 김숨 특유의 묘사들이 살아있고,  여전히 그녀는 어둡고 회피하고 싶은 무언가를 똑똑하게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 그녀의 작품이다, 싶었다.  

얼마 전 읽은 그녀의 단편도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그녀가 쓰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나는 그녀의 작품을 중간에 놓아본 적이 없다. 읽고 나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 느낌이 들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작가의 힘이라면 힘이랄까. 말수가 적고 얌전하지만 기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는 상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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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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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게임에 몰두하고 담배를 피워대도 녀석에게 시간은 마치 재미 없는 예술 영화의 장면들을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처치 곤란한 괴물이었다. -71쪽

김중혁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난 뒤로 가장 놀라운 변화는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된 일이다. 그건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새롭게 발전된, 단지 생존을 위한 종의 진화라고 볼 만한 문제였다. -116쪽

소비의 첨단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타지마할, 코엑스몰-146쪽

그는 단지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겨울철 혹한의 추위로 얼어붙은 길거리의 하룻밤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루살이와 같은 생존 본능에 완벽히 길든 노숙자의 심리다. 우선 살아남고 봐야 한다.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205쪽

밀폐된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상황 자체 때문에 폐쇄 공포증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공포의 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은, 자신이 그 공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적 생각에 스스로 사로잡히는 시점이다. 그러한 절망이 자신을 압도하게 되면 온몸이 화석처럼 굳어가는 환각에 사로잡힌다. -228쪽

하지만 녀석의 무모한 열정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덩치 큰 녀석이 뒤집어쓴 양머리통을 기어이 벗거내는 순간, 그래서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다소 둔해 보이는 덩치 큰 녀석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개봉되는 순간, 기무가 그 녀석이 양이 아닌 명백히 살아 숨쉬며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으로 서울이라는 도시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날마다 패스트푸드나 먹어대며 살아갈 그렇고 그런 청춘임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열정을 박살나고 판타지는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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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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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은 자신있게 말한다. 솔 벨로 읽어봤어? 문체란 그런 거지.  

그리하여 몰래 솔 벨로를 찾아 읽는 박해일이 가졌을 법한 의문, 그래서 문체가 어쨌다고?

그래. 번역본은 번역본일 뿐, 문체 운운하려면 영어사전 옆에 두고 원서를 읽을 일이지(그것도 여러 권), 번역서에서 작가 특유의 문체를 느끼기엔 내 능력이...해일아, 너는 원서를 읽었드냐?

이 냥반 책도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게 거의 없고, 세로줄 읽기에 익숙치 않음에도 애써 찾아 읽은 소설들도 번역이 오래된 것들이라 참 힘겨웠던 기억.

그러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의 작품이 당시 미국의 현실을 재미있게 조립하고 있고, 주로 다루는 자본주의 루저들의 심리 상태와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저간의 상황, 대비되는 인물들의 생생함은 어쨌든 인정하고 볼 일이다.

주인공보다 흥미로운 인물인 탬킨 박사의 잠언과 사기(구라) 중간 쯤에 놓일 법한 이야기는  웬만한 코미디 저리 가라다. 도대체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이야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럼에도 주인공처럼 늘 반신반의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니. 그래서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우연찮게 들어가게 되는 낯선 이의 장례식에서 끝내 터뜨리고 마는 울음이 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는 이들의 익숙한 그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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