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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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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젊은 날의 열정이 휩쓸고 간 자리, 여기 두 사람의 남자가 섰다. 서로의 영혼을 나눠가진 헨린과 콘라드의 오랜 이별의 순간에는 크리스티나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늙은 유모 니니, ‘이기심, 정열, 허영심 아닌 다른 것, 니니가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가……’


‘다른 것과 다른 사람들, 낯선 도시, 파리, 성, 낯선 언어와 풍습이 존재하는 세상을 섬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곰과 노루, 사슴을 죽였’던 오스트리아 근위장교 아버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낯선 프랑스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교양 있는 프랑스 백작의 딸 어머니는 젊은 장교를 따라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무도회에서 몸을 굽혀 절을 하는 순간 그들은 인생을 같이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정열이 이성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열이 사라지고 난 후, 그려는 몹시도 추웠으리라. 방안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사기난로에서 아들 헨릭은 어머니의 슬픔을 느낀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은 영혼의 반쪽과 함께 사라져버린 크리스티나, 그녀의 것이기도 했으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집에서 헨릭은 심하게 앓았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종부성사를 받았다. 헨릭에게는 사랑이 필요했다. 고국의 니니가 불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물리고 니니와 함께 찾아간 곳은 브르타뉴 바닷가, 그곳에서 헨릭은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잦은 병치레(그 병은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고독이 원인이었다)에도 불구하고 헨릭은 뜻을 접지 않고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콘라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병이었다.


갈리시아 출신의 가난한 귀족의 자제 콘라드. 어린 콘라드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 희생한 부모의 인생에 떨쳐버릴 수 없는 책임감을 지고 있었다. 마음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헨릭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헨릭의 어머니와 콘라드가 같이 피아노를 치던 밤, 헨릭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 한다. “콘라드는 절대로 훌륭한 군인이 못 될 거다.” “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지.” 헨릭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콘라드의 소개로 만난 크리스티나에게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 헨릭은 그녀와 결혼한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결합은 헨릭의 열정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크리스티나는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열대를 꿈꾸었다. 그곳에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은 헨릭이 아니라 콘라드였다. 콘라드의 고뇌는 깊어간다. 헨릭과 함께한 사냥에서 그의 총구는 숲속의 짐승이 아닌 자신 앞의 헨릭을 겨냥했다. 힘없이 내려지는 총구, 그날 밤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는 사라진다. 그리고 41년 동안 헨릭은 진실을 알기 위해 친구를 기다린다.


41년 지난 후의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미 세상을 떠난 크리스티나(젊은 날)를 두고 열정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큰 죄라는 것을 헨릭도, 콘라드도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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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 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신문광고로 본 근대의 풍경
김태수 지음 / 황소자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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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고 한참 동안 표지를 들여다봤다. 지난 주 신문에서 보았던 책이 바로 이 책이란 말인가? 신문광고로 근대를 들여다본다고 했겠다. 표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포르노그래피다. '밤의 쾌락을 맛볼랴는 남녀에 권함'. 음... 차례를 본다. 제일 마지막 장이군. 다음은 고무신. 조그만 글씨부터 들여다본다. 풋.. 일년 사용 보증. 뒤축이 닳지 않는 것. 틀림없는 허위광고다. 그러나 밉지만은 않다. '술은 가로대 자용품'이라니. 표지만으로도 재미를 주는 책이다. 뒷 표지에는 뭐가 있을까나. 오오~ 김훈의 추천사가 있다. 내 오늘 이순신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칼의 노래'를 샀건만.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과소비인줄은 알지만 두 권을 몽땅 사버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북글을 쓸 생각을 하다니 오늘의 판단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시작하는 것은 나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근대, 다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접할 때면 몸 안에서 ™“아 오르는 분노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우리의 근대를 달리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치하에서 숨죽이고 살았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확인조차 해보려 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나만큼은 쾌활하고 명랑해져야 하리라.

그 쾌활함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문명국에는 모두 성병이 있으니 조선은 문명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폈던 세상, 나라 잃은 설움은 훈장을 3원에 전당포에 맡기게도 했다. 그래도 50전인 요강보다는 나았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밥 먹기도 힘든 세상에 화학조미료 아지노모도 광고를 보는 것은 또 어떤가? 너무도 세련된 그 광고들과 겹쳐지는 근대의 풍경이 묘한 빛을 띤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문에 버젓이 등장한 기생들의 '정액제 요금' 광고, 포르노그래피 광고는 '섬나라 정치'가 우리의 모습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았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영어 열풍도 무척 놀라운 사실이다. 영어를 '출세의 자본'이라고 한 것은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간 말이지 싶었다.

쾌활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놓고는 너무 무게 잡았나? 이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사진도 꽤 된다. 술을 약이라고 하면서 출근 전에 한잔하라고 권하는 광고, 여학생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머리를 감으라고 한 것 등을 보면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북글을 쓰기 전까지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니 쓰고 나니 생각이 조금 정리가 돼는 것 같다. 개인적인 독서 편력 탓인지 올해에는 잔잔한 책들만 읽었던 것 같다. 오래간만에 박력있고 매력있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오늘 밤 꿈에는 근대로의 시간여행을 떠나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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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 오일장 떠돌이 장수 안효숙의 희망통신
안효숙 지음 / 마고북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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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장 곳곳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나이에 왠 청승인가 싶으면서도 책을 덮으며 가슴 벅찬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처음 책을 만났을 때 '오일장 떠돌이 장수 안효숙의 희망통신'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든 집에 계시는 어머님 생각이 나더군요. 힘들게 살아오셨던 당신의 삶이 책 표지의 안효숙 선생님(앞서 살며 저에게 희망을 전해주신 안효숙 님을 先生님이라고 부릅니다)의 얼굴과 겹쳐지더군요. 한 권의 착한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감히 그 분의 인생에 어떤 평을 한다는 것이 우습군요. 여려웠던 IMF 시절 빚독촉에 시달리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다 어럽게 옥탑방 하나를 얻어 가족이 다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살기 위해 장사하다 남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며 힘든 생활을 참아낸 결과였습니다. 처음에 길거리에서 화장품 장사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애써 용기를 냈습니다. 이젠 그 생활이 익숙해져 나를 벗어나 주변 옥천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부엌 한 켠에 서재를 마련하는 사치도 부려봅니다.

간혹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은 안효숙 선생님의 생각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뒤집어보니 제가 얼마난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게 살고 싶은 법입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형편에 맞게 실현낼 수 있는 지혜, 그리고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삶의 자세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집니다.

그래서 전 오늘밤 다시 책을 읽으며 세상의 검은 때로 가득찬 저의 마음을 눈물로 씻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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