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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
정재서 역주 / 민음사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중국고전 중에서도 황당무계한 면에서 주역과 자웅을 겨루는 유명한 책이다. 산경과 해경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서남북 어디 몇 백 리를 가면 무슨 나라가 있는데, 동에서 서까지 모두 5억10만 몇 보의 거리고, 태양이 10개가 뜨고, 거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무슨 짐승이 있는데 몇 개의 머리에 몇 개의 꼬리가 달렸고, 중국인 아니랄까봐 짐승마다 '이걸 먹으면 어디에 좋다'는 설명이 꼬박꼬박 달려있다. (이 점이 어쩌면 제일 웃긴다) 해외동경 편에서는 군자국, 청구국, 대인국 등의 나라가 등장하는데, 워낙 다른 책에 인용이 많이 된 부분인지라 설명은 이미 접해본 것들... (이들 나라 모두는 조선을 지칭하는 것들이다)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산해경이 고대 중국인들의 상상력의 큰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신은 어렸을 적 산해경을 탐독하며 꿈을 키워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대개 무슨 나라에는 머리 8개 달린 뱀이 살고 이것의 가죽을 벗겨 차면 사악한 기운을 막아준다 등등인데?) 암튼 지명 비정도 되지 않은 수많은 나라들(그것도 대부분이 어디 어디서 출발해 동으로 4백리에 한 나라, 다시 동으로 2백리에 한 나라, 다시 북으로, 동으로... 나중엔 어디쯤인지 감도 안 온다)을 거치다보면 드는 의문은 다만 한 가지. 이것들이 정말 실존했던 곳인데 다만 중국인들의 관념으로 설명이 안 되어서 신화적으로 기술된 것인지, 아니면 이들 중 대부분이 다만 막연한 상상력의 산물인지 (예를 들면 여자만 사는 나라라던가, 외다리 외팔을 가진 사람들만 사는 나라라던가, 암튼 수없이 많다)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각각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가 되었는데, 당연히 양자 모두 문제점이 있다. 특히 산해경에 등장하는 모든 지명을 실명으로 간주하고 지도에 비정한 다음 중국의 영역에 끌어들이려는 일부 학자들의 시도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것이므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산해경은 대단한 책이다. 중세 서양인들이 막연히 지구 끝에는 용이 살고 불을 뿜는다는 식의 단편적인 세계관만을 가졌다면, 고대 중국인들은 아주 세밀히, 그것도 혀를 내두를만큼 상세하고 리얼하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용 이야기보다는 몇 배나 더 황당한 이야기들을 3만자에 걸쳐서 줄줄이 써 놓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놀랍지 않은가. 만약 진정한 동양의 판타지가 성립하려면, 산해경은 그 대단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본다. 96년판 정재서 교수 완역판. (번역 무난하다. 최근에 이 사람이 중국신화 안내서를 썼는데,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혹자는 이 책을 지리서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이 책을 무서(巫書)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심지어 동식물학 도감으로 생각할 정도로 산해경에 대한 평가와 논의는 분분하다. 사마천도 감히 이 책에 대해서는 논의를 삼가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떤 의미에선 참 대단한 책이다. 한편에서는 산해경이 중국 주변의 민족들의 희귀한 풍습을 마치 동물처럼 묘사했다 하여 중화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산해경이야말로 동이계의 고전이며 신조토템신앙의 발현(상상의 동물과 식물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을 들어 상고시대 무속의 산물이라고 한다. 모두가 보는 눈이 다를 뿐.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볼 수 있다. 시기는 좀 다르지만, 로마인들이 지중해 곳곳으로 뻗어나갈 때 갈리아며 북아프리카 등지의 생활상에 대해 아주 꼼꼼하고 실리적인 묘사로 일관했다면, 기원전 4세기경 중원에 국한해 살던 한족이 넓은 중국대륙 전체로 뻗어나가면서 접한 드넓은 산천, 사람들의 습속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곧이곧대로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신화적 비현실적 묘사는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 개입되어 현실과 인식의 간극을 메워준 상고시대 중국인들의 상상력이 가깝게는 시경과 주역에서부터 멀리는 노신과 현대의 중국문학에까지 끊임없이 변주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며 음악과 미술도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중요하지만, 한족이라는 작았던 한 집단의 연속적 팽창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해경이란 이 터무니없는 책이 지금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