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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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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큰삼촌이 중학생이었을 때 종아리를 때린 적이 있는데 자꾸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단지 수학시험을 못 봤을 뿐이었어요." 할머니는 목이 메어왔다. 외할머니는 할머니가 실컷 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사돈 아직 거기 있어요? 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그래요, 여기 있어요."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큰삼촌이 얼마나 늦게 걸음을 걷기 시작했는지, 어머니가 얼마나 늦게까지 젖을 먹었는지에 대해.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 전화를 끊기 전에 외할머니가 말했다.

그때였다. "이게 뭐야." 남자가 이마를 만졌다. 새똥이었다. 고모는 벤치 주위에 말라붙어 있는 흰 새똥을 발로 툭툭 치면서 새똥 주의라는 푯말을 달아놓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고 농담을 했다. 남자가 새똥을 닦으면서 나지막이 에이 씨, 하고 중얼거렸다. 고모는 더이상 남자를 위해 도시락을 싸지 않았다. 유부초밥만 보아도 에이 씨, 하고 욕을 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똥에 맞고 욕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새똥 때문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작은삼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넌 평생 결혼 못 하겠다, 그렇게도 말했다. "그게 아니야, 오빠. 그 사람은 진화론인가를 공부한다고 했어. 그렇다면 자연의 법칙에 대해선 너그러워야 하는 거 아니야?" 고모의 말에 수긍하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작은삼촌은 노래 몇 곡을 흥얼거리며 불렀다. 이번 여자친구의 생일에는 깜짝파티를 해줘야지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여행을 갔다 온 다음날 여자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일주일 후 작은삼촌은 여자친구의 집 앞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작은삼촌이 운전을 할 때 추월을 자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너 추월을 할 때, 앞서 가던 차의 운전기사가 누구인지 꼭 확인하는 거 알아?" 삼촌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은 삼촌은 추월을 할 때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운전기사의 얼굴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심지어 그날 너는 여섯 번이나 이런 말을 했어. 거봐, 아줌마네." "겨우 그거야?" 작은삼촌이 물었다. "응, 이제 안녕." 여자친구가 대문을 닫았다. 닫힌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작은삼촌은 니가 언제부터 페미니스트가 됐니, 하고 빈정거렸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더니 여자친구가 다시 나왔다. "널 위해 말해주는 건데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야. 그냥 운전을 못하면 아줌마일 거라고 생각하는 니 상상력이 진부해서 그래."

"두달 전이었나." 외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어느 날 밤에 자다 등에 심한 담이 결렸다고. 약상자를 뒤져 파스를 찾아냈지만 결리는 부위는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고, 결국 외할머니는 약국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 간 약국의 약사는 젊은 남자였다. 외할머니는 다른 약국으로 갔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있었다. "여덟 군데나 갔어요. 여자 약사를 찾아서." 외할머니는 마침내 찾은 여자 약사에게 파스를 붙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약사의 손은 찼다. 등에 남아 있는 차가운 기운은 가게 문을 열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족발을 삶는 동안에도 가시지 않았다. 쓸쓸했다. 외할머니는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며 살았다. 외로움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외할머니가 가진 전부였다. "그런데 겨우 파스 하나 때문에." 그날부터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세상이 우리 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등 좀 긁어라."

고모의 주변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고. 하지만 몇 번의 연애를 실패한 후 고모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떨 때 가족이 제일 보고 싶으세요?" 사회자가 물었다. "오늘 아침에 옷을 입다가 바지에 발가락이 걸려 넘어졌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라고요." 첫번째 도전자는 말했다. 작은삼촌은 문지방에 부딪혀서 엄지발가락에 피멍이 들었던 때와 샤워를 하다가 비누를 밞아 넘어졌던 때를 생각했다. 그럴 때면 괜히 엄살이 부리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작은삼촌은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 고민을 했다.

작은삼촌은 퇴근을 하자마자 내 운동화부터 살펴보았다. "정말 달렸네." 나는 작은삼촌에게 사인받은 종이를 주었다. "두 시간 삼십 분 걸렸어."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작은 삼촌이 종이를 보더니 맨 아래에 있는 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니가 몰래 하려다 실패한 거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작은 삼촌에게 조카를 폭력청소년으로 만들어서 좋았냐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작은삼촌이 거짓말쟁이가 될까봐 꾹 참았다고 나는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때릴 줄 알았지만 작은삼촌은 예상과 달리 내 두 손을 잡고는 미안해, 하고 말했다. "불쌍한 놈이 되는 것보다는 한심한 놈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작은삼촌이 말했다. 나는 햇볕에 그을린 작은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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